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갈 수 없기에(정말?) 매 순간 어딘가를 꿈꾼다. 그런 열망 속에 펼친 백민석 《아바나의 시민들짧은 여행의 단맛처럼 순식간에 끝났다. 책에 이런 표현이 있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보니 그가 절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절망에 대한 감각은 현장이 아니면 느끼기 어려운 찰나적 감각이다. 인간은 절망을 그리 오래 견디지 못한다. 인간은 잠시도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금세 자신을 속이기 시작한다. 절망은 쉽게 휘발된다.”(《아바나의 시민들》, p198)

 

 

 《아바나의 시민들

 

작가라서 더 그런 걸까백민석 사진은 황량한 소설 인상과 달리 의외로 다감한 시선으로 찍은 인물 사진이 많다. 특히 노인들. 저 문장은 그가 아바나에서 자주 본 자세라고 말하며 손으로 머리를 감싼 노인이 성당 계단에 앉아 있는 사진을 찍고 남긴 단상이다. 그러나 절망만 그럴까. 희망도 그렇지 않은가. 희망을 꿈꾸지만 우리가 하루 중에 그것을 꿈꾸는 건 찰나다. 우리는 많은 일상을 원하지 않은 것들로 채우면서 아직은 괜찮다고 자신을 타이른다. 속인다.

 

바보 같은 이유로 카메라를 여러 대 잃어 버리기도 하고 인터넷이 잘 안 되는 쿠바에서 와이파이가 되는 장소에서 자조하기도 하면서 정처없이 헤매는 백민석을 놔둔 채 나는 우디 앨런 카페 소사이어티영화섬에 다녀오기도 한다. 1930년대 뉴욕과 할리우드 풍경이 아련히 펼쳐진다. 송년 파티 장면에서 합리적 공산주의자 Leonard는 이렇게 말한다.

 

 

 

 

음미할 시간도 경험도 갖지 못한 인생이면 어쩌나. 카페 소사이어티 전형적인 할리우드 로맨스 영화 양식을 따른다. 성공을 꿈꾸며 할리우드로 온 바비(제시 아이젠버그)와 보니(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사랑에 빠진다. 보니는 불안정한 미래 때문에 바비의 청혼을 거절하고 자신을 버렸던 재력가인 그의 삼촌을 택한다. 뉴욕으로 돌아온 바비는 갱스터였던 형의 나이트클럽 카페 소사이어티영업에 재능을 발휘해 크게 성공한다. 바비와 보니는 여유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지만 서로가 함께 하는 사랑을 다시 누릴 수는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뤄지지 못한 사랑의 공허를 내내 음미할 것이다.

이 영화는 같은 해 개봉한 데미언 샤젤 《라라랜드와 흡사한데 두 영화의 판도가 판이하게 갈린 건 우리가 음미하고자 하는 게 달라진 걸 말하는 걸까, 데미언 샤젤이 우리가 음미하고픈 걸 더 정확히 짚어냈다고 봐야 하는 걸까. 두 영화 다 재즈 굿~ㅎ

삶의 많은 것에 대해 음미를 너무도 잘해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음미되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아바나의 시민들에도 등장한다.

 

소크라테스의 연인들은 그를 아토포스atopos’라고 불렀다. 아토포스라는 별명은 마르지 않는 사랑의 매력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알려준다. 장소를 의미하는 'topos'에 결여,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사 ‘a’가 붙어 어떤 장소에 고정될 수 없다, 더 나아가 정체를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의 아토포스가 된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아토포스로 인지한다.”(《아바나의 시민들》, p270)

 

영화 속 Leonard처럼 백민석도 이의 제기한다.

 

하지만 아토포스는 또한 사랑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불행의 언표일 수 있다. 사랑하는 이는 소크라테스처럼 아토포스가 될 수 없다. 그는 사랑하는 이라는 정체에 기꺼이 고착되어야 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잘 바라다보이는 장소에 정주해야 하며, 변덕을 부렸다간 사랑을 잃을 것이라고 매 순간 자신을 닦아세워야 한다. 이것이 오늘도 넋을 앗길 순간을 기대하며 아바나 비에하를 걷는 당신의 정체이자, 불행이다. 아바나만 한 다른 아토포스를 찾기 전까지 당신은 한국에 가서도 사랑의 이름으로 아바나에 붙들려 있을 것이다.”(《아바나의 시민들》, p271)

 

"죽은 자의 넋 앞에서 한 가지 감정만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만큼"(《아바나의 시민들》, p22) 세상을 살아도 우리는 어떤 장소, 아토포스에 대한 열망을 접을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이 고정되지 않는 속성이라 그런 것일까. 아토포스란 표현처럼 쿠바의 날씨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렬함이 있다. '미친 태양이 내리쬐면서 동시에 미친 폭우도 쏟아‘(p66)지는 쿠바. 기상학적인 합리적 분석으로 볼 땐 그 위도에 맞는 그 기후겠지만 그 속엔 어떤 음미할 것들이 가득 있다. 집을 두고 여행을 하는 우리의 오랜 습성과 사색과 관찰이 소용돌이치는 공간들이 그렇게 곳곳에 있다. 그리고 모두가 찾아 나선다. 여유가 있든 없든 자기가 꿈꾸는 아토포스에 대한 열정으로. 백민석의 첫 여행 에세이집은 이병률의 첫 여행 에세이 끌림을 떠올리게 했다. 사진에서 엿보이는 현지 사람들에게 가지는 애정, 한국적 감수성, 작가적 필치 등등. 끌림을 좋아한 사람들은 《아바나의 시민들도 좋아할 것이다. 이병률이 아기자기하고 풍부한 인상파 화풍이라면 백민석은 권태와 단절감이 묻어나는 굵은 터치의 정물화 같달까.

 

 

 

《아바나의 시민들

 

"아바나에서 끝없이 걷는다는 것은, 당신에게는 아바나에 대한 독서 행위나 마찬가지다. 낱말을 읽듯 집집마다 기웃거리고, 행간을 읽듯 골목마다 헤집고 다니고, 문단을 읽듯 지역을 훑는다. 나중엔 책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는 듯 아바나 전체를 알게 되거나, 알게 되었다고 자신을 속이게 된다. 당신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기보다 읽는 사람에 더 가깝다. 읽는 걸 더 좋아하고,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쓰는 건 포기해도 읽는 건 포기할 수 없다.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일단 읽으려 든다. 사람이든, 책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도시든. 그래서 낯선 도시에 도착해서 서점을 만나면 고향처럼 살가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비록 당신이 읽을 수 있는 책이 한 권도 없을지라도."(《아바나의 시민들》, p107)

 

이병률 끌림에 대해서는 ...  http://blog.aladin.co.kr/durepos/7333525

이병률 다른 산문집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새삼 여행 에세이 참 잘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아, 해가 떠버렸다. 나의 아토포스는 어디 있는가. 카피톨리오의 늙은 사진가가 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카메라로 찍어주는 나를 만나고 싶은 아침이다. 단 한 곳에서만 찍을 수 있고 세상에서 단 한 장뿐인 단색조의 나를. 


《아바나의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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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8-17 09: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양반 소설로 재미를 못 보시니까
이제 아예 여행작가로 전업을 하신 모양입니다.

나름 유쾌한 비급 정서를 담아내서 좋았는데
말이죠 ㅋㅋ

AgalmA 2017-08-19 07:23   좋아요 0 | URL
절필까지 할 정도로 소설 쓰기 지긋지긋해 했잖아요. 그런데 에세이는 힘이 나서 좋다네요. 이번 에세이는 출판사 기획으로 쓰신 거 같은데 이 책 잘 되면 앞으로 더더 쓰실 듯^^

요즘 소설쓰신 건 예전만 못해서 좀 아쉽더라는ㅎ;

2017-08-17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8-19 07:25   좋아요 0 | URL
핸폰으로 찍은 사진도 많던데 뭘 찍어도 작품이 되는 곳 같아요ㅎ
유네스코 문화 지정되어서 옛모습이 많아 더욱 그런 듯요. 문화적인 자유로움도 사진에 가득~^^
경비원 아저씬데도 모델급 포즈더라는ㅎㅋㅋ
 

 

 

거울 속에도 바람이 일었다
거울도 바람도 그림도 자유의지도 다 아닌 착각이고
Cogito, ergo sum도 신념일 뿐이고
 나는 이 세계를 도통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다 이렇다
그리고 말한다

맘에 안 든다고?

나보다 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말은 적게
시집에 파란 손자국을 가득 남겼다

 

 

 

 


 개들의 밤


  
간유리를 지나 방 안으로 출몰하는 빛은 누운 사람에게 천장을 새삼스럽게 만든다. 자식을 낳으면 더 오래 사는 기분입니까
어두운 곳에서는 끊임없이 누군가 키스를 한다 끊임없이 누군가 오줌을 눈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비명이 들린다면 어떤 사람은 자기만을 쳐다보던 짐승을 견디지 못했다는 것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짐승의 목은 어둠 속에서 계속 자란다는 것
 
빛으로 다가갈 땐 똑바로 걸을 수 없다
기계는 어두운 곳으로 불빛을 낸다 그쪽으로 행진하는 자들을 낸다
오늘 한쪽 눈을 가리고 내일은 그 반대쪽의 세계를 가리듯이
언젠간 낮에서 밤으로만 걸어가는 아이를 낳을래 제 그림자 같은 건 사랑할 수 없는
이런 나를 반복할 수 없고 하나의 연인만을 가질 수 있는
 
당신과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가로등 빛 아래서 더러운 물을 핥으며 욕망하는 검은 개들을 보았습니다. 그런 밤이면 우리는 서로의 가슴을 입속에 넣었지만 아무도 심장 뛰는 소리에 밤새 귀를 기울일 수는 없습니다
너의 왼쪽 눈에서는 비가 내렸고 내 오른손 바닥엔 차가운 결정이 쌓였다
개는 슬프지 않다 개는 그럴 때 주먹을 쥘 수 없다
 

 


ㅡ 김상혁


 

 

 

 

Loro's 오랜만/

  '너의 왼쪽 눈에서는 비가 내렸고 내 오른손 바닥엔 차가운 결정이 쌓였다' (김상혁) 싯구 때문에 생각나 가져왔다.

 

Loro's - 너의 오른쪽 안구에서 난초향이 나

 

Loro's -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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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1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8-11 16:24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저건 어떤 나가 투영된 걸까요^^;

겨울호랑이 2017-08-11 08: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파란 테두리 거울에 갇혀 있는 사람이 그려진 것 같아요. 순환하는 운명 같기도 하고, 무한한 시간 속에 안타까운 표정을 보니, 한밤과 잘 어울립니다^^: 오랫만에 1일1그림보니 좋네요.

AgalmA 2017-08-11 16:26   좋아요 1 | URL
저런 테두리 창은 비행기 같기도 하고 우주선 같기도 하고 어디 갇힌 느낌을 주는 데이터가 우리에게 많이 쌓인 거 같아요. 그리자 생각하고 그리면 슥삭 나오는데 1일 1그림 그리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잠자냥 2017-08-11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Loro‘s 의 음악과 앨범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댓글 달아봅니다. ^^

AgalmA 2017-08-11 16:29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로로스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와~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그런 생각을 했죠.
2집을 끝으로 해체됐다고 들었습니다. 음악계야 능력있는 친구들 이합집산하는 거 흔해서 다른 모습으로라도 계속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2017-08-11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11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로우의 일기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도솔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소로가 일기에서 ˝오성이 싹을 틔워 나무를 자라게 한다면 이성은 나무를 숙성시켜 열매를 맺게 한다˝고 한 말처럼 그의 글도 읽는 이에게 그런 역할을 한다. 그가 말하는 침묵, 소리, 자연 그것들은 나도 이미 경험했다. 경험과 상상의 공동체로서 순간 우리는 하나의 인간이 된다. 178년 전의 그인데도 여기서 시간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인간은 정말 신기하기도 하지.

없는 그가 문장 마디마다 내게 묻는다.
너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너는 무엇인가.
왜.

나는 누구에게도 기억되고 싶지 않다. 필요는 구속된 자에게 있는 것. 그래서 모두에게 일기가 필요하다.

https://youtu.be/YDiFphUcPWw
‘Maurizio Pollini: Schubert - Piano Sonata in A major, ‘Andantino‘ D. 959‘

하나의 불꽃 속에 지옥 전체가 들어 있을 수 있다.
ㅡ1837년 12월 19일

포도주 한 방울이 술잔 전체를 물들이는 것처럼 한 방울의 진실이 우리 전 생애의 빛깔을 결정할 수 있다. 진실은 고립된 섬이 아니다. 또 창고에 재물을 쌓듯 채워지는 것도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들을 잊고 다시 새롭게 배워야만 전진할 수 있다.
ㅡ1837년 12월 31일
*A 첨언: 어떤 경지에 이르면 깨달음은 비슷했다. 소로의 이 말은 마치 불교에서 깨달음을 찾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심우(尋牛)와 비슷하다.

갈라진 틈이나 옹이 구멍을 통해 보더라도 세계의 아름다움에는 변함이 없다.
ㅡ1838년 1월 16일

소리란 침묵에 가깝다. 소리는 일자마자 곧 꺼지는 거품과도 같다. 그 거품은 내면적인 풍성함과 강함을 상징한다. 이처럼 소리란 침묵과 대비될 때만 청각신경에 잡히는 침묵의 희미한 발화(發話)이다. 침묵의 발화자이자 침묵의 강조자로 나타날 때만 소리는 조화롭고 순수한 멜로디가 될 수 있다.
ㅡ1838년 10월(날짜 미상)

단 한 사람만으로도 방 하나를 충분히 침묵시킬 수 있다.
ㅡ1839년 1월 9일

약자가 평평하다는 말은 맞다. 약자는 강한 모서리 부분에 서기보다는 편리한 표면을 선호한다. 그는 무난히 인생을 보낸다. 물체는 대부분 강한 부분이 있다. 짚은 세로 방향이, 널빤지는 모서리 방향이, 나뭇결은 횡축이 강하다. 하지만 용자(勇者)는 한쪽으로 누울 수 없는 완전한 구(球)와 같아서 어느 한 곳이라도 약한 곳이 없다. 비겁한 사람은 잘해야 타원체에 지나지 않는다. 교육을 너무 많이 받은 것도 약점일 수 있다. 비겁한 사람은 한쪽이 늘어나면 반드시 또 다른 한쪽은 눌려 있다. 속이 빈 구일 수도 있다. 부피를 크게 할 의도라면 그것이 최선이다.
ㅡ1839년 5월 17일

상식은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천재의 기이한 빛만이 진실을 재현할 수 있다. 선각자의 눈길이 닿기만 한다면 아무리 진부하고 하찮은 사실도 하늘의 새로운 별이라는 믿음을 낳을 수 있다.

과거란 지금 시도되고 있는 현재에 지나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과거는 과거 자체로 증명하게 하라.
ㅡ1839년 11월 5일

운명이 용감한 자를 버릴지라도 용감한 자는 운명을 버리지 않는다. 가난으로 인해 밤거리를 헤매야 하는 처지에서도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굳게 결의한 새뮤얼 존슨과 그의 벗 사비지처럼 말이다.

여러 가지 소리가 우리의 귀에 들려온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팔 소리와 북소리는 침묵의 소리이다. 아주 미미하게 들리는 ‘삐걱‘하는 소리마저도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모든 사물들을 향해 북방의 오로라와 같은 거대한 빛을 발산한다. 윤이 대리석의 정맥을, 낟알이 숲의 정맥을 표현한다면 음악은 어디엔가 숨어 있을 영웅적인 그 무엇을 나타낸다.

나는 나의 벗의 인품이 나보다는 훨씬 더 훌륭하리라고 생각한다. 나의 열망이 나의 실천을 능가하듯이 말이다.
ㅡ1839년 12월(날짜 미상)

시인은 초원을 땅이나 풀이나 물이 아닌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위대한 시인은 다만 초원이 이러저러하다는 것을 말할 따름이다. 평범한 농부라 하더라도 감자꽃이 제비꽃만큼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한다. 위대한 시인은 감자꽃이 왜 좋은가만 말할 따름이다.
ㅡ1840년 1월 26일

태양이 내리쬐는 월든 호숫가에서 따뜻한 온기를 받으며 물결 살랑이는 소리를 듣는 동안 나는 과거의 모든 의무로부터 해방된다. 국가평의회 따위에서는 유권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 반짝이는 조약돌이 그런 기관들을 모두 무효로 만들고 있다.
ㅡ1840년 3월 22일
*A 첨언: <시민 불복종>을 썼고 인두세 내기를 거부해 감옥에 하룻밤 갇히기도 했던 소로. 월든 호숫가에서 자급자족을 했던 그. 세상의 의무, 세상의 인정을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용기를 실천하는 사람에게서는 늘 이런 성찰을 발견한다. 알렉산더 왕이 소원을 물었을 때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고 한 디오게네스처럼.

나는 전쟁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다. 전쟁은 영혼의 걸음걸이와 자세가 몹시 닮았다.
ㅡ1840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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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8-11 0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기가 참 다르군요 제가 쓰는 것과... 별일이 없어서 그날 일어난 일을 쓰는 건 아니지만, 쓸데없는 걸 씁니다 나중에 보면 비슷한 말만 썼더군요 그런 걸 자주 보는 건 아니고 아주 가끔, 일기라고 하지만 날마다 쓰지도 못합니다 외면일기라는 게 생각나네요 미셸 투르니에가 썼다고 하는... 잘 모르는 작가예요 일기도 제대로 써야 글쓰기에 도움이 될 텐데, 아니 이런 생각보다 그냥 쓰고 싶은대로 써도 괜찮겠죠 그런 것도 있어야죠 저는 일기도 별로 솔직하게 못 씁니다


희선

AgalmA 2017-08-11 04:30   좋아요 1 | URL
미셸 투르니에 좋아하는데 <외면일기>는 읽지 못했습니다. 또 좋아하는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도 읽지 못했고 더더욱 좋아하는 카프카의 일기도 다 읽지 못했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일기를 어떻게 쓰든지 그건 본인의 자유죠 :) 소로는 일기 속에서 생각을 벼르는 작업을 한 사람이라고 해야겠지요.
 
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499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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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에 해설이 없는 게 아쉬운데 만약 있었다면 아름답고 인상적인 글이 됐을 게 분명하다. 고전을 읽으며 우리가 배워 나가듯 좋은 글을 분석하면 그 글의 영양분이 분석에 가득 담기게 마련이니까. 물론 담는 그릇이 작으면이란 예외도 감안해야한다. 그래서 이 시집에 대한 내 리뷰는 범박합니다요!라고 포석을 깔고 가겠다. 안 물어봤는데도 굳이 알리면, 내 입장은 작품을 독립된 하나의 언어 세계로 보고 그 구조 및 수법과 형태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신비평보다는, 작품을 작가의 생애나 사상, 시대나 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보는 주관적인 인상 비평이다.

 

이 시집을 대표할 시 세 개를 내게 요청한다면 복화술사의 구술사, 마치 혀가 없는 것처럼, 브라운이 브라운에게를 가져오겠다.

내 머릿속에다 평생 허방을 판 원수 놈아라고 시간에게 호통치는 복화술사의 구술사는 시간과 자아의 닮은 꼴을 복화술의 상황과 연결해 전달하는 게 흥미롭다.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을 통해 자신을 전달하지만 실체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역설과 궤변의 상황이 지속적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심보선 오늘은 잘 모르겠어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줄기이기도 하다.

대미를 장식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흡사 단편 소설을 떠올리게 만드는 마치 혀가 없는 것처럼(22페이지 분량), 브라운이 브라운에게(35페이지 분량)에서도 심보선 시에서 반복되는 주제부를 엿볼 수 있다. “입속에 혀가 있건 없건/언어를 쓰는 모든 이들에게는 공통의 비애가 있다라고 말하는 마치 혀가 없는 것처럼은 언어 속에 담긴 인류의 불멸성에 대한 탐구를 다각도로 분석 해석하고 있다. 혀 감옥도 등장하고 숟가락으로 혀를 누르고 말을 하려고 시도하는 시인의 행위도 자동 연상되어 이 시는 다체험 시라고 말해도 좋겠다. 인식과 세상의 관계를 우화적으로 그린 파크리트 쥔스킨트의 디스토피아적인 단편 <장인 뮈사르의 유언>이 떠오르기도 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성공한 보석 세공업자인 뮈사르는 자신의 정원에서 돌조개를 우연히 발견하고 조개가 인간과 세계의 연원이며 모든 것은 조개로 돌아간다고 추론하고 진실을 파헤쳐 들어간다.

브라운이 브라운에게는 포춘쿠키 애용자인 Then Brown이 포춘쿠키 속에 들어있던 불행의 글귀(“희망은 그대 영혼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다”)를 발견하고 AFOCOO에 상담 이메일을 보내면서 시작된다. 그가 행운의 문구 작성자인 Brown Gee()와 이메일을 주고받게 되면서 상황은 흥미진진해진다. 행운과 불행은 상호보완의 관계가 아니다. Brown Gee5만 개의 행운 속에 5백 개의 불행(소음 or 적막)을 심어 자신의 모순과 세계의 모순을 전파했듯이 행운과 불행은 서로를 알아보고 폭로하는 비밀스러운 관계다. Then BrownBrown Gee도 그런 관계라는 중첩의 의미도 음미해 볼 수 있는데, 심보선이 자주 시에서 내보이는 동양인으로서 느끼는 비애와 정서도 녹아있는 매우 훌륭한 소설시이기도 하다. 이 시 바로 뒤에 이어지는 리던던시가 제목은 외국어 같은 느낌인데 반해 내용은 아라리 던던시롬같이 토속어 시어인 것이 내 추론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위 시 외에도 언급할 만한 작품이 꽤 많다. 2012년 작고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를 굳이 심보르스카로 호명하고 그 후예로 자청하며 오마주한 시들도 여럿 있는데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 과정에서 사망한 청년을 생각하며 쓴 시 갈색 가방이 있던 역, 시대와 시인이 한 몸 같이 표현되는 여러 시들( “웃음은 존재의 암흑 속에서도 반딧불이 날아다닌다는 증거야라고 말하는 끝나지 않았어, “마음의 번민은 서로 반대인 것들이 뒤섞인 핏물/장미, 노래, , 너의 손, 나의 태양……이라고 말하는 등등), 사회학자인 시인의 특성이 여실히 반영된 시들 「스물세 번째 인간, 근육의 문제, 국가론, 연극 감자와 장미를 위한 시놉시스등등), 가족과 관계와 정체성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여러 시(특히 복화술사의 구술사처럼 없는-증명할 수 없는 존재’를 등장시켜 언어화하는 ).

이 시집을 통해 심보선은보들레르가 말한 앨버트로스-시인(시인은 구름의 군주와 같으니,/그는 폭풍우 속을 드나들고 궁수를 우습게 여기지만,/바닥에 유배되어 조롱하는 사람들 속에 처하면 그는/거대한 날개가 방해되어 잘 걷지 못한다.”(보들레르 악의 꽃, 앨버트로스)이 바로 자신임을 보여주고 있다.

「천도재 이후」에서 시인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As  I lay dying》의 한글 번역 제목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올바로 해석하면 "내가 누워 죽어가고 있을 때"가 맞다고 하면서도 잘못 번역된 제목이 더 맘에 든다고 말했다.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오늘은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표제시 「오늘은 잘 모르겠어」처럼 우리에게 앎과 깨달음이 꼭 올 리 만무하며 우리 선택에 있어서도 앞뒤가 명확하기 어려워서 더 그렇겠다.

 

이 시집은 해설 자리에 부록으로 볼프강 에젤만 <당나귀 문학론>을 배치했다. 우리가 왜 당나귀를 사랑하게 되는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인간은 왜 진실을 향하게 되는지에 대해 탁월하게 피력한다.

시인이 이 시집에서 호명한 당나귀들(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당나귀와 함께 한 세벤느 여행(1879), 후안 라몬 히메네스 플라테로와 나(1955), 윌리엄 스타이그 당나귀와 실베스터와 요술 조약돌(1970))처럼 시도 끝없이 낭송되리라는 예언처럼 이 시집은 도착했다.

기형도 시집처럼 시대에 획을 긋는 시집이 있다. 2000년 대 들어서 황병승여장남자 시코쿠김경주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가 그랬다고 생각하는데 심보선《오늘은 잘 모르겠어》는 2010년대 그런 시집에 해당할 거라고 감히 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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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굿즈가 탐난 김에 산 게 부끄러울 만큼 좋다.
생활을 말하면서도 그의 시 저변에 굴절된 투쟁의 흔적이 알알이 박힌 걸 알아 6년 만에 낸 이 시집이 신화적이고 추상적인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에서 이제 기성 시인 특유의 그 상투적 행보로 가시는가 나는 섣부르게 마음속으로 물어 보다가 어느 순간 감동한다. 잊고 있던 히메네스의 당나귀 ˝플라테로˝를 호명한 때부터 내 맘은 이미 준비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어느 순간에는 당나귀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가를 또다시 생각하게 만드시는군.



˝나는 안다
시를 쓰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내 대신 죽어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내 대신 죽어간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죽어간다, 내가 태어나지 않은 내 아이를 대신해
살아가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나의 연인이 누군가의 행복을 대신해
슬퍼하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나의 시가 누군가의 슬픔을
대신해 사라지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ㅡ「축복은 무엇일까」 중



˝그래도 형은 시인은 안 됐을 거야
두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게 시니까 말야˝

ㅡ「형」 중



곧장 수긍하게 만드는 시의 힘에 나는 늘 새삼스럽게 놀란다. 좋은 시는 어떤 논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도착한다. 사람은 그걸 너무도 잘 안다. 시인은 언어에 가장 매혹된 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하루로 사람의 삶이 완성될 수 없듯이 단 하나의 시만 쓸 수 없어 시인은 언제나 완성을 파괴하거나 볼 수 없는 궁지에 처한다.

260여 페이지의 두툼한 시집을 받아들 때 조금 예감했지만 아마도 나는 2017년 최고의 한국문학으로 이 시집을 꼽게 될 지도 모르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시를 읽는 여름밤도 좋구나. 누군가 시를 쓰고 있어 ˝오늘 밤 이 세상에 한 사람은 반드시 시인˝(「나는 이제 시인이 아니랍니다」)인 것처럼 오늘 밤 내가 유일하게 시집을 읽고 있는 사람이어도 좋겠다. 하지만 이대로 영영 식어 버리면 더 좋지 않을까. 영영. 우리가 이토록 많은 말을 했다는 것에 부끄럽지 않도록...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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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5 0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8-05 12:05   좋아요 1 | URL
읽어 보시면 정말정말 좋아하시게 될 겁니다 :)

2017-08-05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8-05 12:18   좋아요 1 | URL
첫시집부터 적당히 심각하고 적당히 쉬워서 대중들에게 인기받겠다 싶었죠.
뭐랄까. 90년대 정서를 기형도가 대표해 줬다면 심보선은 지금의 그 역할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시집 읽으며 더워도 위로받고 성찰하게 되는 여름밤이었습니다. 참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