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굿즈가 탐난 김에 산 게 부끄러울 만큼 좋다.
생활을 말하면서도 그의 시 저변에 굴절된 투쟁의 흔적이 알알이 박힌 걸 알아 6년 만에 낸 이 시집이 신화적이고 추상적인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에서 이제 기성 시인 특유의 그 상투적 행보로 가시는가 나는 섣부르게 마음속으로 물어 보다가 어느 순간 감동한다. 잊고 있던 히메네스의 당나귀 ˝플라테로˝를 호명한 때부터 내 맘은 이미 준비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어느 순간에는 당나귀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가를 또다시 생각하게 만드시는군.



˝나는 안다
시를 쓰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내 대신 죽어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내 대신 죽어간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죽어간다, 내가 태어나지 않은 내 아이를 대신해
살아가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나의 연인이 누군가의 행복을 대신해
슬퍼하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나의 시가 누군가의 슬픔을
대신해 사라지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ㅡ「축복은 무엇일까」 중



˝그래도 형은 시인은 안 됐을 거야
두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게 시니까 말야˝

ㅡ「형」 중



곧장 수긍하게 만드는 시의 힘에 나는 늘 새삼스럽게 놀란다. 좋은 시는 어떤 논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도착한다. 사람은 그걸 너무도 잘 안다. 시인은 언어에 가장 매혹된 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하루로 사람의 삶이 완성될 수 없듯이 단 하나의 시만 쓸 수 없어 시인은 언제나 완성을 파괴하거나 볼 수 없는 궁지에 처한다.

260여 페이지의 두툼한 시집을 받아들 때 조금 예감했지만 아마도 나는 2017년 최고의 한국문학으로 이 시집을 꼽게 될 지도 모르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시를 읽는 여름밤도 좋구나. 누군가 시를 쓰고 있어 ˝오늘 밤 이 세상에 한 사람은 반드시 시인˝(「나는 이제 시인이 아니랍니다」)인 것처럼 오늘 밤 내가 유일하게 시집을 읽고 있는 사람이어도 좋겠다. 하지만 이대로 영영 식어 버리면 더 좋지 않을까. 영영. 우리가 이토록 많은 말을 했다는 것에 부끄럽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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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5 0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8-05 12:05   좋아요 1 | URL
읽어 보시면 정말정말 좋아하시게 될 겁니다 :)

2017-08-05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8-05 12:18   좋아요 1 | URL
첫시집부터 적당히 심각하고 적당히 쉬워서 대중들에게 인기받겠다 싶었죠.
뭐랄까. 90년대 정서를 기형도가 대표해 줬다면 심보선은 지금의 그 역할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시집 읽으며 더워도 위로받고 성찰하게 되는 여름밤이었습니다. 참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