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의상전교조' 중에서
삼국유사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일연의 <삼국유사>를 읽는다는 건 그저 역사를 읽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알에서 난 왕과 닭부리 입술을 하고 태어난 왕비의 신화를 읽는 것이고,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라고 읊었던 애절한 향가를 읽는 것이며, '괴력난신(怪力亂神)'이란 이유로 말해지지 못했던 수많은 기이하고도 재미있는 옛이야기들을 읽는 것이기도 하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넜고, 무왕은 용의 아들, 견훤은 지렁이의 아들이었다.

어떤 왕의 음경은 한 자 다섯 치여서 짝을 찾기 어려웠고, 또 어떤 왕은 수 많은 뱀들과 함께 잤다고 하지. 

쥐가 사람의 말로 조언을 하고, 천신은 한밤중에 내려와 석굴암을 완성했단다.

비형은 귀신을 시켜 여우로 둔갑한 길형을 붙잡았고,  문희는 언니 꿈을 산 뒤에 때마침 집에 온 김춘추를 꼬셔서 왕후가 되었다. 

화랑 김현은 탑돌이 하다가 처녀로 둔갑한 호랑이와 만나서 원나잇 아니 '조용한 곳으로 가서 정을 통'했다. 

대나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쳤다고 하네.

용왕도 탐냈다던, 아니 가는 곳마다 탐냈다던 수로부인의 미모는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을 시험했던 스무 살 가량의 아름다운 낭자는 또 어떻고.

 

그리고 시도때도 없이 나와서 점을 치는 일관(日官)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승려들.

비단천으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당나라 군대를 물리친 명랑,

법당 지붕을 뚫고 극락왕생한 여자종 욱면, 지팡이를 날려 마을에서 시주를 받았던 양지 스님, 대현과 법해가 겨루었던 기이한 법력 대결, 귀신들이 두려워했던 밀본과 귀신을 부려 마귀를 쫓은 혜통의 이야기는 신기하다.

책에 쓰인 내용에 입각해서 본다면 의상대사는 이른바 '허공답보'를 시전했던 경공술의 대가이며 밀본법사는 '일양지'와 '허공섭물'을 구사할 수 있었던 고수였을 것이다.

이렇듯 <유사>에서는 원광, 자장, 의상과 원효, 진표를 필두로 수많은 승려들의 전기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또 '탑상편'에서는 장인과 승려들이 빚고 지어낸 무수한 불상과 탑들과 그에 얽힌 전설까지 열거되어 있으니 삼국의 종교사나 미술사 연구자에게 절대적인 문헌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책에서 인상 깊었던 설화 두 가지만 옮겨 본다.

신주편 혜통항룡조를 보면 혜통이 출가한 계기가 이렇게 소개된다.

 

(승려 혜통이 속인이었을 때) 어느 날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는 뼈를 동산에 버렸는데 이튿날 아침에 그 뼈가 없어졌다. 그래서 핏자국을 따라갔더니 그 뼈는 옛날에 살던 굴 속으로 들어가 다섯 마리의 새끼를 끌어안고 웅크리고 있었다. 혜통이 그것을 바라보고는 한참 동안 놀라워하고 탄식하며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여 이름을 혜통으로 바꿨다. (513)

 

그리고 저 유명한 탑상편 조신의 꿈 이야기.

사랑하는 것이 곧 고뇌의 시작임을 가르치는 이 슬픈 설화는 유명하다고는 해도 정확한 내용을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좀 번거롭지만 책에서 전문을 옮겨 본다.

 

옛날 신라가 서울이었을 때, 세달사의 장원이 명주 날리군에 있었다. 본사에서는 승려 조신을 보내 장원을 맡아 관리하게 했다.

 

조신은 장원에 이르러 태수 김흔의 딸을 깊이 연모하게 되었다. 여러 번 낙산사의 관음보살 앞에 나가 남몰래 인연을 맺게 해 달라고 빌었으나 몇 년 뒤 그 여자에게 배필이 생겼다. 조신은 다시 관음 앞에 나아가 관음보살이 자기의 뜻을 이루어 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었다. 그렇게 그리워하다 지쳐 얼마 뒤 선잠이 들었다. 꿈에 갑자기 김 씨의 딸이 기쁜 모습으로 문으로 들어오더니,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일찍이 스님의 얼굴을 본 뒤로 사모하게 되어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부모의 명을 어기지 못해 억지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지만, 이제 [죽어도] 같은 무덤에 묻힐 벗이 되고 싶어서 왔습니다."

 

조신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며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40여 년을 살면서 자식 다섯을 두었다. 그러나 집이라곤 네 벽뿐이요 콩잎이나 명아주국 같은 변변한 끼니도 댈 수 없어 마침내 실의에 찬 나머지 가족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입에 풀칠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를 떠돌아다니다 보니 [옷은] 메추라기가 매달린 것처럼 너덜너덜해지고 백 번이나 기워 입어 몸도 가리지 못할 정도였다. 강릉 해현령을 지날 때 열다섯 살 된 큰아들이 굶주려 그만 죽고 말았다. 조신은 통곡하며 길 가에다 묻고, 남은 네 자식을 데리고 우곡현에 도착하여 길가에 띠풀로 엮은 집을 짓고 살았다. 부부가 늙고 병들어 굶주려 일어날 수 없게 되자, 열 살 난 딸아이가 돌아다니며 구걸을 했다. 그러다가 마을의 개에 물려 부모 앞에서 아프다고 울며 드러눕자 부모는 한탄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부인은 눈물을 씻더니 갑자기 말했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꽃다운 나이에 옷차림도 깨끗했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이라도 당신과 나누어 먹었고, 몇 자 되는 따뜻한 옷감이 있으면 당신과 함께 해 입었습니다. [집을] 나와 함께 산 50년 동안 정분은 가까워졌고 은혜와 사랑이 깊었으니 두터운 인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이래로 쇠약해져 병이 날로 더욱 심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도 날로 더해오는데, 곁방살이에 하찮은 음식조차 빌어먹지 못하여 이 집 저 집에서 구걸하며 다니는 부끄러움은 산과 같이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돌봐 줄 수가 없는데, 어느 겨를에 사랑의 싹을 틔워 부부의 정을 즐기겠습니까? 젊은 날의 고왔던 얼굴과 아름다운 웃음도 풀잎 위의 이슬이 되었고, 지초와 난초 같은 약속도 회오리바람에 날리는 버들솜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있어서 근심만 쌓이고, 나는 당신 때문에 근심거리만 많아지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옛날의 기쁨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당신이나 나나 어째서 이 지경이 되었는지요. 여러 마리의 새가 함께 굶주리는 것보다는 짝 잃은 난새가 거울을 보면서 짝을 그리워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힘들면 버리고 편안하면 친해지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가고 멈추는 것 역시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데도 운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에 따라 이만 헤어지기로 합시다.“


조신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각기 아이를 둘씩 나누어 데리고 떠나려 하는데 아내가 말했다.

“저는 고향으로 향할 것이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그리하여 조신은 이별을 하고 길을 가다가 꿈에서 깨어났는데 희미한 등불이 어른거리고 밤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세어 있었다. 조신은 망연자실하여 세상일에 전혀 뜻이 없어졌다. 고달프게 사는 것도 이미 싫어졌고 마치 백 년 동안의 괴로움을 맛본 것 같아 세속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 사라졌다. 그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부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깊이 참회하는 마음이 끝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해현으로 가서 아이를 묻었던 곳을 파 보았더니 돌미륵이 나왔다. 물로 깨끗이 씻어서 가까운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장원을 관리하는 직책을 사임하고 개인 재산을 털어 정토사를 짓고서 수행했다. 그 후에 아무도 조신의 종적을 알지 못했다.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이 전을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지난 일을 곰곰이 돌이켜 보니, 어찌 반드시 조신의 꿈만 그러하겠는가? 지금 모든 사람이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알아 기뻐하면서 애를 쓰지만 특별히 깨닫지 못할 뿐이다.”
(380-383)

 

#

<삼국유사>의 설화들은 그저 단순히 재미난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다. 고대사와 문학을 다룬 수많은 저서와 논문들에서 이 책은 늘 중요한 문헌으로 구구절절 인용되고 있으며, 또 이 책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역사의 내용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 <삼국유사>를 읽지 않고 우리 고대 역사와 사상, 문학과 예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아마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특히 승려의 저술인 만큼 불교의 신앙대상과 사상, 종파 등에 관한 자료가 많이 실려 있어서 삼국과 통일신라시대 불교의 여러 단면들을 폭넓게 엿볼 수 있는 사료가 되었다.

 

이번에 통독한 것으로 그냥 덮어둘 게 아니라 옆에 두고 되풀이하여 읽어야겠다. 그리고 여러 가지 관점과 맥락에 따라 초록과 질문, 논평을 정리해 두어야 다시 활용할 수 있겠다. 이건 책에 밑줄만 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줄거리만 파악하는 게 아니라 자료로써 사용하기 위한 독서야 되어야 한다. 그러니 나는 엊그제 <유사>를 다 읽었지만 사실은 아직도 <유사>를 다 읽은 것이 아니다.

고전이란 게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맛이 난다고 하지 않는가. 게다가 다른 독서와 체험들이 쌓이고 나면 똑같은 책인데도 그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들이 읽히게 된다. 

 

 

* 민음사 <삼국유사>가 두 종류가 있는데, 나는 원문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책으로 읽었다. 굳이 원문을 살필 이유가 없다면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삼국유사>을 읽어도 될 것이다.

 

 

 


댓글(6) 먼댓글(1)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이런 시가 하필
    from 突厥閣 2015-02-24 01:27 
    문득 펼친 시집에서 하필 이런 시가 눈에 띄어서 적어 본다. 엊그젠가 <유사>에서 조신의 꿈을 옮겨 적어서 그런가 보다. 글끼리 서로 끌어당긴 거 같기도 하고... 참 신기하기도 하지. 30년, 하고 중얼거리다고교 졸업 30주년30년, 하는 제 소리에 놀라그는 퍼뜩 꿈에서 깬다교련복을 챙기고 도시락을 싸고서둘러야 할 시간웬 생시 같은 꿈!서울로 어디로 떠나 대학생이 되는 꿈 취직하는 꿈 술 담배 배우고 여자도 배우는 꿈 자취로 하숙으로 과
 
 
붉은돼지 2015-02-22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배창호 감독의 아마도 안성기가 조신역으로 나오는 ˝꿈˝이란 영화도 있었죠...

돌궐 2015-02-22 18:06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좀 뒤져봐야겠습니다.^^

cyrus 2015-02-22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팟캐스트 방송 명로진 권진영의 고전읽기에서 몇 주 전부터 삼국유사를 소개하기에 오랜만에 삼국유사를 읽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읽을 게 너무 많아서 시작하는 마음을 접었어요.. ㅎㅎㅎ

돌궐 2015-02-22 18:23   좋아요 0 | URL
저처럼 일종의 의무감으로 읽지 않으면 참 읽기 힘든 책이란 건 인정합니다.ㅎㅎ
그나마 김원중 선생 번역이라서 저도 간신히 읽은 거 같아요.
다음은 삼국사기인데 역시 머나먼 여정이 되겠죠.

yamoo 2015-02-23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알라딘 중고서점에 을유판 삼국유삭 널려있더이다. 두꺼운 책이 3천원 정도 하던데...일단은 사두어야 겠네요..ㅎ 문고본으로 2종이 있긴 하지만 페이퍼를 보니 을유사판을 갖고 있어야 할 듯 합니다~ㅎ

돌궐 2015-02-23 13:26   좋아요 0 | URL
나중에 혹 필요한 절판도서가 생기면 yamoo 님께 맨 먼저 문의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방금 다 읽은 책에 아래와 같은 글이 나온다.

 

"친구여, 언제나 현재 상황을 헐뜯는 것은 쉬운 일이며 또 인간의 특징이기도 하지요. 아마도 위대한 인물들을 망쳐 놓는 것은 세계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욕망들을 움켜잡고 있는 이 끝없는 전쟁과 오늘날 우리의 생활을 점거하여 이를 뿌리째 파괴하고 있는 열정들일 것이오. 우리 모두가 앓고 있는 탐욕스런 병인 금전욕과 향락욕은 우리를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고 있소. 아니, 그것들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익사시킨다고 해야겠지요. 금전욕은 우리를 시들게 하는 병이고, 향락욕은 가장 비열한 것이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가 무한한 부(富)를 그렇게 존중하고도, 아니 신격화하고도 어떻게 거기에 수반되는 악들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소. 제어되지 않은 무한한 부에는 사치가 가까이서 사람들 말마따나 보조를 맞추며 뒤따르기 때문이오. 부가 도시들이나 집들의 문을 여는 순간 사치도 함께 들어가 그 안에서 살지요.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 생활 속에 얼마 동안 머물게 되면 철학자들 말마따나 그곳에 둥지를 틀고는 곧 새끼를 치기 시작하는데, 탐욕과 교만과 허영이 곧 그것이오. 이것들은 서자가 아니라 그것들의 적자들이오. 그리고 이들 부의 자식들은 성년이 되면 곧 우리 마음속에 사정없는 폭군들인 오만과 무법과 파렴치를 낳게 되지요.

 

이것은 불가피한 과정이오. 그러면 사람들은 더 이상 위를 쳐다보지 않고 자신들의 미래의 명성에 유념하지도 않을 것이오. 이러한 악덕들이 순환하는 가운데 인간들의 삶은 점진적으로 파괴되고 정신의 위대성은 이울다가 사라지며 더 이상 추구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들에게서 필멸의 부분은 존중하고 불사의 부분은 개발하기를 게을리하기 때문이오.

 

뇌물 받고 재판하는 자는 정당하고 아름다운 것에 관하여 결코 자유롭고 건전한 재판관이 될 수 없소. 뇌물 받은 자에게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익만이 아름답고 정당해 보일 테니까요. 지금 우리 모두의 삶은 전적으로 뇌물의 지배를 받고 있고, 우리는 또 다른 사람의 죽음을 노리는가 하면 유산을 타기 위하여 덫을 놓고 있소. 우리는 또 저마다 탐욕의 노예가 되어 모든 것에서 이익을 얻고자 영혼도 팔아먹었소. 하거늘 이렇듯 역병으로 삶이 파괴된 가운데서 영원히 지속되는 위대한 것들의 자유롭고 부패하지 않은 재판관이 아직도 남아 있기를, 그리고 그가 이익에 대한 욕망에 압도되지 않기를 우리가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소.

 

사실 우리 같은 인간들에게는 자유로운 것보다는 지배받는 편이 더 낫소.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가 주어져 우리가 말하자면 풀려난 죄수들처럼 이웃들에게 덤벼들게 된다면 탐욕은 악의 홍수로 세상을 뒤덮을 것이오. 간단히 말해서" 하고 나는 말을 이었소. "오늘날 인간들의 자질을 망쳐놓는 것은 나태이며 소수를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소. 우리의 모든 노력과 기도(企圖)가 지향하는 것은 칭찬과 쾌락이지 추구하고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선행이 아니기 때문이오." (393-395)

 

요즘 사람들의 물욕과 이기심, 천박한 사치와 허영을 비판하는 듯한 이 글은 사실

기원후 1세기 경의 그리스 출신 저술가로 알려진 롱기누스가 <숭고에 관하여>라는 책의 맨 뒷부분에 쓴 글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본주의가 생긴 이후에 쓰여진 문장이 아니라 무려 2천 년 전의 문장인 것이다.

2000년 전이라고? 근데 왜 난 어제 들었던 얘기 같을까?

 

역사는, 정말 되풀이되는 모양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라로 2015-02-18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번 읽었네요~~~. 느끼는 바가 큽니다. ㅠㅠ

돌궐 2015-02-18 16:27   좋아요 0 | URL
그러시다니 굳이 옮겨 적은 보람이 있네요.^^

cyrus 2015-02-18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장에 오랫동안 방치된 시학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

돌궐 2015-02-19 00:14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서양 고전들을 막 찾아다닌 이유가 이 책 때문입니다.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투퀴디데스 등 저명한 작가들이 자주 소개되고 있어서 궁금증이 생기더라구요.^^
 

 

 

 

 

 

 

 

 

 

 

 

 

 

 

 

두고두고 읽어야 할 책 가운데 하나.
다 읽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초록에는 이런 글들이 적혀있었다.

 

 

Ⅳ-28. 음험한 성격, 남자답지 못한 성격, 완고한 성격, 야수 같고, 가축 같고, 어린애 같고, 나태하고, 거짓되고, 야비하고, 장사꾼 같고, 폭군 같은 성격. (61-62)

 

Ⅴ-1. 아침에 일어나기 싫으면, “나는 인간으로서 일하기 위하여 일어난다.”고 생각하라. 그 때문에 내가 태어났고, 그 때문에 내가 세상에 나온 일을 하려는데 내가 아직도 불평을 한단 말인가? 아니면 나는 이불을 덮고 누운 채 몸이나 데우려고 만들어졌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즐거운걸.” 그렇다면 너는 쾌락을 위하여 태어났단 말인가? 간단히 말해, 네가 태어난 것은 느끼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행동하기 위해서인가? 너는 작은 식물들이, 참새들이, 개미들과 거미들과 꿀벌들이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며 우주를 구성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하거늘 너는 인간으로서 맡은 바 일들을 행하기를 거부하고 네 본성에 맞는 것을 향해 달려가지 않겠다는 것인가? “하지만 휴식도 필요하지요.” 그야 물론이지. 하지만 휴식에도 자연은 한계를 정해놓았다. 먹고 마시는 데 한계를 정해놓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고, 충분한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한데 행동에 있어서는 더 이상 그렇지가 못하고, 네 능력에도 못 미치고 있다.
2)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너는 네 본성도, 네 본성의 의도도 사랑할 것이다. 자신의 기술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은 목욕도 않고 식사도 거르며 자신들의 일에 전력을 쏟고 있다. 하지만 네가 너 자신의 본성을 존중하는 것은, 청동 조각가가 청동상을, 무용수가 무용을, 수전노가 돈을, 허명을 좇는 자들이 허명을 존중하는 것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자들도 자신의 일에 열중할 때는 자신들이 마음 먹었던 일의 성사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寢食을 포기한다. 하거늘 너는 공동체를 위한 행동들이 더 하찮고, 노력할 만한 가치가 더 적다고 생각하는가? (71-72)

 

Ⅶ-74. 도움을 받는 데 지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자연에 맞는 행동이다. 그러니 너는 남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도움을 받는 데 지치지 마라. (126)

 

Ⅷ-59. 인간들은 서로를 위하여 태어났다. 그러니 가르치거나 아니면 참아라. (146)

 

Ⅹ-35. 건강한 눈은 보이는 것은 모두 보아야 하며 “나는 초록색만 원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눈병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청각과 후각은 들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듣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냄새 맡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건강한 위는, 마치 방아가 찧도록 되어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찧듯이, 음식물이면 무엇이든 소화해야 한다. 그와 같이 건전한 정신은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내 자식들은 안전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만인이 칭찬하게 해주소서!”라고 정신이 말한다면, 그 정신은 초록색만 반기는 눈이나 부드러운 것만 찾는 이빨과 같다. (180)

 

Ⅺ-29. 쓰기와 읽기는 네가 먼저 배우기 전에는 남을 가르칠 수 없다. (197)

 

Ⅻ-6. 도저히 해내지 못할 것 같은 것들도 연습하라. 많이 써보지 않아 다른 일에는 느린 왼손도 고삐는 오른손보다 더 단단히 잡는다. 왼손은 이 일을 익혀두었기 때문이다. (203)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02-15 1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문장이 많아서 예전에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골라서 필사를 한 적 있어요.

돌궐 2015-02-15 13:1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냥 너무 유명한 책이라 펼쳤다가 그 자리에서 굳은 것처럼 앉아서 읽었던 책입니다. 다시 한번 읽고 싶어요.

yamoo 2015-02-16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상록, 수상록, 엣세 등은 두고두고 읽을 책들인거 같아요~~~

인용해 주신 부분을 보니, 제가 엔날에 읽으면서 줄친 부분이 생각납니다. 겹치는 부분이 있어 반갑네요~!ㅎ

돌궐 2015-02-16 17:11   좋아요 0 | URL
저도 반갑네요.ㅎㅎ 올해는 그간 못읽었던 고전들을 천천히 읽어보려고 합니다.
 

 

 

 

어제 서점에서 경공술을 연마하다가 <어린 당나귀 곁에서>를 들춰 보았다.

근데 그게 실수였다. 이렇게 버젓이 시인의 친필이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서상비' 보법이 흐트러지면서 지면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친필 사인본이 겨우 3권 남아있던데 사지 않을 수 있는 방법과 명분이 내겐 없었다.

 

김사인 님의 따뜻한 마음과 삶의 일면을 엿볼 수 있던 시 두 편만 옮겨 본다.

 

바짝 붙어서다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12-13)

 

중과부적(衆寡不敵)


조카 학비 몇푼 거드니 아이들 등록금이 빠듯하다.
마을금고 이자는 이쪽 카드로 빌려 내고
이쪽은 저쪽 카드로 돌려 막는다. 막자
시골 노인들 팔순 오고 며칠 지나
관절염으로 장모 입원하신다. 다시
자동차세와 통신요금 내고
은행카드 대출할부금 막고 있는데
오래 고생하던 고모 부고 온다. 문상
마치고 막 들어서자
처남 부도나서 집 넘어갔다고
아내 운다.

 

'젓가락은 두자루, 펜은 한자루…… 중과부적!'

 

이라 적고 마치려는데,

다시 주차공간미확보 과태료 날아오고
치과 다녀온 딸아이가 이를 세개나 빼야 한다며 울상이다.
철렁하여 또 얼마냐 물으니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 성을 낸다.

(22-2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피북 2015-02-13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에서 연마하셨다는 경공술이 궁금하네요ㅎ 김사인 시인님이 이리 많은 분께 사랑받는 분인줄 몰랐어요 시가 우리네 삶속에 있어 저도 읽고 싶어요^~^

돌궐 2015-02-13 17:10   좋아요 0 | URL
네, 이 경공술은 자기네들을 사라고 손짓하고 애타게 부르짖는 책들을 회피하면서 돌아다니다 보면 저절로 연마가 됩니다.^^ 김사인 시인은 이곳 서재에서 듣고 찾아보다가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학창 시절에 한 여학생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당연히 누구인지 알고 보냈다. 해마다 있던 환경미화 때문에 여학생들 교실에 올라가 못질 해주다 알게 된 애니까. 등교 시간에 버스 정류장에서 매일 보던 건 덤이었고, 함께 혼성 합창부 활동을 했던 건 편지를 보내고 난 다음이므로 절대로 우연이다. 그러나 얼굴이 하얗고 아담한 키와 날씬한 몸매에 머리를 늘 두 갈래로 단정하게 땋고 다니던 그 애한테 편지를 보낸 건 분명히 내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당시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남들 눈에 잘 안 띄는(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그 조용한 아이가 같은 중학교를 나온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중학교 졸업 앨범을 발견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훑어보다가 뒷쪽 주소록에서 그 아이 주소를 '매의 눈'으로 찾아냈다. 그리고 친구 몰래 속으로 그 주소를 달달 외웠다. 기말고사 시작 1분 전에 필사적으로 영어 단어를 외우듯이. 달달.

 

그렇게 외워 온 주소를 집에 와서 경건한 마음으로 적어 두고는 아마도 얼마 뒤엔가 편지를 썼을 것이다. 정말 답장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냥 어린 마음에 객기를 부렸다고나 할까. 어차피 답장도 안 올건데 뭐, 이런 마음으로. 그래서인지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알고 지내는 친구인 양 별 시덥지도 않은 얘기를 편지에 썼었다. 같잖은 사랑 고백이나 되도 않는 허세를 다 빼고 그냥 내 일상과 간단한 소개 정도를 휘갈겨 썼던 것 같다. 글씨를 잘 쓰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좋아한다느니 만나고 싶다느니 하는 부담스럽고 낯간지러운 말 같은 건 정말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한 1주일 쯤 뒤인가 답장이 왔다.
지금도 그 순간이 기억난다. 엄마가 우편함에서 가져온 편지들 가운데 하나를 건네주며 "너한테 편지 왔다. 근데 걔 누구니?"하던 그 순간. 방에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어서 편지지를 꺼내 읽던 그 순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무겁지 않게 자기소개를 하는 편안한 편지였다. 그리고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왜 나한테 편지를 썼냐고 물어보더라. 여기서 냉큼 너를 좋아한다고 답장을 하면 안되는 거다. 그거야 말로 바보 같은 짓이다. 좋아하더라도 그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여자에겐 결정적인 순간이 필요한 것이다, 라고 나이 든 지금의 내가 말한다. 

 

#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서 도시 애덤스는 생판 모르는 줄리엣에게 편지를 보낸다. 한때 줄리엣의 소유였던 찰스 램의 책을 자기가 갖고 있으며, 이 작가가 마음에 드는데 책을 더 구할 수 없느냐고. 자기가 살고 있는 건지 섬은 책을 구하기가 어렵다면서 그는 찰스 램의 이야기를 빗대어 자기 소개를 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도시 첫 편지를 다시 읽는다면 찰스 램 이야기가 결국 도시와 건지 섬의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독일군 점령하에서도 저는 찰스 램 덕분에 웃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돼지구이에 관한 글이 압권이지요. 우리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도 독일군에게는 비밀로 해야 했던 돼지구이 때문에 탄생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찰스 램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성가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찰스 램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보다는 실례를 무릅쓰는 편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의 글을 읽다 보니 찰스 램과 친구가 된 것 같거든요. (19)

 

여기서 나는 도시가 '실례를 무릅쓰고' 줄리엣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찰스 램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건 내가 옛날 그 여자애한테 별 시덥지도 않은 얘기로 편지를 썼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찰스 램은 핑계였을 뿐이다. 근거는? 추신에 나와 있다.

 

추신. 제 친구 모저리 부인도 한때 당신의 것이던 소책자를 구입했답니다. 제목은 《불타는 떨기나무는 과연 존재했을까? 모세와 십계명을 위한 변론》이죠. 모저리 부인은 당신이 여백에 남긴 메모가 마음에 든다고 합니다. '신의 말씀? 아니면 군중통제의 수단?' 어느 쪽인지 결론이 났습니까? (19)

 

여기서 도시는 모저리 부인의 핑계를 대긴 했지만 자신도 역시 줄리엣의 메모가 마음에 든다고 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도시가 줄리엣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는 결국, 찰스 램을 읽는 사람이며 또 다른 책에다는 저런 의미심장한 메모를 남겼던 "당신을 알고 싶어요"가 아니었을까?


추신에 굳이 줄리엣이 남긴 글을 언급하면서 그 결론이 궁금하다고 한 것은 고도의 시네루(이런 말밖에는 생각이 안 나서 수준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였다. 물론 스스로 시네루를 준다고 생각하고 쓴 것은 아닐지라도, 결과적으로 그 편지는 엄청난 회전이 들어간 白球가 된 셈이다.

 

#
옛날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그 후로도 죽 편지를 교환했다. 음악 얘기도 했다. 나는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했고, 그 애는 헤비메탈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렇게 조용하고 공부도 잘 하는(전교 1등이었다) 여자애가 헤비메탈이라니! 난 그 의외성에 더욱 빠져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애가 말했던 임펠리테리(Impellitteri) 앨범부터 사서 듣기 시작했다. 임펠리테리 하면 보통 화려한 기타 속주로 잘 알려진 명연주곡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떠올리지만 난 1번과 2번 트랙 <Stand in Line>과 <Since You've Been Gone>을 가장 좋아했던 거 같다. 너무 들어서 테잎이 늘어질 때까지 들었다.

 

 

Impellitteri - <SInce You've Been Gone>

 

각설하고, 도시에게도 줄리엣은 의외였을 것이다. 그녀가 그저 책이나 더 구해주고 선심 좀 써서 찰스 램에 대한 추가 정보를 알려주는 정도의 기대에 걸맞은 사람이었을 뿐이라면 이렇게까지 편지 왕래가 계속될 일이 없었겠지. 나중에 줄리엣이 자기는 작가라는 걸 밝히고 건지 섬의 북클럽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고까지 하니 도시는 더더욱 놀랐을 것이다. 어쩌면 도시는 편지를 쓰면서 단순한 정보 이상의 뭔가를 더 기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모저리 부인 소유 책에 적힌 그녀의 필체를 통해 젊은 여성임을 간파했다든지, 아니면 막연한 대화 상대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왜 안 그렇겠나. 아무리 전쟁 뒤의 힘든 상황이지만 한창 혈기왕성한 남자 아닌가.

도시에게 보낸 첫 답장에서 줄리엣은 독서와 자신의 메모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그래서 제가 독서를 좋아하는 거예요.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죠. 실로 기하급수적인 진행이랄까요. 여기엔 가시적인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 (22)

추신. 모세에 관한 건 도무지 결론이 나질 않네요. 아직도 고민 중이랍니다. (23)

 

게다가 친절하게도 줄리엣은 《찰스 램 서간집》에 나오는 재미난 구절('술, 술, 술, 짠, 짠, 짠, 벌컥, 벌컥, 벌컥, 팽, 팽, 팽, 어질, 어질, 어질, 쾅! 난 결국 구제 불능이 되고야 말겠지. 이틀을 내리 술만 들이켜고 있으니. 내 도덕관념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신앙심도 희미해져가(원문: Buz, buz, buz, bum, bum, bum, wheeze, wheeze, wheeze, fen, fen, fen, tinky, tinky, tinky, cr'annch! I shall certainly come to be comdemned at last. I have been drinking too much for two days running. I find my moral sense in the last stage of a consumption and my religion getting faint)')까지 일부러 소개를 해주고, 돼지구이 만찬의 비밀과 감자껍질파이의 정체에 대해 질문까지 했으니 이제 쌍방향 교류의 전용선이 깔린 셈이다.

말하자면 도시의 "당신을 좀더 알고 싶어요"라는 물음에 줄리엣은 "저도 당신이 궁금해요"라고 화답한 것이다. 내 뜬금없는 편지에 망설이거나 얌전 빼지 않고 답장을 해 주었던 그때 그 아이처럼.

 

요즘에는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을 보내거나 특정 사이트에 접속해서 알고 지내는 사람(사실은 id)에게 쪽지를 보내거나 그들이 쓴 글에 덧글을 다는 것만으로 손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겨우 20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진 않았다. 겨우 pc통신만 몇 개 있었지 인터넷은 흔히 쓸 수 없었던 시대였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속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해 가장 요긴한 통신 수단은 '편지'였다. 그러고 보니 편지를 써 본 지도 너무나 오래 되었구나. 어쩌다가 이렇게 각박하게 살고 있는 건지.

 

#
도시가 줄리엣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는 돼지 구이 파티의 유례와 몇 가지 부탁, 그리고 1944년 <펀치>에 실린 만화에 대한 질문을 적었다. 그 가운데 엘리자베스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이후 엘리자베스는 거의 이 책의 중심인물로 부각된다. 독서회를 시작하게 된 것도,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결국 엘리자베스였다.

 

이건 짐작일 뿐이지만, 나는 도시가 엘리자베스를 사랑했으리라 생각한다. 그가 편지에 엘리자베스에 대해 쓴 내용들을 보면 그렇다. 책에서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아도 만일 내가 도시였다면 엘리자베스를 사랑했을 것 같고, 독일군 의무관이자 친구가 된 크리스티안과 엘리자베스가 서로 깊은 사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크게 절망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둘을 모두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속으로만 삭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나서서 엘리자베스의 딸 킷을 보살펴 온 사실이나(심지어 그는 줄리엣이 킷을 낳을 때 에번과 이솔라, 아멜리아와 함께 아이를 받는다) 뒤에 프랑스 여인 레미를 건지 섬으로 애써 데리고 와서 성심껏 보살핀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단순한 동정이나 측은지심이었다고 설명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크리스티안과 친구가 된 이후, 도시가 어느 날 엘리자베스와 크리스티안이 연인이란 걸 깨닫는 장면은 편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그 후로도 그는 종종 제가 물 나르는 걸 도와주었습니다. 일을 마친 후에는 담배를 권했고, 우리는 길거리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건지 섬의 아름다움이나 역사에 관해, 책이나 농장 일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지만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꺼내지 않았습니다. 늘 전쟁과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만 했지요. 한번은 우리 둘이 그렇게 서 있는데 엘리자베스가 자전거를 타고 이쪽으로 덜컹덜컹 달려오더군요. 그날 하루 종일 그리고 전날 밤도 거의 꼬박 새우며 간호 일을 한 터였고, 주민 대부분처럼 그녀의 옷도 옷이라기보다는 누더기에 가까웠어요. 그렇지만 크리스티안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그녀가 오는 걸 멍하니 바라보더군요. 엘리자베스가 가까이 다가와 섰습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표정을 본 저는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그제야 그 둘이 아는 사이라는 걸 알아챈 겁니다. (158)

 

마음은 찢어지게 아팠겠지만 그는 기꺼이 두 사람을 축복했으리라 본다. 건지 섬에 온 줄리엣이 도시한테 크리스티안에 대해 물었을 때 대답한 말에서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상상하는 독일인과 비슷할 거예요. 키가 크고 금발이고 눈동자는 푸른색인, 다만 그는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지요(원문: He looked like the German you imagine - tall, blond hair, blue eyes - except he could feel pain). (256)

 

'고통을 느낄 줄 아는' 크리스티안이었기 때문에 도시는 그를 엘리자베스의 연인으로 인정해줄 수 있었을 거다. 그리고 그들의 딸인 킷도 마치 자신의 딸인 양 사랑해 줄 수 있었겠지. 도시가 킷에 대해 쓴 글을 보자.

 

킷이 엘리자베스를 많이 닮은 건 아니지만 회색 눈동자와 집중할 때의 표정만은 쏙 빼닮았어요. 무엇보다도 엘리자베스의 심성을 그대로 이어받았지요. 감정이 아주 격렬해요. 거의 젖먹이 시절부터 그랬습니다. 킷이 악을 쓰면 창유리가 흔들리고, 그 조그만 손으로 제 손가락을 움켜잡으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지요. 저는 아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엘리자베스가 가르쳐주었습니다. 저더러 천생 아빠가 될 운명이라며, 자신은 제가 아이들의 성장에 대해 더 많이 알게 할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크리스티안을 많이 그리워했습니다. 그건 자신 때문만이 아니라 킷을 위해서기도 했습니다. (198)

 

나만 그런 건지 몰라도, 이 정도면 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숨겨왔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차마 말하지 못하는, 그리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남자의 쓸쓸한 심정을 나는 저 담담한 글 속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심정은 글로 적혀 있기에 읽히는 게 아니라 글 속에 숨겨진 진실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에 읽히는 것이다.

 

#
레미 지로가 건지 섬의 북클럽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다. 다만 레미가 등장한 이후 도시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짐작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곧바로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도시가 줄리엣에게 이제 막 품기 시작한 감정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도시와 줄리엣의 감정이 무르익어 가려던 결정적 순간에 때마침 건지 섬을 방문한 마크가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줄리엣을 부르고, 도시는 망연히 마크와 줄리엣이 키스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도시는 여행가방 빌려줘서 고맙다는 얼척 없는 말을 남긴 채 서둘러 그곳을 떠난다.
캐릭터를 가만히 놔두지 말라는 소설작법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여기서 여자들은 "안 돼~~~!" 라고 할 것이며, 남자들은 "이런 제기랄! 이 자식은 왜 하필 지금 온 거야?"라고들 하겠지.


하지만 여기서 도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자기는 줄리엣에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마크란 놈은 한 눈에 보기에도 타고난 외모와 엄청난 재력을 지닌 사람인 것 같았을 텐데. 도시가 크리스티안이나 마크와 같은 매력적인 남자들에게 느낀 열등감은 줄리엣이 섬으로 오기 전 보냈던 1946년 4월 2일 편지에 여실히 드러난다. 그나마 도시의 감정이 확실하게 나타나는 문장이다.

 

건지 섬에 멀쩡한 남자는 별로 없었고, 재미있는 남자는 아예 없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지치고 초라하고 수심 가득하며, 남루하고 신발도 없이 더러웠습니다. 우리는 패배자였고, 그렇게 보였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하기엔 시간도 돈도 에너지도 없었지요. 건지 섬 남자들은 매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 병사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제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키 크고 금발에 잘생기고 피부는 구릿빛이었습니다. 흡사 신의 이미지였지요. 그들은 화려한 파티를 열고 명랑하게 열성적으로 어울렸으며, 차가 있고 돈도 있고 밤새 춤을 출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사와 데이트하는 아가씨들 중 일부가 아버지에게는 담배를, 가족에게는 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파티에서 돌아올 때면 롤빵, 파이, 과일, 완자, 젤리 등을 핸드백에 담아 집으로 가져왔고 그 가족은 다음 날 진수성찬을 만끽할 수 있었어요. (147-148)

 

도시는 또 다시 절망을 느꼈을 게 분명하다. 모르긴 몰라도 이제 엘리자베스를 잊고 새로 시작해 보려는데 어디선가 또 훤칠한(하지만 크리스티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녀석이 나타나서 그녀를 나꿔채 갔으니 오죽 했을까. 과연 이런 게 자기 운명이려니 하면서 크게 낙담했을 법하다. 문득 건지 섬에 온 레미가 북클럽에서 '운명 예정설' 토론 중에 했던 말이 생각난다.

 

"만약 운명이 예정된 것이라면, 신은 악마입니다." (374)

 

도시는 레이가 겪었던 끔찍한 불행과 비극에 견준다면 자신의 이 사소하고 개인적 불행은 아무 것도 아니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전쟁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충격과 참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레미의 저 짧은 말로도 충분히 대변된다.
도시는 그런 레미를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게다가 줄리엣은 애초부터 자기와 맞지 않는, 접근도 불가능한 존재였을 뿐이며 한때 흔들렸던 마음은 이제 정리해야 한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자조적인 마음을 둔감한 줄리엣은 알아채지 못하고 소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나 썼다.

 

도시에 대한 너의 질문들은 방향을 잘못 잡았어. 킷한테 가야 한다고. 아니면 레미나. 요즘은 도시를 거의 만나지 못할뿐더러 아주 가끔 마주칠 때도 그 남자는 당췌 말이 없어. 그것도 로체스터(《제인 에어》의 남자 주인공)처럼 로맨틱하게 생각에 잠겨 침묵하는 게 아니고, 반감을 표하는 근엄하고 냉정한 침묵이야. 뭐가 문젠지 모르겠어. 정말 몰라. 처음 건지 섬에 왔을 때 도시는 내 친구였어. 함께 찰스 램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섬 여기저기를 산책했지. 나는 누구보다도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가장 즐거웠어. 그런데 해안 절벽에서의 그 끔찍한 밤 이후로 그가 입을 다물어버렸어. 어쨌든 나한테는 말을 걸지 않는다고. 지독하게 실망스러운 일이지. 서로 마음이 통하던 그 감정이 그립지만, 그 감정 역시 처음부터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어. (353)

 

도시가 왜 그렇게 근엄하고 냉정한 침묵을 지켰겠는가. 별 다섯 개 주려고 리뷰까지 쓰고 있는 소설책의 여주인공한테 할 만한 얘긴 아니지만, 정말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여자다.

 

#
이 책에서 도시가 줄리엣에게 쓴 편지는 사실 몇 편 안된다. 그 외에는 줄리엣이 서술한 도시나 다른 사람들이 도시에 대해 얘기한 내용들로 그의 상황과 마음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도시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문장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편지를 보내는 남자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레미를 만나러 프랑스로 갔을 때 도시는 줄리엣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쓴다. 그건 심지어 마크와 줄리엣이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난 이후다. 편지를 쓰면서 도시가 느꼈을 복잡한 심정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그 편지는 줄리엣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던 마지막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후의 줄거리는 생략한다. 이건 책 줄거리 소개가 아닌 한 등장인물에 관한 고찰이므로 거기에 집중하는 게 나을 성싶다. 나는 변죽만 울리는 편지글들 속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도시 애덤스의 감정을 짐작해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걸 유추할 수 있을 만한 개인적 경험이 마침 책을 읽으면서 기억났기 때문에 서평이랍시고 끄적여 보았다.

 

들은 얘긴데, 이 소설이 곧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엘리자베스와 줄리엣에 누가 캐스팅될 것인가 궁금하겠지만 난 그들보다 도시 역할로 누가 선정될까, 그리고 이 남자의 모습은 영화에서 어떻게 표현될지가 더 궁금하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5-02-12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테라, 메탈리카도 아니고 임펠리티면 그당시 웬만한 건 다 섭렵했다는 건데ㅎ
정신분석적으로 편지 등의 욕망에 대한 분석글들 읽으면 정말 인간의 모든 것이 와장창하는 기분이 들더군요.
저는 알라딘 서재도 건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쟁과 떨어져 있는 모습이 아름답기도, 서글프기도 하고 그래요

돌궐 2015-02-12 23:29   좋아요 0 | URL
그랬죠. 그 아인 그랜드마스터급 메탈덕후였어요. 물론 팝도 많이 들었구요. 나중에 신촌 모롹카페에서 같이 헤드뱅잉도 했어요.ㅋㅋㅋ
와장창하는 정신분석은 언제 한 번 소개해 주세요. 재밌을 거 같아요.
음... 알라딘 서재가 건지라는 말씀은 의미심장 하군요.^^ 그럼 Agalma 님의 줄리엣은 어디에 계실까요?

AgalmA 2015-02-12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일을 다시 시작해서 서재리뷰 올리기가 쉽진 않을 거 같지만 줄리엣 다리도 다 사라지고 구두만 남기 전에 차곡차곡 걸어가려 합니다. 만날 것이 꼭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요...허헛;

돌궐 2015-02-12 23:59   좋아요 1 | URL
줄리엣 다리는 사라지고 구두만 남았네. - 난해한 시를 읽는 거 같습니다.ㅎㅎ
리뷰는 저 죽기 전에만 천천히 해 주세요.ㅋ

다락방 2015-02-24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정성스런 리뷰를 읽으니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케이트 윈슬렛`이 나온다고 들은것 같은데, 어떤 역할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돌궐님.

돌궐 2015-02-24 12:5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다락방 님, 덕분에 본문 읽다가 잘못 쓴 거 하나 고쳤네요.^^; 감사합니다.
2번 트랙은 <Since You`ve Been Gone>이었습니다. 이 노래도 참 좋아요.
내친김에 동영상도 바꿧어요. 리뷰에도 어울리는 거 같아서..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