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타작 - 도저한 작가 정신을 위하여, 김병익 비평집
김병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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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시오도스의 역사구분은 다분히 과거적이다. 그가 말하는 ‘황금시대’는 이미 사라진 저편의 시대다. 김병익의 <기억의 타작>을 읽으며, 나는 그가 황금시대의 전설과 영웅담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회고하는 시대는 내 과거의 흔적들과 겹쳐지며, 존재하지도 않았던 옛 황금시대를 회억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글은 분석적 비평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에도, 슬프고 안타깝다. 
 

슬프고 안타까운 까닭은 황금시대의 영웅들이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김현과 이청준, 홍성원, 박경리, 그리고 기형도까지. 앞의 세 명은 김병익에게 문학적 동지이자 삶의 반려와 같은 이들이었고, 뒤의 두명 역시 그와 함께 문학의 위의를 함께 누렸던 동시대인이었던 것. 나는 이들의 새로운 글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과 살아있는 김병익의 글 역시 앞으로 읽을 수 있는 날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슬프다. 교보에서 사서 지하철 구석에서, 술기운으로 더듬더듬 읽으며, 문득문득, 서글퍼진 것도 그 때문. 
 

다음과 같은 기형도에 대한 김현의 글 ; "그러나,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 버릴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 그의 사진을 보거나 그의 초상을 보고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때, 무서워라. 그때에 그는 정말 없음의 세계에 들어간다. 그 없음의 세계에서 그는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 완전한 사라짐이 사실은 세계를 지탱할 힘일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명민한 글쟁이들이 다 사라지고 없을 때, 내 젊음의 한때를 장악했던 글쟁이들이 사라지고 없을때, 나는 과연 무엇을 읽어 살아갈만한 힘을 얻을 것인가.
 

<기억의 타작>에 실린 김병익의 글들은, 그래서, 축축하다. 그 축축함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추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늙음의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리적으로 김병익이 늙었다는 것만이 아니라(그는 1938년 생, 현재 70세가 넘었다), 늙어서 사람의 살림살이에 대해 더 넉넉하고 이해충만한 시각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박완서에게 “원숙한 세계인식과 중후한 감수성, 이것들에 따르는 지혜와 관용”을 말할 때, 그의 눈은 부드럽게 열려 있다. 나는 이 부드러움과 열림을 오랫동안 짝사랑해왔다
 

그의 문학적 보수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는 문지적 자유주의를 이루는 뼈대다. “진보주의에 대한 이같은 조건적 수용태도가 문지동인들의 이념적 한계이지만 동시에 지적인 신중성이 될 것이고 태도에서는 보수주의이지만 정신에서는 개방적 진보주의를 이루고 있었으며 과격주의의 이념을 회피하면서 실제적 진보를 추구하고 있었다.” 이같은 진술은 문지의 네명 중 바로, 김병익 자신을 겨냥한 것이다. 그것은 김병익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지적 자유주의가 보여주는 포용력의 깊이와 넓이다. 이만한 자유주의, 알다시피, 찾을 수 없고, 보기 어렵다. 그의 자유주의가 한국의 주류 자유주의가 되지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깝고 아쉬운 대목이다. 
 

나는 그가 <들린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유주의에 대한 <열림과 일굼>으로, <전망을 위한 성찰>을 해내며 <숨은 진실과 문학>을 캐고, <부드러움의 힘>을 신뢰했던 비평가로 기억하고 읽는다. 백낙청의 글은 논리적으로 수긍할 수 있어도, 마음을 주지는 못했다. 나는 그의 느릿한 걸음걸이와 줄담배와 낮은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의 풍모는 글에서도 약여하다. 대입고사를 치르기 위해 상경했던 내 가방 속에서 김병익의 <전망을 위한 성찰>이 있었다. 그 뒤로도, 그는, 나 혼자만의, 그 몰래, 마음의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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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1-20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간혹 들춰보는 비평집이 김병익의 책인데요.
님처럼 많은 추억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문학의 중요한 정신이라 생각해서 그의 비평을 읽었답니다.
개인적으론 김주연의 비평을 더 좋아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