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499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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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에 해설이 없는 게 아쉬운데 만약 있었다면 아름답고 인상적인 글이 됐을 게 분명하다. 고전을 읽으며 우리가 배워 나가듯 좋은 글을 분석하면 그 글의 영양분이 분석에 가득 담기게 마련이니까. 물론 담는 그릇이 작으면이란 예외도 감안해야한다. 그래서 이 시집에 대한 내 리뷰는 범박합니다요!라고 포석을 깔고 가겠다. 안 물어봤는데도 굳이 알리면, 내 입장은 작품을 독립된 하나의 언어 세계로 보고 그 구조 및 수법과 형태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신비평보다는, 작품을 작가의 생애나 사상, 시대나 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보는 주관적인 인상 비평이다.

 

이 시집을 대표할 시 세 개를 내게 요청한다면 복화술사의 구술사, 마치 혀가 없는 것처럼, 브라운이 브라운에게를 가져오겠다.

내 머릿속에다 평생 허방을 판 원수 놈아라고 시간에게 호통치는 복화술사의 구술사는 시간과 자아의 닮은 꼴을 복화술의 상황과 연결해 전달하는 게 흥미롭다.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을 통해 자신을 전달하지만 실체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역설과 궤변의 상황이 지속적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심보선 오늘은 잘 모르겠어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줄기이기도 하다.

대미를 장식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흡사 단편 소설을 떠올리게 만드는 마치 혀가 없는 것처럼(22페이지 분량), 브라운이 브라운에게(35페이지 분량)에서도 심보선 시에서 반복되는 주제부를 엿볼 수 있다. “입속에 혀가 있건 없건/언어를 쓰는 모든 이들에게는 공통의 비애가 있다라고 말하는 마치 혀가 없는 것처럼은 언어 속에 담긴 인류의 불멸성에 대한 탐구를 다각도로 분석 해석하고 있다. 혀 감옥도 등장하고 숟가락으로 혀를 누르고 말을 하려고 시도하는 시인의 행위도 자동 연상되어 이 시는 다체험 시라고 말해도 좋겠다. 인식과 세상의 관계를 우화적으로 그린 파크리트 쥔스킨트의 디스토피아적인 단편 <장인 뮈사르의 유언>이 떠오르기도 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성공한 보석 세공업자인 뮈사르는 자신의 정원에서 돌조개를 우연히 발견하고 조개가 인간과 세계의 연원이며 모든 것은 조개로 돌아간다고 추론하고 진실을 파헤쳐 들어간다.

브라운이 브라운에게는 포춘쿠키 애용자인 Then Brown이 포춘쿠키 속에 들어있던 불행의 글귀(“희망은 그대 영혼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다”)를 발견하고 AFOCOO에 상담 이메일을 보내면서 시작된다. 그가 행운의 문구 작성자인 Brown Gee()와 이메일을 주고받게 되면서 상황은 흥미진진해진다. 행운과 불행은 상호보완의 관계가 아니다. Brown Gee5만 개의 행운 속에 5백 개의 불행(소음 or 적막)을 심어 자신의 모순과 세계의 모순을 전파했듯이 행운과 불행은 서로를 알아보고 폭로하는 비밀스러운 관계다. Then BrownBrown Gee도 그런 관계라는 중첩의 의미도 음미해 볼 수 있는데, 심보선이 자주 시에서 내보이는 동양인으로서 느끼는 비애와 정서도 녹아있는 매우 훌륭한 소설시이기도 하다. 이 시 바로 뒤에 이어지는 리던던시가 제목은 외국어 같은 느낌인데 반해 내용은 아라리 던던시롬같이 토속어 시어인 것이 내 추론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위 시 외에도 언급할 만한 작품이 꽤 많다. 2012년 작고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를 굳이 심보르스카로 호명하고 그 후예로 자청하며 오마주한 시들도 여럿 있는데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 과정에서 사망한 청년을 생각하며 쓴 시 갈색 가방이 있던 역, 시대와 시인이 한 몸 같이 표현되는 여러 시들( “웃음은 존재의 암흑 속에서도 반딧불이 날아다닌다는 증거야라고 말하는 끝나지 않았어, “마음의 번민은 서로 반대인 것들이 뒤섞인 핏물/장미, 노래, , 너의 손, 나의 태양……이라고 말하는 등등), 사회학자인 시인의 특성이 여실히 반영된 시들 「스물세 번째 인간, 근육의 문제, 국가론, 연극 감자와 장미를 위한 시놉시스등등), 가족과 관계와 정체성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여러 시(특히 복화술사의 구술사처럼 없는-증명할 수 없는 존재’를 등장시켜 언어화하는 ).

이 시집을 통해 심보선은보들레르가 말한 앨버트로스-시인(시인은 구름의 군주와 같으니,/그는 폭풍우 속을 드나들고 궁수를 우습게 여기지만,/바닥에 유배되어 조롱하는 사람들 속에 처하면 그는/거대한 날개가 방해되어 잘 걷지 못한다.”(보들레르 악의 꽃, 앨버트로스)이 바로 자신임을 보여주고 있다.

「천도재 이후」에서 시인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As  I lay dying》의 한글 번역 제목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올바로 해석하면 "내가 누워 죽어가고 있을 때"가 맞다고 하면서도 잘못 번역된 제목이 더 맘에 든다고 말했다.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오늘은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표제시 「오늘은 잘 모르겠어」처럼 우리에게 앎과 깨달음이 꼭 올 리 만무하며 우리 선택에 있어서도 앞뒤가 명확하기 어려워서 더 그렇겠다.

 

이 시집은 해설 자리에 부록으로 볼프강 에젤만 <당나귀 문학론>을 배치했다. 우리가 왜 당나귀를 사랑하게 되는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인간은 왜 진실을 향하게 되는지에 대해 탁월하게 피력한다.

시인이 이 시집에서 호명한 당나귀들(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당나귀와 함께 한 세벤느 여행(1879), 후안 라몬 히메네스 플라테로와 나(1955), 윌리엄 스타이그 당나귀와 실베스터와 요술 조약돌(1970))처럼 시도 끝없이 낭송되리라는 예언처럼 이 시집은 도착했다.

기형도 시집처럼 시대에 획을 긋는 시집이 있다. 2000년 대 들어서 황병승여장남자 시코쿠김경주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가 그랬다고 생각하는데 심보선《오늘은 잘 모르겠어》는 2010년대 그런 시집에 해당할 거라고 감히 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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