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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구멍」

p 15

  마지막 구급차가 다 떠나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밤늦게 사람들이 모두 잠든 후에야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탈의 부모님은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장례식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그분들이 내게 말을 걸었더라면, 나는, 때로 내가 꾸는 꿈속에서의 진실을 말해주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꾸는 꿈속에서 잔디 봉지를 구멍에 빠뜨리는 것은 탈이 아니라 나라고. 어떤 때는 내가 녀석을 밀어 넣는다고. 한 번은 내가 녀석에게 내려가 보라고 부추겼다고.

  그것이 진실이에요, 하고 나는 그분들에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꿈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탈은 살게 되는 그 부분은.

 

*(Agalma) 우리가 꿈(무의식)에서 좋아하는 성질 중 하나는 이미 일어난 일을 전혀 다르게 바꿀 수 있다는 것. 의식 또한 무수히 자기 암시로 진실을 왜곡하고 있음에도 부족한 것이다.

 

 

 

「코요테」

p 18

  아버지에게 분명히 있기는 했던 조금의 재능은 단지 좌절의 원천으로만 작용하며, 실현되지 않은 막연한 잠재력을 끊임없이 상기시킬 뿐이었다.

 

p34

  "나와 같이 갈래?" 잠시 후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가 내게 그런 초대를 한 것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고, 한편으로는 그러겠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어머니가 나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수영 팀에 있어요." 나는 말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 팀이라."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지, 그렇구나. 물론 그래야지." 그런 다음, 그것이 우리 사이의 차이점을 영원히 설명이라도 해줄 것처럼 아버지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 테라스로 통하는 미닫이 유리문을 열고 사라졌다.

 

*(Agalma) 길들여지지 않는 코요테처럼.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p 94~95

  "그런데 뭐에 홀려서 우리한테 그런 문제를 내신 거예요?"

  그가 빙그레 웃었다. "자만심은 물리학자에게 가장 큰 방해요인이지요." 그는 스토브에서 주전자를 들어 도자기 포트에다 뜨거운 물을 옮겨 부으며 말했다. "뭔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발견의 기회를 없애버리게 되니까요."

 

p96~97

  나이가 들면 역설에 환멸을 느끼기가 쉬워지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젊어서는 도전뿐이에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저 피곤해지거든요. 모든 물리학자에게는 자기 너머 수준의 사고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와요. 자기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준"이라고 그는 말했다.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들도, 보어조차도 그 지점에 도달했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음악과 같아요. 재능과 연습은 음악가를 멀리 나아가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굴드의 열광적인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상승으로 가는 아르페지오, 굉음을 향해 가는 크레셴도. "내 말을 이해하겠어요?"

 

p127~129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ㅡ이 두 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ㅡ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중요한 나의 또 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가 생각하기론,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쉽게 파괴도 할 수 있는 나의 일부다. 그것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 어두운 침실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제일 편안하게 느끼는,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고 믿는 나의 일부다. 로버트는 거의 10년 동안 내가 콜린에게 숨긴 비밀이다. 가끔은 그에게 말을 할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기를 10년이 되었고, 그동안 우리는 유산, 파산지경 그리고 시부모님의 죽음을 지나왔다. 이제 나는 우리가 함께 헤쳐나갈 수 없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내가 두려운 것은 그의 반응이 아니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는 그는 그 사실을 내면화하여 속으로만 삭일 것이다. 그 때문에 나를 미워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내색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도 그는 아마도 내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을 테고, 내게서 로버트에 대한 감정을 듣는다고 해도 내게 상처 주지 않을 방법만 생각할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안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게 그러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Agalma) 연애조언에서 빠지지 않는 말 중 내가 양 팔뚝을 감싸 안은 채 입술을 삐죽하는 것이 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르라는 말, 나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조금의 주저라도 있다면 거기서 멈추라고. 실패와 후회를 감당할 마음이 확고할 때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라고. 무슨 말을 듣든, 사랑의 교통사고 소식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다.

   

 

 

「외출」

p 170~171

  레이철은 맨발로 그 다리의 널판들을 가로지르는 경주를 좋아했다. 널판은 60센티미터 정도 간격으로 고르게 놓여 있었다. 보름달이 뜰 때는 쉬웠다. 발을 디디는 곳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밤에는 칠흑처럼 어두웠고, 그러면 앞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발을 디뎌야 했다. 한마디로 믿음이 필요했다. 믿음과 타이밍. 미끄러졌다 하면,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났다 하면 발이 널판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 정강이뼈가 뚝 하고 부러질지도 몰랐고, 까딱 잘못하다가는, 만약 재수가 없어서 발이 쑥 빠져버리는 날에는 10미터 아래 강물 속으로 추락할 수도 있었다. 어리고 자신감이 넘쳤던 우리는 물론 한 번도 미끄러지거나 빠지거나 비틀거려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리듬을 타면서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요령이었다. 그렇지만 말했듯이, 정작 중요한 점은 믿음, 나무 널판이 내가 발을 디디는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맹목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그리고 널판은 항상 그곳에 있었다. 

 

*(Agalma) 모든 인간이 생각하는 그 지점, 대책없던 시절. 

 

 

 

「머킨」

p 187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진행성 양쪽 귀 난청으로, 그 말은 태어날 때는 아무 이상이 없거나 한쪽 귀에만 문제가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양쪽 귀가 다 안 들리게 된다는 의미다. 어찌 보면 그 때문에, 애초 태어날 때부터 귀가 다 안 들리던 아이들, 자기들의 청력이 언젠가 회복될지도 모른다는 덧없는 희망을 품어본 적이 없는 아이들보다 가르치기가 더 힘겹다. 그러나 이런 모습, 자기들이 읽는 단어 하나하나를 또렷하지 않은 발음으로나마 입 밖으로 내어보려고 무던히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는 이 아이들을 견디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진다.

 

p198

  "안돼." 나는 그 아이들에게 말한다. "선생님은 그 녀석이 그걸 좋아한다고 생각해. 그 녀석에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러면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소를 짓지만 나 역시 그 아이들이 호세의 모습을 보는 게 차마 괴롭다는 것을, 자기들 가운데 최고의 시인이 다른 사람들의 귀에 시를 들려줄 수 없는 유일한 시인이라는 사실이 아이들 마음에 낙담을 안긴다는 것을 안다.

 

*(Agalma) 말을 할 수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해도, 말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젠 못하게 되었어도 소통은 늘 힘든 일이다. 많은 말이 없이도 따뜻한 소설. 사실 온통 말을 글로 바꿨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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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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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보 속 리듬을 듣듯이 따라가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시냇가의 디딤돌을 건너듯  단상을 거치는 소설이 있고,  돌이 쌓여 성벽이 만들어지는 걸 목격하는 소설도 있다. 백과사전은 소설이 될 수 없지만 소설은 백과사전이 될 수 있다. 이 말의 핵심은 제대로 된 백과사전 같은 소설쓰기란 백과사전이 소설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 백과사전이 소설보다 재밌는 사람에겐 다 난센스 같은 말이다.  더욱 절망적인  술주정,  동냥짓,  나쁜 습관이 몸에 밴 소매치기 같은 소설들에 대해서는 차라리 눈을 감는다.

 

그런가 하면 거울을 보듯 문장을 보는 독자가 있고, 총구를 마주한 듯 느끼는 독자도 있으며, 잃어버린 일기장을 대하듯 하는 독자, 책을 집 삼아 파묻혀사는 중독자도 있다.

 

독자라 할 수 없는 부류도 있다. 독자로 가장하고 정복엔 필연적으로 약탈이 뒤따른다고 행하는 도둑, 독서를 비타민이나 음료수 정도의 소비재로 여기는 상인,  자신의 내·외적 가난함을 가리기에 적합한 저렴한 값의 악세사리로 책을 필요로 하는 속물, 생경한 이국요리나 해외여행처럼 기대심리로 다가가는 관광객, 꿈같은 소리라며 외면으로 대결하는 외골수, 장르국한주의자, 문학사절주의자 등이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걸 겪고난 뒤에야 우리는 어른 독자가 되는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소설의 독자란 사랑에 빠지는 존재다. 몇 시간 혹은 평생. 소설의 효용이나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 숲속에 도착한 이후처럼 그저 읽을 뿐.

 

다소 장황한 이 이야기를 왜 했나면, 이 소설이 이런 이야기를 하게끔 만드는 백과사전 같은 소설이라서다.

 

 

 

 

 ㅡ Agalma

 

 

 

 


 

 

 

 

p 104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토마스와 사비나가 중절모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료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게 마련이다.

  내가 사비나와 프란츠 사이의 모든 오솔길을 되짚어본다면, 그들이 작성한 몰이해의 목록은 두터운 사전이 될 것이다. 우리는 조그만 어휘록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p10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그것이 지닌 순간성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심판도 내릴 수 없었다. 순간적인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지는 해를 받아 오렌짓빛으로 변한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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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6-09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강렬하네요. 책에 담긴 작가의 사유만큼..^^

AgalmA 2015-06-09 16:25   좋아요 0 | URL
님 덕분에 조금 고쳤어요. 고마워요ㅜㅜ 종종 체크하는데 오늘도 영락없이....
위의 생각과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는데, 문제는 엉성한 문장들.... 🐧
언제나 지금의 한계를 느껴요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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