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460
이제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의 시적 구동이 중첩될 것이란 건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글쓰는 자의 굴레이자 숙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중첩의 괘(卦)를 만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나는 기쁘지 않고 슬픈 것일까.

 

 

 

「기린이 그린」

기린이 그린 그림은 기림이 그린 그림

구름이 그린 기린은 구름이 그린 기린

 

그린 속의 기린은 구름이 될 수 있다

그림 속의 구름은 기린이 될 수 있다

 

 

「나무의 나무」

나무의 나무는 곧고 나무의 나무는 휘어진다

나무의 나무는 어둡고 나무의 나무는 혼자다

 

 

「분실된 기록」

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지운다.

지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다시 쓴다.

 

 

「거실의 모든 것」

 … 웃음이 있고. 울음이 있고. 음악이 있고. 침묵이 있고. 그림자가 있고. 고양이가 있고. 개가 있고. 새가 있고.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이제는 없는 네가 있고. 이제는 없는 오늘의 네가 있고. 거실에는 어떤 모든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모든 것 안의 어떤 것. 모든 것 안의 모든 것. 어떤 것 안의 어떤 것. 어떤 것 안의 모든 것. 거실에는 어떤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거실에는 모든 것이 있다. 있다. 있다. 있다.

 

 

 

#

이 무수한 교체와 해체 속에서 쾌감을 느낀다면, 당신은 매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방식은 매초마다 우리 머릿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고 나또한 충분히, 모든 것을 생각한 사람도 아니다.

어쨌든 시인의 뜻이므로 이렇게 시를 구동하는 것에 동의는 한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문장도 의미도 아닌 음절, 음소로까지 나뉘어져 급기야 음(리듬)만 남는다. 오로지 시인의 숨결만이 남는 셈이다. 그것은 시인의 선명한 의지였을 것이다.

시가 어떤 정언(定言)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이 무수한 리듬들이 그저 떠돌기만 하고(시인의 뜻이 그렇더라도) 어떤 음악으로도 완성되지 못했다는 점은 매우 유감이다. 이것은 인간인 내 욕심이다.

시 속의 보이지 않는 무수한 빗금들과 재들을 보며, 나는 그 在들이 이미 죽어있는 것들이라는 게 너무 안타까웠고, 그 무수하고도 협소한 일상적 재들을 후 불어버리고 독자적인 재들을 가져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비통하게 생각했다. 그 형식을 완성시켜 줄 재들을. 그리고 소용돌이쳐 날아올라 정말 무한으로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것은 불가능한 욕심이고 요구일까.

 

비트겐슈타인의 "이른 바 논리적인 명제들은 언어의 논리적 속성들을 보여주며, 따라서 우주의 논리적 속성들을 보여주지만,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말을 떠올려보며, 이준규 시인의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네모』시집과 이 시집을 비교해보고도 싶지만 능력되는 평론가에게 일임한다.

 

ㅡAgalma 

 

 

내가 당신에게 화답할 시는 바로 당신의 시입니다. 당신의 기다림들을 재로 만들지 말아요.

 

 

 

 

 

 

 

「초다면체의 시간」

 

 

 

  그것은 이제 막 시작되었거나 이제 막 끝났는지도 모른다. 이제 막 가슴에 매단 작고 빛나는 훈장 혹은 누군가의 마지막 유품처럼. 언젠가 너는 내게 편지했다. 겨울에는 나에게로 여행 오세요. 이를테면 이런 여행. 황혼이 내리기 시작하는 사막 위를 낡은 캐딜락을 타고 홀로 달려가는. 지평 저 너머로 희미한 모래 먼지가 되어 사라져가는. 사막에는 사막밖에 없지. 나에게는 나 자신밖에 없듯이. 내 성질에 맞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 미치도록 살고 싶어 하고, 미치도록 말하고 싶어 하고, 미치도록 구원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갈망하고, 시시한 일을 떠벌리거나 말하지 않고, 로마 신화에 나올 법한 황금빛 양초처럼 타오르고, 타오르고, 타오르고, 타오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길 위에 나란히 서서 잭 케루악을 읽었지. 너는 아주 어릴 적부터 기타리스트가 되기를 은밀히 소망해왔다. 하지만 기타리스트가 되기엔 네 손가락은 너무 작고 어두웠다. 너는 남몰래 탁자 밑에서 강박적으로 손가락을 늘리곤 했었지. 너는 불운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다만 조금 자주 울적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끝없이 이어진 들판 위에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춤을 추는 야윈 몸의 요기가 됐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우리의 팔과 다리가 부드럽게 휘저어놓은 공기의 입자를 느낀다. 어제저녁 나는 팔차원 초다면체를 아홉 개나 찾아냈어요. 그것들은 속이 빈 채로 서로 맞물려 있었죠. 나는 콕세터라는 이름 하나를 떠올린다. 우리들은 마치 만화경 속의 풍경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운 대칭을 이루며, 무한히 흔들린다. 달린다. 날아오른다. 내 머릿속을 떠도는 마이너의 피아노 음계. 유리잔 바닥을 떠도는 녹차 찌꺼기. 내겐 언제나 사소한 것에 쉽게 감동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우리는 한배에서 태어난 두 개의 머리 같구나. 그리고. 그러나. 어느 날 무언가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순간. 우리들 중 누군가가 입을 다문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는 모두 죽어 있었다. 빛이 사라진다. 어떤 빛이. 어떤 빛이 어둠 곁으로. 어둠 뒤로. 사라진다. 나 혹은 너는 검은 색 혹은 흰색이 된다. 나는 기다릴 수 없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떠올렸다. 망설여서는 안 되는 것을 망설였던 시간을 떠올렸다. 나는 너에게 여행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나.

 

 

* 잭 케루악, 『길 위에서』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도스토옙스키의 증기기차 같은 문장을 재밌게 읽다가 갑자기 뭔가 두고온 물건이 생각난 듯이 시큰둥해졌다. 책을 덮고 다른 이동수단을 생각했다. 영화라는 수상스키도 생각해봤지만 아무래도 따뜻한 난로 앞에서 웅크려 있어도 되는 책이 더 낫지, 했다. 10초도 안 걸려 정반대의 문(文)을 열고 프루스트를 탔다. 그런데 책장 너머 발터 벤야민이 자꾸만 지나갔다. 내가 프루스트를 읽고 있는지 발터 벤야민을 읽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아니, 내가 발터 벤야민을 원했던 건가, 의심했지만 단순한 내 착각만은 아니었다.

  페터 손디는 프루스트는 시간으로부터의 도피며 벤야민은 시간으로부터의 과거 탈환이라고 너무 매정하게 말했지만, 내가 흥미로운 건 그들이 어린이 시점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묘사하는 방식의 유사성이다. 그리고 그 문체들은 언제나 나를 미소짓게 만든다.

 

 

 

 

 

  § 지극히 주관적인 Aglama 비교 - 침대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 1

 

  나는 베개의 예쁜 볼, 토실토실하고 싱싱한 우리들 어린 시절의 볼과 같은 그 볼에 나의 볼을 살짝 댄다. … (중략) … 이러한 방에서, 내가 눈을 치뜨고, 근심스레 귀를 기울이고,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심장을 두근거리면서 침상에 누워 있는 동안, 나의 사념은 정확하게 방 그대로의 꼴이 되어, 그 거대한 깔대기 모양의 천장 꼭대기까지 가득 채우려고 여러 시간 동안 흩어지기도 하고, 위로 늘어나기도 하면서 몇몇 밤을 잠 못 이루어 괴로워하던 끝에, 드디어 습관이 커튼의 빛깔을 변경시키고, 괘종을 침묵시키고, 본체만체하는 인정머리 없는 거울에 연민의 정을 가르치고, 쇠풀 냄새를 깨끗이 쫓아 내진 못했을망정 그다지 코를 찌르지 않게 하고, 눈에 거슬리는 천장의 높이를 현저하게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습관! 능란한 솜씨지만 매우 느릿느릿한 이 지배인은, 우선 우리의 정신을 몇 주일 동안 임시 배치 속에 가두어 두는 것으로 시작한다.… (중략) … 몸을 마지막으로 뒤치고, 확실성을 주관하는 천사가 모든 것을 나의 주위에 정착시켜, 나를 나의 방안, 이불 밑에 누이고, 서랍 달린 옷장, 책상, 벽난로, 거리로 난 창문, 두 개의 방문 따위를 어둠 속에서 대략 제자리에 놓았던 것이다.

 

 

  발터 벤야민『베를린의 어린시절』 

 

「열」

 

  체온을 재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완전히 나 혼자 있는 것을 너무 좋아했는데, 베개를 갖고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덕과 산이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시기에 나는 베개로 만든 산등성이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그 산등성이들로부터 생겨 나오는 힘과 결탁했다. 그리하여 종종 그러한 산면 한가운데 동굴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것처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머리 위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뻥 뚫린 저 어두운 심연에 귀를 가져다 댄 다음 안의 침묵에 대고 종종 뭔가 말을 하면 그것이 이야기가 되어 되돌아 나왔다. 가끔은 손가락을 온갖 모양으로 뒤섞어 연극의 한 장면을 연기해 보기도 했다. 또 손가락을 전부 합쳐 '백화점'을 세우기도 했다. 중지 두 개로 만든 '카운터' 뒤쪽에서는 두 개의 새끼 손가락이 손님에게-즉 나에게-열심히 대꾸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더 그러한 즐거움도 줄어들고, 그와 함께 손가락들의 연기를 감독할 힘도 약해져갔다. 결국 나는 호기심도 없이 손가락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을 뿐이었는데, 그것들은 불이 집어삼키고 있는 도시의 주변 지역을 어슬렁거리는 게으르고 수상쩍은 불량배들을 흉내내고 있었다.

 

 

 

 

 

  § 지극히 주관적인 Aglama 비교 - 어머니가 있는 마법의 나라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 1

 

  프랑수아즈로 말하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고도 쓸데없는 구별을 바탕삼은, 오만하고도 풍성한, 세밀하고도 강경한 법전을 소유하고 있었다(그 때문에, 이 법전은 영아 학살이라는 잔인한 법규와 나란히, 염소 새끼를 그 어미 젖 속에 넣고 끓이거나, 동물의 넓적다리 힘줄을 먹는 일을 지나친 동정심으로 금하는 고대 법전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우리가 내린 어떤 분부를 막무가내로 하지 않겠다고 프랑수아즈가 갑자기 고집부리는 것으로 미루어 판단해 보건대, 이 법전은 프랑수아즈의 주위 사람들이나 마을의 하녀살이 중의 어떠한 것도 그녀에게 암시해 줄 수 없었던 사회적인 복잡성과 사교계의 세련성을 미리 알고서 꾸며진 듯싶었다. 따라서 누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곡해하기 쉽고도 우아한 아주 오래된 프랑스의 과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옛날 궁정 생활이 영위되던 흔적이 남아 있는 오래 된 저택을 이웃해서 화약 제조소가 있고, 테오필 성자의 기적 또는 네 아들 에몽을 나타낸 정묘한 조각의 주위에서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지대 안에, 그러한 옛 프랑스의 과거가 있듯이. 이 법전의 조문에 의하면, 프랑수아즈가 나 같은 하찮은 인물을 위하여 스완 씨 면전에서 엄마를 방해하러 간다는 건 화재가 난 경우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서는 거의 있을 수가 없는 일…(중략)…프랑수아즈는 5분 남짓 봉투를 물끄러미 보았다. 마치 용지의 조사와 서체가, 곧 내용의 성질을 알려 주고, 법전의 몇 조에 비추어 봐야 하는가를 그녀에게 가르쳐 주기라도 하듯이. 그러고 나서 프랑수아즈는, '이러한 자식을 둔 부모는 얼마나 불행할까!'라고 말하는 듯한 단념하는 모양으로 나가 버렸다.

 

 #

ㅎㅎ... 자기 전에 어머니의 입맞춤을 어떻게든 받기 위해 쪽지를 전하려는데, 하녀 프랑수아즈 마음 속에 있는 오래된 프랑스 마을과 법전을 통과해야 하는 시련이라니ㅎㅎ.

 

 

  발터 벤야민『베를린의 어린시절』 

 

「반짇고리」

 

  우리는 '잠자는 미녀'를 찔러 백 년 동안 잠에 빠지게 했다는 물레 가락이 어떠한 것인지는 더이상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백설 공주의 어머니인 왕비가 눈이 내리는 날이면 창가에 앉아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머니도 바느질감을 갖고 창가에 앉아 계시곤 했다.

 

 

 

 

   

   § 지극히 주관적인 Aglama 비교 - 아침 풍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 1

 

  그것은 시골 방이었다 … (중략) … 그 냄새는 과수원에서 찬장으로 옮겨진 그해의 모든 맛있는 젤리, 잘 익은 맛있는 젤리다. 철따라 변하지만, 세간과 하녀처럼 그 집의 특유한 냄새, 따끈한 빵의 보드라움으로 서리의 짜릿함을 조절하는 냄새, 마을의 큰 시계처럼 한가로우나 시각을 어기지 않는 꼼꼼한 냄새, 빈둥거리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질서 있는 냄새, 돈담무심하면서도 선견지명이 있는 냄새, 세탁물의 냄새, 아침 일찍 일어나는 냄새, 신앙심의 냄새, 평안을 즐기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은 불안의 증가밖에 가져다 주지 못하는 평안을 즐기는 냄새, 그리고 거기서 살지 않고 그대로 지나치는 이의 눈에는 詩의 큰 저수지 같아 보이나 실은 산문적인 것밖에 즐기지 못하는 냄새. 그러한 고모의 방 공기는 매우 영양이 되는, 자양분이 많은 침묵의 미묘한 구수한 냄새로 포화되어 있어서, 나는 항상 일종의 왕성한 식욕과 더불어 그곳으로 가곤 하였는데, 부활제 전 주일의 아직 쌀쌀한 이른 아침에는 더욱 그러했다.

 

 

 

  발터 벤야민『베를린의 어린시절』 

 

 「겨울날 아침」

  난로에 불이 지펴졌다. 이내 불꽃은 마치 석탄으로 가득해 옴짝달싹할 수 없는 너무나도 작은 서랍에 갇혀 있는 듯한 모습으로 내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면 검게 그을린 따뜻한 과일, 막 여행에서 돌아온 가까운 지인처럼 여전히 친숙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변해버린 과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난로의 열이라는 어두운 나라를 순회하는 여행으로, 그로부터 사과는 이날 하루가 나를 위해 준비해준 모든 것의 향기를 뽑아냈다.

 

 

 

 

 

 

 

 

 

 

 

 

 

 

 

 

 

 

 

 

 

[발터 벤야민에 대해 ㅡ 지나간 것으로부터 희망의 불꽃] - 페터 손디

 

프루스트는 시간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치기 위해 과거를 찾아 나선다. 그러한 노력은 오직 과거가 현재와 일치해야만 실현될 수 있는데, 유사한 경험들만이 그것을 가져올 수 있다. 그것의 진정한 목표는 온갖 위험과 위협으로 가득 찬 미래-그것의 궁극적 위험은 죽음이다-로부터의 도피이다. 이와 반대로 벤야민이 과거에서 되찾으려고 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미래이다. 그의 기억이 되찾으려고 하는 거의 모든 장소는 「베를린의 어린 시절」의 한 곳(「수달」)에서 표현하고 있는 대로 "앞으로 다가올 것의 흔적들"을 담고 있다. 따라서 그의 기억이 어린 시절의 사람들을 "미래를 예언하는 소명을 다하고 있는 모습"(「두 개의 수수께끼」)으로 바라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프루스트는 과거의 메아리를 주의 깊게 듣는다. 벤야민은 어느새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의 첫 음을 듣는다. 프루스트와 달리 벤야민은 시간성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이 없다. 그는 사물들을 탈역사적인 정수精髓 속에서 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대신 그는 역사적 경험과 불현듯 찾아오는 깨달음을 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거, 하지만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과거로, 그리고 미래를 약속하는 과거로 되돌려 보내진다. 벤야민의 시제는 완료형이 아니라 온갖 역설로 가득 차 있는 미래완료형인 것이다. 미래인 동시에 과거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안과 겉>은 20대 초반였던 까뮈(1935~1936)의 첫 출판물이자 그의 평생의 지표들이 묘비명처럼 여기저기 박혀 있다. 그가 이 책의 재판을 왜 그토록 완강히 거부하려 했는지 이해가 됐다. 그가 표현하고 싶은 본질들이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한낮의 태양빛 속에서가 아니라 심연의 저녁 그늘 속에 일렁이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고액으로 거래되는 초판을 보고 독자들을 위해 개정판에 동의했다고.

개정판에 이처럼 확고한 [서문]을 달아놓은 것은 일종의 (할喝) 장치였으리라. 독자의 동조심리를 막고, 빛 속에 서 있을 때처럼 이 책을 보라는. 그래서 이 책의 [서문]은 매일 자기 전에 읽는다면 그 날의 삶이 정리될 것 같다. 천국과 고독을 하나로 묶는 그 의지와 열정을 생각하며 말이다.

 

 

 

[서문]
p25  극장의 객석......사회가 갈라놓은 사람들을 고독이 서로 결합시켜주는 것이다.

 

 

[아이러니]

p38  젊은이는, 그가 여태껏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참담한 불행ㅡ영화관에 가기 위하여 버려두어야 하는 늙은 불구 여인의 불행ㅡ앞에 놓인 자기의 처지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자리를 떠 빠져나가고 싶어서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며 손을 뽑으려고 했다. 한순간 그에게는 노파에 대한 잔인한 증오심이 일어나 그녀의 뺨을 힘껏 갈겨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긍정과 부정의 사이]

p54  가난 속에는 어떤 고독이 있다.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고독이다. 어느 정도 부유해지면 하늘도, 별이 가득 찬 밤도 예사로운 자연의 재화로 여겨지게 된다. 그러나 하류 계층에선 하늘이 본래의 모든 의의를 되찾아 가지게 된다. 즉 그것은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인 것이다.

 

p63  "따지고 보면 그편이 차라리 나았지. 소경 아니면 미친 사람이 되어 돌아왔을 테니. 그랬더라면 그 가엾은 사람은……." "하긴 그렇군요." 사실 이 방안에 그를 붙잡아두는 것은 언제나 차라리 그편이 낫다는 확신, 세계의 모든 '부조리한' 단순성이 이 방안에 깃들여 있다는 느낌이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영혼 속의 죽음]

p74  방문이 반쯤 열려 있어서 푸른 칠을 한 커다란 벽만이 보였다. 앞서 말한 침침한 광선이 그 스크린 위에다 침대에 누워 있는 죽은 사람의 그림자와 시체 앞에 보초를 서고 있는 경관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었다. 두 그림자는 직각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그 빛이 내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그 빛이야말로 진실한 빛, 삶의 진정한 빛, 기울어가는 삶의 진정한 빛,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빛이었다. 그는 죽어 있었다.

 

 

[삶에의 사랑]

p87~89  카페며 신문이 없다면 여행한다는 일이 무척 어려울 것이다. 우리말로 인쇄된 신문 한 장, 저녁 때 우리가 사람들과 팔꿈치를 부딪쳐보기를 원하는 곳, 그런 것들 덕분에 우리는 제 고장에서 자기였던ㅡ 그러나 먼 곳에 갖다 놓으면 그렇게도 낯설어 보이는ㅡ 그 사람의 낯익은 몸짓을 흉내낼 수 있는 것이다. 여행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던 일종의 내면적 무대장치를 부숴버리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속임수를 써볼 수가 없다 ㅡ 사무실과 작업장에서 일하며 보내는 시간들 뒤에 숨어서 가면을 쓰고 지내는 짓은 더이상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들에 대해 우리는 그토록 심하게 불평을 해대지만, 실은 고독의 괴로움으로부터 그토록 확실하게 우리를 방어해주는 것도 그러한 시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늘 주인공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소설들을 쓰고 싶은 것이다. "내가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아내가 죽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일까지 꾸며야 할 한 무더기의 발송 서류가 잔뜩 남아 있다." 여행은 이 피난처를 우리에게서 빼앗아가고 만 것이다. 우리의 가족 친지와 우리의 언어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우리에게 의지가 되는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우리의 가면도 벗겨져버린 채 (전차의 요금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다 그런 식이다) 우리는 완전히 우리 자신의 표면 위로 노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우리 자신의 영혼이 앓고 있음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 하나하나에다가 그 기적적인 가치를 회복시켜주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춤추는 여자, 커튼 뒤로 보이는 테이블 위의 술병ㅡ이미지 하나하나가 제각기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의 인생이 거기에 요약되는 만큼 삶은 거기에 송두리째 반영되는 것같이 생각된다. 자연이 내려준 이 모든 산물에 민감해진 나머지 우리가 맛볼 수 있는(명철의 도취감에 이르기까지) 모순된 도취감들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 것인가. 아마 지중해를 제외하고는 여태껏 어느 나라도 나를 이렇게까지 나 스스로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고, 동시에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근시켜준 일은 없을 것이다.

 

p91  나는 왜 그때 내가 도리아식으로 새겨진 아폴론의 시선 없는 눈, 또는 지오토가 그린 불타는 듯 응결된 인물들을 생각했는지를 알고 있다. (그리스 조각의 퇴폐와 이탈리아 예술의 해체가 시작된 것은 미소와 시선이 미술 속에 나타나면서부터였다. 마치 정신이 시작하는 곳에서 아름다움은 끝난다는 듯이.) 그러한 순간에 나는 그러한 나라들이 나에게 갖다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참으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중해 연안에서 사람들이 삶의 확신과 규범을 찾아내고 또한 이성을 만족시키며 낙관주의와 사회적 감각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요컨대, 그 당시 내게 강한 인상을 준 것은 인간의 척도에 맞추어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버리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아니다. 이 고장들의 언어가 내 속에서 깊이 울리는 그 무엇과 일치되었던 것은, 그것이 나의 질문들에 대답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언어가 나의 질문들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내 입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의 행위들이 아니라 태양에 짓눌린 풍경 앞에서가 아니고는 탄생할 수 없는 그 'NADA(허무)'였던 것이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안과 겉]

p99~100  1월의 어느 날 오후가 이렇게 나를 세계의 이면과 대면시켜준다. 그러나 싸늘한 기운이 대기 속에 남아 있다. 도처에 덮여 있는 태양의 얇은 막은 손톱 끝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곧 터져버릴 것만 같지만 그래도 그것이 만물을 영원한 미소로 감싸주고 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나뭇잎들과 햇빛의 희롱 속으로 들어가는 일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내 담배가 타서 빨려들어가고 있는 이 광선이 되어버리고 공기 속에 감도는 이 다사로운 맛과 이 은은한 정열이 되어버리는 일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만일 내가 나 자신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광선 속에서다. 그리고 세계의 비밀을 전해주는 이 미묘한 맛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맛보려고 애를 쓴다면 그때 우주 저 깊숙한 곳에서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일 것이다. 나 자신, 다시 말해서 나를 무대장치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이 극도의 감동 말이다. 

  아까는 인간들과 그들이 사들이는 무덤 같은, 다른 것들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가 시간이라는 옷감에서 이 한순간을 오려내는 것을 허락해주기 바란다. 다른 사람들은 책갈피 속에 한송이 꽃을 접어 넣어 사랑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던 어느 산책의 기억을 그 속에 간직한다. 나도 산보를 한다. 그러나 나를 어루만져주는 것은 하나의 神이다.

 

p101  한 사람은 관조하고 또 한 사람은 자기의 무덤을 판다. 어떻게 그들을 서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들과 그들의 부조리를 어떻게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여름] 수수께끼

내가 관심을 가졌고 그것에 관하여 글을 쓰기도 했던 경험 속에서 부조리는, 설령 그 기억과 감동이 그 후의 내 사고방식에 따라다닌다 할지라도, 하나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다시 지적해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든 차이점은 신중히 고려해서 생각해야겠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방법론적인 것인 데카르트의 회의가 데카르트를 회의론자로 만들어놓기에 충분하지는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아무것도 의미 있는 것은 없다든가 만사에 절망해야 한다는 사상에만 어떻게 머물러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절대적인 유물론이란, 그냥 그 말을 성립시키고자만 해도 이 세상에는 물질 이상의 그 무엇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는 만큼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전적인 허무주의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사물의 밑창에까지 파고들어가 생각해보지 않고도 알 만한 일이다.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순간에 의미 있는 그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 세계에 대하여 일체의 의미를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모든 가치 판단을 말살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산다는 것, 예컨대 영양을 섭취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 판단이다. 스스로가 죽어가도록 방치하지 않는 그 순간부터 그는 계속해서 사는 쪽을 선택한 것이고, 그리하여 삶의 어떤 가치를, 적어도 상대적인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절망의 문학이란 결국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는가? 절망은 말이 없는 법. 게다가 침묵조차도, 두 눈이 말을 하고 있다면, 어떤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절망은 죽을 때의 고통, 무덤, 혹은 심연이다. 절망이 말을 하고 따지고 특히 글까지 쓰게 되면 즉시 형제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나무는 정당성을 획득하고 사랑은 태어난다. 절망한 문학이란 말 자체가 이미 모순이다.

……(중략)……우리의 허무주의 중에서 가장 암담한 것과 만났을 때도 나는 그 허무주의를 극복할 이유들만을 모색했다. 그것도 무슨 미덕의 소유자라서거나 보기 드문 영혼의 숭고함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그 속에서 태어났고 수천 년 전부터 그 속에서 인간들이 고통 속에서조차 삶을 찬양하도록 배워온 그 빛에 대한 본능적 충실성 때문에 그건 그랬던 것이다. 아이스킬로스는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 많다. 그러면서도 그는 빛을 발하고 다시금 우리를 따뜻하게 해준다. 그의 세계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메마른 무의미가 아니라 수수께끼, 다시 말해서 눈이 부셔서 제대로 판독하지 못하는 어떤 의미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깡마른 세기에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희랍의 못났지만 악착스럽게 충실한 아들들에게는 우리 역사의 화상(火傷)이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것을 견디어내게 된다. 비록 어두운 것일지라도 우리가 성취하는 과업의 한가운데에는 오늘 들과 산들에 걸쳐 절규하는 그것과 똑같은 어떤 굴복할 줄 모르는 태양이 빛나고 있다.

 

 

 

§§

지극히 이성적이고도 인간적인 까뮈의 생각들 ... 어떻게 보면 불교사상과 상치되어 보이다가도 어느 맥락은 맞닿아도 보이는 ... 까뮈가 우파니샤드를 탐독했었다는 일화와도 연관이 있을까, 스승이었던 장 그르니에도 불교 사상에 심취해 있었으니 이러저러 그럴지도 ......어쨌거나 깨달음도 인간으로서의 방식이라고 할 때....존재함 그 자체가 굴복일 수가 없는 것. 그러므로 인간은 최초이자 최후까지 태양과 대지를 생각하는 존재.

 

ㅡ Agalm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봉건 시전집
전봉건 지음, 남진우 엮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해설자 남진우 시인은, 50년대 모더니즘 시문학에서 김수영, 김춘수, 김종삼, 전봉건의 사각형 구도가 완성형이라고 본다. 당시 서정주나 청록파 같은 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이은 시 노선과는 확연히 차별적인 시인들이란 것이다. 60년 대 중반 이후 문학계에서 50년 대 모더니즘 시에 대한 비판이 가해졌는데, 무분별한 서구 추종과 난해한 현실도피성 무국적성 등이 그 지적이었다(지금 미래파에 가해지는 비판과 시류와 비슷한 것이 흥미롭다). 이 비판의 폭풍 속에 굳건히 살아남은 시인들이 이들 네 사람이라고 남진우 시인은 전한다.

이들 네 사람도 여러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의미/무의미의 지향점에서 보면 김수영 전봉건 대 김춘수 김종삼이 될 것이고, 그 속에서 김수영과 전봉건은 "남성적 호흡의 스케일", 김춘수와 김종삼은 "섬약성과 내면성이 돋보이는 여성주의적 시"풍으로 대조된다. 김수영과 전봉건 두 시인의 의미 지향점도 뚜렷한 대비를 이루는데, "김수영이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현실과 대결을 통해 의미를 추출해내려 했다면, 전봉건은 심미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를 현실에 부과하고자 하는 태도를 취했다."  

네 시인의 시 접근 태도로 나눠보면, 김종삼과 전봉건의 시쓰기는 "자연적 생리적 성격"이라면 김수영과 김춘수의 시쓰기는 "자각적이며 인공적"이다. 그 속에서 김종삼과 전봉건은 "서정적이고 낭만적" 특성을 지닌다면 김수영과 김춘수는 "이념적이며 산문"지향적이다(김수영과 김춘수의 시론들을 생각해보라). 김종삼과 전봉건의 낭만적 성향은 이북 출신으로 실향의 정서가 깊이 배어 이곳 유배지가 아닌 초월적 세계를 꿈꿀 수 밖에 없는 숙명성에 기인한다.

남진우 시인은 네 시인의 시적 근원을 이렇게 말한다. "김수영은 현실에 대한 가열한 비판의식", 김춘수는 존재에 대한 탐구", "김종삼은 보헤미아니즘으로 집약되는 방황과 소외의식", "전봉건은 감각적 리리시즘". 전봉건의 시는 "재래의 감정적 주정적 서정시"과 구분되는 "이미지의 선명성과 상상력의 역동성"을 보여 준다. 

 

네 시인 가운데 전봉건 시를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이 아쉬운만큼 그 놀라움도 크다. 김춘수 「처용단장」(外 김구용 「구곡」, 송욱 「하여지향」, 성찬경 「화형둔주곡」)과 비견될만한  전봉건 長詩「춘향연가」,「속의 바다」도 흥미롭다. 수석애호가이기도 했던 전봉건은 많은 양의「돌」연작시도 발표했는데, 프란시스 퐁주 사물시의 한국판이라고 봐야 할까 싶다. 그리고 「6·25」연작시를 비롯해 戰場詩들은  한국의 서정성과 전쟁의 실존적 참상이 빼어나게 기록된 기념비적인 시편들이다.

 

 

ㅡAgalma

 

 

 

 


 

 

 

 

 

옥수수 환상가

 

   1

 

옥수수의 잎사귀가 날린다.

다산형 공주님을 지키는 늙은 무사의 큰 칼날이다.

 

   2

 

나는 여러 가지의 마음을 가졌다.

한 대의 옥수수가 그 많은

씨앗을 가졌듯이.

 

   3

 

옥수수가 익자

길은 바다로 트이고

그 위에 낙인처럼

찍힌 그림자.

포플러나무의 진한 그림자에

넘쳐나는 푸름.

나는 거기서도

샘물 소리를 보았다.

 

   4

 

내가 먹은 옥수수도

번갯불과 장마와 아침 달이 만들었다.

돌 부스러기, 벌레, 대낮의 해가 만들었다.

썩은 개 뼈다귀와 저녁 별,

그리고 모든 종류의 바람이 그랬다.

한량없는 꿈과 어둠을 먹고 살찌는

한량없는 욕정의 흙이 만들었다.

내가 먹은 옥수수는.

 

   5

 

무엇을 줄까.

어느 것일까.

가장 성스러운 잔인함으로 하여

너의 미각을 꽃잎처럼 피어나게 하고

눈부시게 할 것이.

진주의 목걸이와

한 대의 옥수수와.

 

   6

 

한 사람의 여자 속에 들어 있는

한 사람의 남자.

한 사랑의 남자 속에 들어 있는 한 사람의

여자 속에 들어 있는 한 대의

옥수수.

 

   7

 

태양은 몇 개나 있어서

매일 아침 새것이 뜨는 것이었을까.

어떻든 옥수수 한 대의 옥수수 씨알마다

태양은 하나씩

빛나고 있었다.

 

   8

 

옥수수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밤길이었다.

한 사람의 여자가

한 사람의 남자에게

말했다.

    "비가 내렸으면

     자고 갈 건데……"

검은 밤길에 잠시

젖빛 같은 것이 번졌다.

 

    9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람 한점 없는 옥수수밭의

옥수수 알들일지도 모른다.

 

 

 

 

 

 

 

암흑을 지탱하는

 

 

  그날 총알에 가슴으로 피를 뿜는 친구를 어깨에 걸쳐메고 나는 부러진 총부리와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불타는 거리를 더듬어 가끔씩 생각난 듯 눈먼 유탄(流彈)이 와서 박히는 한 건물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깜깜한 문지방을 넘으니 발바닥에 마루인 듯한 널판자가 밟혔고 널판자는 숨죽인 신음 소리 같기도 하고 비명 소리 같기도 한 그런 소리를 냈다. 나는 어깨 위에서 꿈틀거린 그를 고쳐메고 소리나는 어둡고 긴 마루를 지나 마침내 방인 듯한 곳에 이르렀으나 그곳도 역시 어두워 안보이는 눈을 껌벅거리며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깜깜하던 어둠이 차차 엷어지면서 희뿌연 밝음 속에 하나둘 나타나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책 의자 대야 부엌비 그런 것들이었고 또 호미 변기 사진 이불장 옷장 경대 그런 것들이었다. 아 등신대 크기의 경대에 반쯤만 남아서 붙은 거울 거기 비친 내 몰골 피 흘리는 몸뚱이 하나 어깨 위에 짊어멘 내 몰골은 마치 망령과도 같았다. 발끝에 걸리는 것이 있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저고리 치마 속옷 그런 것들이 아무렇게나 널린 두툼한 이부자리였다. 나는 그 위에 조심스러이 몸을 구부려 어깨에 걸쳐멘 그를 내려뉘었다. 이미 임종이 가까운 그의 두 눈은 그저 크게 뜨여 힘없이 벌어져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흔적도 없었고 또 자취도 없었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이었던가. 텅 비어 있음에 다름아니던 그 두 눈에 빛이 고리고 바람도 이는 것이 아닌가. 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이 깃들이고 그 푸름도 깃들였다. 성좌(星座)가 아롱지는가 했더니 강물이 흘렀고 나뭇잎을 흔드는 숲이 들이차기도 했다. 훤하게 트인 길을 거느린 해안과 산맥이 굽이치기도 했다. 나는 그러한 그의 두 눈을 홀린 듯이 들여다보았다. 이제 그의 두 눈은 잔잔한 미소마저 띠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두 눈에 듬뿍 이슬 머금은 꽃덤불로 둘러싸인 샘물이 떠올라 넘칠 듯 넘칠 듯한 바로 그때였다. 그는 검붉은 피 엉겨 찌든 손가락을 들어 어슴푸레한 방 한구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옮겼다.

  거기엔 무엇이 있었던가.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항아리였다. 항아리 하나가 거기서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똑똑히 확인하기 위하여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다. 그런데 모를 일이었다. 내가 다시 눈떠 본 것은 항아리가 아니라 한 여자였다. 가느다란 모가지 고운 젖무덤 늘씬한 허리 풍만한 엉덩이 한 젊은 여자가 거기서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고 있었다. 풀어내는 스스로의 살빛으로 피냄새 절은 어슴프레한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이 모를 것은 넘칠 듯 넘칠 듯한 샘물을 둘러싸고 어우러진 꽃덤붗 듬뿍 이슬 머금은 꽃덤불의 짙은 꽃향기가 내 가슴팍에 젖어들고 아랫배에 젖어드는 일이었다. 이윽고 무지개처럼 광채 영롱한 성욕이 내 정수리를 눈부시게 꿰뚫은 그때였다. 나는 등뒤에서 날카롭게 뜨겁게 솟구치는 절규 한마디를 들었다. 그였다. 하지만 나는 그 한마디가 무슨 소리였는지 그것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그는 또 한번 절규를 하려는 듯이 급하게 숨을 몰아쉬면서 안간힘을 써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의 입은 잠시 뒤틀리고 일그러졌을 뿐 절규를 내뿜지는 못하였다. 총알에 뚫린 가슴의 상처가 울컥 검붉은 한줌 핏덩이를 쏟아냈을 뿐이었다.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나는 그 방을 나오면서 어슴푸레한 어둠의 한두석으로 다시 눈길을 옮겼다. 거기서는 항아리 하나가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내 귀는 다시 등뒤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이제 절규가 아니라 그지없이 평화스럽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무슨 말이었는지 나는 그것을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아무튼 그 목소리 그 한마디가 한 여자의 아름다운 이름에 다름아니었음은 분명했다.

 

 

  그뒤로부터 나는 확신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의 흙 우리의 땅덩어리가 아무리 처절한 죽음과 엄청난 피로써 얼룩진 암흑이라 할지라도 철 따라 과목을 꽃 피게 하고 열매도 맺게 하는 것은 그것이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는 항아리 또는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해서 지탱되어 있는 까닭이라는.

 

 

 

 

 

 

 

 

겨울에

 

 

 

찬 하늘

커피 한 잔

눈 눈 눈 눈 눈

구름이 흔들려서 날리던

김광섭의 눈

혹은 다시금 또 보이고

다시금 또 보이는…… 영(嶺) 기슭에

한 잎 또 한 잎 내려서 덮이던

김소월의 눈

또 혹은 북국 강녘에 밀수입 마차

지나는 소리 들릴 제 퍼붓던

김동환의 눈보라

이 문득 몰아치는 6·25의 눈보라

찬 하늘 닿은 첩첩 산등성이 퍼붓는 그 눈보라 속에 터지던 눈보라

새빨간 피보라 터지고 또 터지던 하얀 눈보라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찬 하늘 춤고 떨리고 춥고 떨려서

비발디 <사계>의 <겨울>에서 불붙은 화로 따끈한 제2악장만 따내고

박용래의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는 저녁 눈과

서정주의 괜, 찮, 타, …… 괜, 찮, 타, …… 그렇게 수부룩이 내리는 눈발도

그리고 춘향이 흰 무릎 같은 눈송이 몇 개

황진이 흰 허리 같은 함박눈도 몇 송이

그리고 불붙인 담배

니코틴이 적은 썬 한 개비

그리고 따끈한

커피 또 한 잔

 

 

 

 

 

 

 

 

봄에

 

 

 

구름 한점

햇살 한줌

진달래 몇 송이

(스스로 죽은 김소월)

잎새에 이는 바람 한 자락

(갇혀서 죽은 윤동주)

복사꽃 한 송이

(미쳐서 죽은 이중섭)

모란꽃도 한 송이

(눈먼 총알 맞아 죽은 김영랑)

저 6·25 한 달 전이던가 두 달 전이던가

삼팔선을 넘다가 총 맞고 낭떠러지 떨어져 죽은

한 소녀의 기억도 한 토막

꽃잎처럼 꽃잎처럼 날리면서

떨어져 죽은 그 소녀의 기억도 한 토막

그러고 보니 슬픈 피비린내 역겨워

<춘향가>에서 "긴 그네줄을 섬섬옥수로 이리저리 갈라쥐고 몸을 날려 올라 한 번 굴러 앞줄이 높고 두 번 굴러 뒷줄이 높아 점점 높아 공중에 소소쳐……"

그 한 가락 따내고

비발디의 <사계>에선 <봄>만 따내고

비닐하우스에서 나온 별로 맛없는

그러나 덩치 큰 딸기 몇 개

말라붙은 쥐포 두어 장

언제나 시린 속 훤히 들여다보이는

소주 한 병

 

 

 

 

 

 

 

봄 이제(二題)

 

 

보리밭

 

희멀건 것이 스친다

미끈하기도 하고

두루뭉실하기도 하다

검은 점, 두 개가 떠오르더니

햇방울로 흔들리다가 스러진다

바람이 움직인다

바람 아닌 것이 움직인다

바람 아닌 것이 움직이는 자리가

파란 불길이다.

 

 

안개

 

말하지 않는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지도 않는다

다만 적실 뿐이다

쇠줄에 매인 작은 배를 적실 뿐이다

작은 배에 실린 검은 어둠을 적실 뿐이다

부드럽게 촉촉이 적실 뿐이다

작은 배에 실린 검은 어둠에

한두 점 핏방울 같은 것이 돋는다

그것만은 적시어지지 않는다

바다도 하늘도 목베인 잿빛이다

 

 

 

 

 

 

 

돌 2

 

 

달밤엔

소문이 돌았다

 

제주도

통영

마산

부산

또는

원산의

바닷가

젖은 모래톱에

달밤이면 달빛 같은 색깔의

고운 돌 하나가 서서

달빛 같은 소리로 운다는

소문이 돌았다.

 

더러는

대구나

서울의

달빛 스며든 뒷골목에서

그 돌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중섭의 웃기만 하는 아이들 가운데

자지 달린 한 아이더라는 소문이었다.

 

 

 

 

 

 

 

6 · 25  13 

 

 

  동이 트는데

  햇살보다 먼저 총소리가 터지고 대포 소리가 터졌다 안방에서 터지고 건넌방에서 터지고 문간방에서 터졌다 마루방에서 터지고 사랑방에서 터지고 마구간에서 터졌다 때는 유월 이른 새벽 동이 트는데 햇살보다 먼저 수없이 많은 총소리가 터졌다 대포 소리가 터졌다 곳간에서 터지고 움 속에서 터지고 부엌에서 터지고 그리고 아궁이 속에서도 터졌다 그렇다 하늘에서 터지고 땅에서도 터졌다 햇살보다 먼저 터졌다

 

 

 

 

 

 

6 · 25   17

 

 

우리는

물동이를 버리고

가마솥을 버리고

논으로 가는 길도 버렸다

밭으로 가는 길도 버렸다

삽과 갈쿠리도 버렸다

닭을 버리고 돼지를 버리고 개도 버렸다

낫을 버리고 도리깨를 버리고 멍석을 버렸다

책과 책상과 연필과 지우개도 버렸다

비도 걸레도 버렸다

진달래가 우거졌던 언덕을 버리고

개나리가 들이찼던 골짜구니도 버렸다

우리는 버리고 또 버렸다

하나하나 우리는 죄다 버리고 그리고 떠났다

동트는 6월의 이른 아침에

이슬비 젖은 햇살이 퍼질 때에

우리는 다 버리고 떠났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마시던

또 내가 마시던

샘물도 버리고 떠났다

촉촉이 내린 이슬비 젖은

햇살이 퍼질 때에

우리는 우리를 버리고

떠났다

 

 

 

 

 

 

6 · 25   25

 

 

어머니는

솥뚜껑을 열어놓고

보리밥을 푸다가

죽어 있었다

 

 

누렁소는

가래를 멘 채

밭이랑을 베고

죽어 있었다

 

 

아버지는

밭머리에 앉아서

막걸리 바가지를

기울이다가 죽어 있었다

 

 

어린 동생은

제 머리통만한

개구리참외 반쯤이나 먹다가

죽어 있었다

 

 

모두

그렇게 죽어 있었다

죽음 밖의 죽음을

죽어 있었다

 

 

 

 

 

 

 

6 · 25   33

 

 

 

문이

열리면

드륵

 

 

새가

날아도

드르륵

 

 

우리는

총을 쏴갈겼다

 

 

지붕 위에서

햇살이 번쩍거리면

드르륵

 

 

여울물에서

달빛이 들썩거려도

드르르륵

 

 

길 아닌 데서

그리고 물론 길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나기만 하면

드륵 드르르륵

 

 

우리는

총을 쏴갈겼다

 

 

꽃덤불이

흔들려도

드르르르륵

 

 

우리는

총을 쏴갈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

이 소설의 실제모델 유나바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에게 지독하게 불행한 상황들을 강요한 다음 불행한 느낌을 제거하는 약들을 주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그런 일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 사실상 항우울제는 환자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회적 상황들을 견뎌 낼 수 있도록 내면의 상태를 조절하는 수단이다."

 

 

자신을 조정하고 조절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 속에서 우리는 과연 유령처럼 출현하는 존재이지 않을까. 상을 타고 업적을 보여주면서 또는 사건을 일으키고 자살을 하면서 잠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러한.

우리는 좀더 긍정, 좀더 부정의 추를 오락가락하며 시소를 타고 있을 뿐이다.

 

 

 

ㅡAgalm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