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 룰라 자서전
데니지 파라나 인터뷰.엮음 , 조일아 외 옮김 / 바다출판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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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당선자 단병호씨의 얼굴엔 오랜 세월 건설노동자로 살아 왔던 삶의 흔적이 뚜렷하게 각인돼 있다. 그는 붉은 머리띠를 풀고 오는 6월 국회에 등원하게 된다. 룰라 역시 단씨처럼 평생 노동자와 노동운동가의 길을 걸어 왔고, 마침내 집권에 성공했다. 민주노동당은 자신들의 미래를 브라질 노동자당(PT)이 앞서서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룰라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기록한 그의 자서전이다. 룰라의 언론자문 담당이었던 저자는 룰라 및 그의 가족·동료들과 만나 ‘대통령’이 아닌 여전히 ‘금속노동자’일 뿐인 한 사내의 삶을 재현해내고 있다. 룰라의 대통령 당선 이후 그와 PT에 관한 숱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 책은 그중 가장 정확한 전기로 공인받고 있다. 한 노동자의 역정만이 아니라 그가 살아 왔던 격동의 브라질 현대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룰라는 1945년 브라질의 한 빈민촌에서 가난한 농부의 일곱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열다섯살에 기술 선반공 자격증 과정에 들어가 금속공장 작업기사로 노동자의 삶에 들어서게 된다. 노동자 룰라의 삶은 60∼70년대 한국 노동자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고백을 보자. “그 순간 프레스가 내리꽂히며 내 손가락 하나를 짓눌렀다. 나는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새벽부터 아침 6시까지 사장이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사장이 와야 병원이라도 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의사는 내 손가락을 진찰한 후 일부를 잘라냈다…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 하나를 잃거나 일부를 잃은 채 살아갔다.”

룰라의 삶에서 가장 극적인 변신은 열혈 노조지도자에서 정치인이 됐을 때다. 1980년 룰라를 비롯한 노조운동가와 진보인사들은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할 정당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PT를 출범시킨다. PT는 브라질의 기존 정치세력에 도전하면서 정치판도를 완전히 뒤바꿔놨다. 룰라는 네번의 대선 도전 끝에 2002년 10월 대통령에 당선된다. PT를 창당한 지 22년만의 일이었다. 그는 “브라질 국민 누구도 세끼 밥을 굶게 하지는 않겠다”는 ‘기아와의 전쟁’을 주요 정책목표로 내세워 브라질을 가난과 궁핍에서 구제해내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진출함으로써 한국 정치에서도 본격적인 ‘진보정치’의 시대가 열렸다.파업과 투쟁으로 일관했던 노동운동은 이제 원내에서 ‘정책’으로 보수정당들과 맞서게 됐다. PT는 집권에 이르기까지 22년이 걸렸다.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에 대해 언론은 연일 희망과 불안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진보세력의 원내 진출로 한국 정치는 과연 어떻게 달라질까. 진보정치가 가져올 미래에 대해 알기 위해선 먼저 룰라를 읽는 것이 나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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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타작 - 도저한 작가 정신을 위하여, 김병익 비평집
김병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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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시오도스의 역사구분은 다분히 과거적이다. 그가 말하는 ‘황금시대’는 이미 사라진 저편의 시대다. 김병익의 <기억의 타작>을 읽으며, 나는 그가 황금시대의 전설과 영웅담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회고하는 시대는 내 과거의 흔적들과 겹쳐지며, 존재하지도 않았던 옛 황금시대를 회억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글은 분석적 비평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에도, 슬프고 안타깝다. 
 

슬프고 안타까운 까닭은 황금시대의 영웅들이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김현과 이청준, 홍성원, 박경리, 그리고 기형도까지. 앞의 세 명은 김병익에게 문학적 동지이자 삶의 반려와 같은 이들이었고, 뒤의 두명 역시 그와 함께 문학의 위의를 함께 누렸던 동시대인이었던 것. 나는 이들의 새로운 글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과 살아있는 김병익의 글 역시 앞으로 읽을 수 있는 날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슬프다. 교보에서 사서 지하철 구석에서, 술기운으로 더듬더듬 읽으며, 문득문득, 서글퍼진 것도 그 때문. 
 

다음과 같은 기형도에 대한 김현의 글 ; "그러나,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 버릴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 그의 사진을 보거나 그의 초상을 보고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때, 무서워라. 그때에 그는 정말 없음의 세계에 들어간다. 그 없음의 세계에서 그는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 완전한 사라짐이 사실은 세계를 지탱할 힘일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명민한 글쟁이들이 다 사라지고 없을 때, 내 젊음의 한때를 장악했던 글쟁이들이 사라지고 없을때, 나는 과연 무엇을 읽어 살아갈만한 힘을 얻을 것인가.
 

<기억의 타작>에 실린 김병익의 글들은, 그래서, 축축하다. 그 축축함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추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늙음의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리적으로 김병익이 늙었다는 것만이 아니라(그는 1938년 생, 현재 70세가 넘었다), 늙어서 사람의 살림살이에 대해 더 넉넉하고 이해충만한 시각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박완서에게 “원숙한 세계인식과 중후한 감수성, 이것들에 따르는 지혜와 관용”을 말할 때, 그의 눈은 부드럽게 열려 있다. 나는 이 부드러움과 열림을 오랫동안 짝사랑해왔다
 

그의 문학적 보수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는 문지적 자유주의를 이루는 뼈대다. “진보주의에 대한 이같은 조건적 수용태도가 문지동인들의 이념적 한계이지만 동시에 지적인 신중성이 될 것이고 태도에서는 보수주의이지만 정신에서는 개방적 진보주의를 이루고 있었으며 과격주의의 이념을 회피하면서 실제적 진보를 추구하고 있었다.” 이같은 진술은 문지의 네명 중 바로, 김병익 자신을 겨냥한 것이다. 그것은 김병익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지적 자유주의가 보여주는 포용력의 깊이와 넓이다. 이만한 자유주의, 알다시피, 찾을 수 없고, 보기 어렵다. 그의 자유주의가 한국의 주류 자유주의가 되지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깝고 아쉬운 대목이다. 
 

나는 그가 <들린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유주의에 대한 <열림과 일굼>으로, <전망을 위한 성찰>을 해내며 <숨은 진실과 문학>을 캐고, <부드러움의 힘>을 신뢰했던 비평가로 기억하고 읽는다. 백낙청의 글은 논리적으로 수긍할 수 있어도, 마음을 주지는 못했다. 나는 그의 느릿한 걸음걸이와 줄담배와 낮은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의 풍모는 글에서도 약여하다. 대입고사를 치르기 위해 상경했던 내 가방 속에서 김병익의 <전망을 위한 성찰>이 있었다. 그 뒤로도, 그는, 나 혼자만의, 그 몰래, 마음의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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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1-20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간혹 들춰보는 비평집이 김병익의 책인데요.
님처럼 많은 추억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문학의 중요한 정신이라 생각해서 그의 비평을 읽었답니다.
개인적으론 김주연의 비평을 더 좋아하구요.
 
36.5℃ 인간의 경제학 - 경제 행위 뒤에 숨겨진 인간의 심리 탐구
이준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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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엠비시대가 되면서 내가 새삼 알게 된 최대의 지적 즐거움 중 두가지는 이준구 교수와 이상돈 교수를 알게 되었다는 것일 터이다. 이준구 교수의 정밀한 경제학적 논리를 발견한 것, 그리고 이상돈을 통해 김일영 이후 가장 탄탄한 보수의 논리를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나는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준구의 이 책은 <쿠오바디스 한국경제> 외에 따로 쓰여진 행태경제학에 관한 책. 대학시절 경제원론이나 미시경제학을 배우면서 뜨악했던 “시장에서 합리적 행위를 한다고 가정할 때”, “완전경쟁시장이라고 가정할 때”의 그 가정에 내가 왜 동의하지 못했던가를 그는 요령있게 설명해낸다. 일종의 행태경제학 입문서인 셈인데, 내게는 경제학의 후진성을 새삼 발견하게 된 계기였다. 그 후진성이란 다름아닌 경제행위를 해나가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  

오래전부터 반복적으로 되뇌이던 우연성, 돌발성, 비합리성과 같은 ‘삶의 논리’를 경제학은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던 것. 베트콩 한명을 죽이는데 드는 비용계산을 통해 베트남 전쟁의 경제학을 ‘계산’하는데 바빴던 60년대 미국경제학자들의 ‘차가운 가슴’에 대한 정운영의 비아냥이 생각나는 대목. 경제학적으로 계산되지 않는 전쟁에서 온몸을 기투하는 베트남 민중의 저항을 미국 경제학자들이 어떻게 ‘계산’할 수 있었으랴. 행태경제학의 개념들 중 기억나는 것, 휴리스틱(heuristic), 그는 ‘주먹구구’로 번역하고 있는데, 과연, 주식시장을 보건대 주먹구구란 얼마나 생산적인가. 경제학은 수학에서 이제 심리학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 같다. 유쾌하고 즐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은 책. 그리고 경제학자의 문장이 이렇게 탄탄하고 쉽고 재미있을 수 있구나하는 새삼스런 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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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에 나온 14권의 책 중 내가 읽은 것은 8권이다. <죄와 벌>, <전환시대의 논리>, <공산당 선언>, <대위의 딸>, <광장>, <사기>,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그리고 <역사란 무엇인가>. 읽었으되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은 <대위의 딸>. 아마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의 하나로 읽었던 듯한 데, 그게 중학시절인지 고교시절인지 모르겠다. <인구론>, <맹자>,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종의 기원>, <유한계급론>, <진보와 빈곤>은, 장정일의 어법을 빌면,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책”이다. 읽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내게 세상에 없는 책이다. 맬더스, 다윈, 베블렌, 조지의 책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지만, 그리고 아마도 이들 책에 관한 2차 문헌들은 보기도 했을 것이나, 정작 책을 읽는 수고로움을 들이지는 못했다. 솔제니친은 <암병동>을 겨우겨우 읽어냈을 뿐이다. 유시민의 독서편력에는 못 미치나 대략 평균수준은 되는 셈이다. 

 유시민은 스스로 ‘지식소매상’임을 자처하고 있는데, 그건 지식세계와 대중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겠다는 나름의 ‘나와바리’ 선언이다. 과연, 그는 복잡한 책의 미로를 매끄럽게 헤엄치며, 합리적 핵심을 요령있게 정리해낸다. 내가 그에게 질투를 느끼는 바도, 한권의 책을 뚝딱 요리해내는 그의 재기와 그걸 잘 담아 옮기고 있는 명료하고 간결한 문체다. 고전이 제기한 묵직한 주제들은 그의 손을 거쳐 현대 한국사회의 모더니티/포스트모더니티와 연관된 핵심 사안으로 부활한다. 지식소매상으로서의 솜씨도 바로 여기에서 특장을 발휘한다. 속도감 있는 문체, 책에서 한발짝 정도 더 나아간, 대중적 상식에 최대한 가까운 해석과 의미부여. 그래서 그는 근대적 교양인에 가깝다 

그래서 이 책은 유시민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책이다. 도스토옙스끼에게서 “선한 수단이라야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있다”를, 리영희 선생에게서 지식인의 임무를, 맑스에게서 자본주의 비판의 도덕적 근거를, 맬서스에게서 인종적 편견을, 푸시킨에게서 반동과 억압에 저항하는 힘을, 맹자에게서 도덕적 보수주의를, 최인훈에게서 서글픈 개인의 욕망을, 사마천에게서 권력의 비극적 존재방식을, 솔제니친에게서 인간의 존엄을 이끌어내는 과정은 자연스럽고, 유시민스럽다. 적자생존의 논리 속에 숨겨진 타자에게 대한 배려(다윈)를 읽어내거나, 베블렌에게서 개혁가로서의 곤혹스러운 자기모습을 대면하는 것도 한발짝 더 나아간 상식적 해석으로서 지극히 타당하다. 카타리나에게서 죽은 노무현의 흔적을 발견하고, 악의적 언론의 해악을 말하는 대목은 정치인 유시민의 현실적 면모와 겹친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재독하는 그가“인간 능력에 대한 믿음”을 말할 때, 그는 근대적 과제의 해결에 몰두하는 ‘근대적 지식인’이 된다.  

유시민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이 언제였던가. 어느날 선배가 전해줬던 <항소이유서>가 아니었을까.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네크라소프의 싯구. 유시민은 이 싯구의 인용내력을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건 다름아닌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한국어 번역본에 실린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의 서문에 나오는 인용구의 재인용이었던 것. 유시민이 네크라소프의 원본 시를 읽은 것은 아니라는 것, 네크라소프는 생소한 시인이었던 데다 그의 국내 번역본 시집에도 이 싯구는 없었다는 것. 노문학을 전공했던 영진에게 물었을때 그녀가 답하지 못했던 이유를 알만하다. 유시민의 섬세한 기억력이 놀라울 뿐.  

책으로 만난 유시민은 아마 <꺼꾸로 읽는 세계사>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영선의 책꽂이에서 읽었던가. 그건 네루의 <세계사편력>이 보여준 역사해석과 유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네루가 자기 딸에게 “교양으로서의 역사”를 들려주듯, 유시민은 교양 차원의 세계사를 해석하고, 중계했다. 그것의 연장선에서 선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논술강사 시절, 이 책을 '아해'들에게 읽히고 진보적 역사관을 심어주려 무던히 애썼던 기억이 난다. 그게 옳아서라기보다, 순전히 논술용 답안 작성을 위해.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은, 잡지 기사 읽듯 읽어치운 책. 케인즈가 주식투자의 귀재였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까지는 지식소매상이자 교양전수자로서의 유시민이다.  

<대한민국 개조론>은 참여정부의 참모들이 쓴 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이라 믿는다. 사회투자국가를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는 이 책은, 참여정부의 지향과 현실적 성취, 안병진이 ‘토플러주의’ 라고 비아냥댄 노무현/유시민의 미래전략을 명쾌하게 보여줬다. 이 책의 주장은 시장경제와 복지국가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데, ‘사회(적)자유주의’라는, 모순적 합성명사로 요약되는 전략 탓이다. 시장의 활력을 해치지 않으면서 복지문제를 해결해나가는 ‘현실주의적 책략’. 좌파로부터는 복지를 시장에 맡겼다는 비판을(가령, 이태수), 우파로부터는 ‘좌파 사회주의 정책’이라는 비판(조선일보를 비롯한 대다수 꼴통 우익들)을 받으며, 위태위태하게 서 있는 정책가 유시민의 면모를 읽어낼 수 있는 책이었다.    

이 위태로운 전략은 사실 한국사회의 ‘범진보/개혁진영’이 해낼 수 있는 현실적 정책의 최대치다. 부분적으로 현실화되었고, 대부분이 전략적 비전제시에 그쳤지만 실제로 가장 현실적이면서 많은 성취를 해낼 수 있는 전략이라고 믿는다. 유시민의 탁월한 점은 거대한 명분과 이념을 제거한 자리에서,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내는데 있다. 시장의 역설, 명분과 대의에 입각한 논리가 가져오는 거대한 '반역'을 그는 아주 잘 파악해낸다. 우리나라 ‘진보’의 문제는 ‘시장의 역설’을 보지 못한 채, 아니 외면한 채, 목청높여 노동자/서민을 말하는 데 있다. ‘계급 역투표’를 탓할 게 아니라, 왜 ‘앤서니 기든스’가 안나오는 지를 고민해야 한다. 말하자면, 유시민의 <대한민국 개조론>은 내게 노무현 노선에 대한 주석이었던 것. 그는 왜 장관에서 퇴임한 이후에야 이런 책을 써냈나. 그랬다면, 내가 가졌던 한 3-4년의 오해도 달라졌을 것인데.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정책가 유시민은 다시 한번 정치철학적인 질문, 국가의 존재이유와 역할이라는 주제로 돌아가 한층 성찰적이 된다. 헌법에 대한 ‘상식적 해석’과 ‘실천적 함의’를 읽어내고, 엠비시대가 어떻게 헌법적 가치를 위반하는 지를 살피는 것. 유시민은 엠비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내가 가진 혼돈과 고민을, ‘일반 민주주의’ 수준의 지향과 가치로, 거두절미, 뚝딱뚝딱 싹 정리해낸다. 왜 어째서 악인지 아닌지, 유시민은, 진중권처럼 ‘메롱 전략’을 취하지 않고도, 충분히 진지하게 나를 설득한다. 그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제학 카페>는 몇 장만을 넘긴 채 아직 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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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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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덕분에 다시 읽다. 19세기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낭만적 열정에 불타는 주인공들. 현대적 감각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순진한 열정에 사로잡힌 자들. 이사야 벌린이 말하는 '낭만주의 혁명' 이후의 인간, 합리적 이성을 거슬러 영원한 현재를 사는 근대인.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이거나 스탕달 소설의 주인공과 유사한 기질의 소유자들. 얘네들은 왜들 그리 눈물을 자주 흘리고, 절망하고, 감격하고, 신열에 들뜨는지? 개체발생이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계통발생의 ‘감정적 유년기’, 사춘기적 열정이 근대 낭만주의자들의 멘털리티인가? 

 푸가초프는 귀족적 아우라를 벗어 제낀 모험심 가득한 반항아의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푸시킨의 시선은 그에게 듬뿍 애정을 담고 있다. 내부의 존재이면서 외부자에 대해 보이는 이해와 은근한 동류의식. 말하자면, 푸시킨의 반봉건적 정치의식의 우회적 표현이자 이 소설의 정치소설적 독해를 가능하게 하는 대목. 유시민이 주목하는 것도 역시 이 대목. 짜르 시대 러시아의 폭압성과 모순, 근대혁명의 당위성을 숨기고 있는 정치적 텍스트로서 기능. 러시아의 주변인이자 외부자인 까자끄들의 재현방식, 반문명적이고 제정러시아 체제에 도전하는 불온한 존재들. 러시아 소설에서 이들은 늘 그렇게 그려지지 않았던가.

 

구원으로 등장하는 에카테리나 여제, 마조흐의 소설과는 정반대로 그려지는 인자한 군주이자 할머니. 아마도 검열을 피하기 위한 장치이겠으나 어색하게 보이는 것은 근대소설의 ‘내적 필연성’을 거스른 우연성이기 때문. 구원은 밑바닥 민중으로부터가 아니라, 저 높은 곳의 위대한 군주로부터 하강한다? 표층의 체제내적, 심층의 반체제적임을 가르는 경계선이겠지.

 

다시 읽어보니 서사는 새롭되 분위기는 어렴풋하게 기억, 안방 벽에 걸려 있던 ‘이발소 그림’과 그 속의 시구 역시 푸시킨이 아니었던가. “삶이 그대를 속일 지라도”의 바로 그 ‘삶’이라는 단어가 내게 풍기던 묘한 공포와 추상의 질감, 그건 내가 알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저편에 존재하는, 깊은 우물속의 그 무엇과도 같았던 것. 그걸 알지 못하는 한 내 유년은 영원할 것 같다는 불안에 시달렸던 것. 그러나, 푸시킨 시구가 거기 걸려있게 된 내력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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