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 / 사월의책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예술작품의 초점조절 기능/

​p183

호메로스 시대에 살았던 보통 그리스인들에게는 이런 인물들 모두가 삶의 방향과 의미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중세의 대성당과 단테의『신곡』역시 비슷한 역할을 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그 작품들을 통해 구원과 파멸의 차원들을 이해했고, 그럼으로써 성자와 죄인을 구별할 수 있었다. 다른 시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대의 패러다임이 된 예술작품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p184

신전, 대성당, 서사시, 연극, 그리고 기타 예술작품들은 그 문화에서 장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만을 떠받들고 주목하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작품은, 부모가 아이들의 어릴 적 사진을 보고 그 시절을 떠올리듯이 그렇게 무엇을 재현하는repersent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신전이 "아무것도 그려 보여주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오히려 예술작품은 작동work한다. 즉 예술작품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드러내고 주목시켜주는 일들을 한데 모아 보여준다. 모름지기 빛을 발하는 예술작품은 그런 삶의 방식을 비추고 주목하게 해주며, 자신의 빛으로 모든 사물을 빛나게 한다. 예술작품은 그 세계의 진리를 구현한다.

* (Agalma)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현대의 우리가 추앙하는 예술작품들은 대부분 과거의 것이고, 현실에서 실제 작동하고 있는 예술작품의 위치에는 즉각적인 문화들(인터넷의 각종 매체들(쇼셜 네트워크, 유투브, 게임)과 싸구려 대중 문화들이기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통합되기 보다 오히려 고립되고 더욱 일시적이며 왜곡되어 있다.

또 한가지 지적이 필요한 것은, 신적 차원(自然과 애니멀리즘)이 그 자리를 대신해주고 있다고 예상할 수 있겠지만 특별한 예술작품이 없는 원시 부족이나 귀농의 삶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안분지족하는 삶에 대해서는 이 논리로는 완벽한 설명이 어렵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민/

​p202~203

기독교의 전통에서 '육화'가 갖는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이런 갈등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예수의 삶은 실존의 한 본보기이기에 영원한 진리의 집합체로 환원될 수 없다. 예수가 특정한 시공간을 통해 세상에 왔다는 점과, 그가 행했던 방식대로 살아감으로써 사람들이 실존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은 기독교적 전통에서 정말로 중요하다. 그가 아가페적 사랑의 정조를 예증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그 정조를 붙들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정조는 철학적 관조를 통해 도달하는 보편적 원리들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정조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에 자신을 조율하는 방식 그 자체를 말하는데​, 우리는 그런 사랑을 예증한 본보기를 통해 그 정조에 접근할 수 있다. 기독교가 강조하는 이 '체현體現'의 측면이야말로 아가페적 사랑이라는 구원의 전조를 이해하는 데 본질적이다. 기독교의 이 요소는 결코 그리스적인 철학 용어로 개념화할 수 없는 부분이다.      

 

 *(Agalma) 프란체스코 교황님 생각이 절로 났다.

 

제 7장 우리 시대의 가치 있는 삶

/테크놀로지, 현대 세계의 공식/

p363~364

테크놀로지는 기예의 필요성을 없애는 것만큼이나 의미의 가능성도 없애버린다. 숙련된 기예를 지닌다는 것은 그 분야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안다는 뜻이다. 이런 기예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차이들을 밝혀주며, 우리로 하여금 그런 차이들 각각의 최선의 상태로 만드는 책임감을 기르게 한다. 이런 기예의 필요성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만큼 테크놀로지가 우리 삶을 단조롭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런 단조로움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로, 이 단조로움으로 인해 세계는 점점 기술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즉 스터트가 나무에 대한 지역적 이해가 죽었다고 말한 것이 이 뜻이다. (…중략…) 질의 저하보다 더 나쁜 것은 차이를 설명하는 기술을 잃는다는 점인다. 기예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서 사라질수록 세계는 ㄷ욱더 가치의 구분을 잃게 된다.

두번째는, 세계가 의미를 상실할수록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도 단조로워진다는 점이다. 사물에 대한 애착과 존경의 정조-어떤 분야에서 가치 있는 것들을 구분할 줄 아는 숙련되고 밀착된 관심-는 우리에게서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Agalma) 테크놀로지는 빠른 커뮤니케이션과 대응이라는 장점이 있다. 지식에 한정해보자. 과거에는 각자가 열심히 자료를 찾고 읽는 자력의 사유 시간이 축적될 수 있었다면, 현대는 인터넷 서핑 등으로 각종 정보를 손쉽게 구할 수 있다보 사유보다 정보수집에 더 시간을 쏟는다. 게다가 무수히 쏟아져 들어오는 방대한 정보를 제대로, 적시에 알고 사용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이러한 단점 때문에 장점은 무용지물이 되거나 오히려 毒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저자들이 강조하는 "메타 포이에시스"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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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소개된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 David Foster Wallace의 소설이 국내에 한 권도 번역되어 있지 않다는 건 매우 유감스럽다.

호메로스와 허먼 멜빌 /모비딕의 훌륭한 해설서이기도 하면서 서양의 일신주의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20세기 신의 죽음을 명명한 니체의 저주를 이 책의 저자들은 '다신주의'를 불러옴으로서 회복을 꾀하려 한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시대에서 문제해결을 모색점을 찾으려 했던 것처럼 이 책의 저자들도 '그리스의 신화' 속에서 찾아보려 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한 공통점이다.  ​

또한 저자들이 이 시대 허무주의를 타계할 다각도의 해법제시는 흥미롭긴 하다.

성스러움의 회복단계: 퓌시스physis(반짝임, 세상에 실재하는  사물들이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방식), 포이에시스poiesis(기예 : 육성 or 창작활동), 메타 포이에시스meta-poiesis​(적시에 성스러움을 얻는 기술)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분석은 <재설정자와 해설자> 부분인데, 즉각적으로 세계의 방향을 바꾸고 정착시킬 수 있는 작동기제는 이것일 것이다. 2000년이 넘도록 막강한 일신주의의 힘, 마르크시즘의 혁명론이 이뤄낸 형국 등등을 볼 때.

그럼에도 못내 씁쓸한 것은 단테가 아퀴나스의 형이상학과 신학에 기초해 그 시대 속에서 노래할 수 밖에 없었듯이 ​우리 또한 니체와 하이데거를 계승해온 어떤 지점 속이라는 것이다. 이 시대는 닫혀가는 어떤 시대이지 열려가는 시점은 아닌 것 같다.

탄광 속 카나리아처럼 반짝이며 노래하는 새들이 좀더 많아져야겠지. 다윈과 프로이트와 니체가 있던 시대처럼. 믿음이 갈가리 찢긴 지금의 인간에게 어떤 기적이 작동할 수 있을지 낙담하며 고대한다.

​ㅡ 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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