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의 미소 - 노성두의 종교미술 이야기
노성두 지음 / 아트북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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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미술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성화’(聖畵)들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나 최후의 만찬, 수태고지 등을 그린 그림들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성화들은 성서의 내용을 토대로 그려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그림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은 마치 성경을 정독하는 것과 같은 지루한 경험이다. 종교미술은 성경의 알레고리에서 출발한다. 종교가 미술의 출발이라는 점은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전통 미술의 명작들로 알려진 것들은 많은 경우 불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소장 미술사학자 노성두씨는 성경의 내용을 다룬 회화를 찾아 한권의 책을 펴냈다. 그는 “옛 미술가들은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몸을 씻고 마음을 닦았다고 한다. 그리고 삶의 숫돌에 예술의 영혼을 단련했다. 종교미술에 관한 글을 쓰면서 나의 발걸음도 그들의 성스러운 여정의 그림자를 뒤쫓았다”라고 털어놓고 있다. 그가 이런 ‘순례’를 통해 성화를 깊고 섬세한 눈으로 읽고 나서 써낸 ‘성화의 미소’는 우리를 종교미술의 한가운데로 안내한다.

서양 고미술사와 중세미술사를 연구하는 그는 미술과 신학·인문학을 넘나들며 성화의 세계를 깊고 풍부하게 해석해낸다. 성화가 성서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낸 것처럼 그 역시 성서의 이야기 순서를 따르고 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시작해 노아의 방주, 바벨탑 등 구약성서에 담긴 내용들과 예수탄생, 이집트로 떠나는 성가족, 막달라 마리아, 최후의 심판 등 신약성서의 주제들을 담고 있다. 샤르트르의 장미창, 중세시대의 필사화, 모자이크 미술, 목판화 등을 배경으로 한 성화이론도 책의 한부분을 차지하는 내용들이다. 물론 저자의 관심은 성서의 주제들이 아니라 그것을 화폭에 담아낸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이다. 그가 여기서 담고 있는 성서 이야기는 모두 34개다.

그림 한점 한점을 해석하는 저자의 솜씨는 미술사라는 전공영역을 훌쩍 뛰어넘는다. 노아의 방주를 다룬 장에서는 한글판 공동번역 성서만이 아니라 독일의 루터 성경, 라틴 성서와 이탈리아 성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과 그리스 신화까지 동원된다. 성서마다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노아의 방주는 시대나 나라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도 초기에는 두 다리에 각각 못이 박혀 있었지만 나중에는 두 발을 겹쳐 모아 못 한대를 친 것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십자가의 못 세개는 육체와 정신·영혼의 세 고통을 상징한다.

이 책은 성화라는 종교미술을 통해 서양 미술의 원류를 탐사한다. 그것은 기독교 문명을 토대로 이뤄진 서구 문명의 근원을 캐는 작업이기도 하다. 매끄럽고 구수한 입담을 가진 저자는 뛰어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유럽 미술관을 돌아보려는 배낭 여행객이라면 이 책을 읽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자신들의 여행이 더욱 풍성해지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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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렉 버렌트 외 지음, 공경희 옮김 / 해냄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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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고민을 토로한다. 그녀가 만나는 남자는 출장이 잦을 만큼 무척 바쁜 사람이다. 일 때문에 전화연락이 안될 때도 많다. 그녀는 일로 ‘성공한 남자’를 만나려면 그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연애는 어떻게 될까? 그녀의 고민을 들은 그렉 버렌트는 “바쁘다는 말은 개똥 같은 단어이며, 나쁜 자식들이 애용하는 말”이라며 “그럴 듯한 구실같아 보이지만 결국 전화할 마음조차 없는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고 단호하게 충고한다. 요컨대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으니 싹 정리하고 다른 남자를 찾으라는 얘기다.

그렉 버렌트는 정신과 전문의나 심리상담 전문가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전세계 남녀들의 연애심리 교과서’로 불리는 미국의 인기 시트콤 ‘섹스 & 시티’의 스토리 컨설턴트다. 그가 이 프로그램의 책임 작가인 리즈 투칠로와 함께 쓴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연애하는 여성들에게 ‘착각에서 벗어나는 길’을 안내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베스트셀러로 자리를 굳힌 지 오래며 유럽·캐나다에서도 수만부가 팔린 책이다.

‘섹스 & 시티’의 소재가 됐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쓰인 이 책은 따분한 심리교과서와는 사뭇 다르다. 연애의 달인이었던 버렌트의 ‘경험’과 51명의 ‘고민녀’들의 사례가 풍부하게 제시돼 있는 게 특징이다. 남자 혹은 여자를 사로잡는 법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라 감성적이게 마련인 연애하는 여성들이 헷갈리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다는 게 이 책의 독특한 점이다. 버렌트의 말을 빌리자면 “당신에게 맘이 없는 남자는 그만 정리하고, 이제 당신만을 바라보는, 그래서 어찌할 바 모르고 애닳아 하는 남자를 찾아나서라”는 얘기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몇가지 에피소드를 보자. 한번 데이트하고 함께 밤을 보낸 남자가 2주가 지나도록 전화하지 않을 경우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가 무척 바빠서 전화번호를 잃어버렸을지 모르니 내가 먼저 전화한다? 천만의 말씀. 정답은 “그가 나한테 반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리고, 내 삶을 꿋꿋이 살아간다”이다. 남자를 만난지 한달쯤 됐고 섹스도 좋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섹스가 중단되고 함께 포옹만 하고 밤을 지새운다? 여자는 남자가 “그가 나를 진짜로 사랑하게 돼서 겁내고 있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하지만 그 역시 착각이다. 남자가 진짜 반했다면 그런 두려움 따윈 없다.

유부남과 연애하고 있는 한 여성은 자신은 “사랑의 감정을 누릴 자격이 있다”며 “내 경우는 전형적인 외도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버렌트는 “그가 아내와 헤어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저 유부남의 바람 상대에 불과했던 것”이라고 충고한다. 5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가 결혼얘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됐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당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준비된 남자’란 세계 어디에도 없다.

이 책은 세계 어디서나 연애의 존재방식은 유사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서 고민하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마음 졸이는 감정이야 어딘들 다르겠는가.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아는 것, 연애는 거기서 출발한다는 게 이 책의 메시지다. 한국 남자들은 대체로 감정 표현에 서툴고 무덤덤한 연애를 하는 편이다. 버렌트의 충고를 따르자면, 이랬다가는 여성들에게 딱지 맞기 십상이다. 여성에게 남자의 연애심리를 알려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지만 남자들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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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헌법과 민주주의 - 폴리테이아 총서 3
로버트 달 지음, 박상훈, 박수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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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대통령은 재선 성공 직후 "미국 외교정책의 근간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산"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이 미국식 헌법과 민주주의 모델을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것을 뜻한다면 그건 '환상'에 불과하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의 입장에서 보자면 말이다. 그는 미국의 헌정체제가 현대 민주주의를 정초한 하나의 모델이라는 미국인들의 통념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미국의 헌정체제는 다른 나라에 수출하기에 적절치 않으며 “미국인들이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의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에도 미국은 이들 나라에 자신의 헌정체제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버트 달이 보기에 미국의 헌정체제는 심각하게 “비민주적”이다. 미국의 민주주의와 헌법체계를 이상적 모델로 생각해 왔던 많은 한국인들에게 이런 시각은 다소 놀라운 것이다. 더구나 한국은 미국 헌법을 모델로 헌법체계를 만든 나라가 아닌가. 지식인들과 언론들은 선진적인 민주주의를 말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미국을 거론하지 않았던가. 로버트 달이 주목받지 못하는 그저 그런 일개 학자라면 이런 주장은 별로 눈길을 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미국 주류 정치학계를 대표하는 원로 학자다.

이 책의 원제는 ‘미국의 헌법은 얼마나 민주적인가’다. 그가 비민주적이라 말하는 것들은 연방제, 양원제, 사법부의 법률심사권, 대통령 선거인단 등 사실상 미국 정치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거의 모든 것들이다. 이 제도들은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위대한 민주적 실험이었지만, 그 후 시대적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이제는 “낡은 모델”이 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미국이 초기에는 민주주의의 선진국이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민주주의의 제 3세계’가 됐다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 우리가 미국 정치체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미국 헌정체제의 비민주성은 ‘대표의 불비례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자유로운 정치참여에 의한 ‘다수 지배의 체제’다. 하지만 연방제 및 이에 기초한 양원제와 대통령 선거인단 등은 모두 유권자들의 평등한 대표성을 왜곡한다.

미국은 상원의원 선출에서 인구가 많고 적고 간에 모든 주에서 2명을 뽑을 만큼 ‘대표성’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헌법 개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미국의 헌법 개정은 상하 양원의 3분의 2가 찬성하거나 전체 주의 3분의 2 찬성을 통해 제안이 되고, 전체 주의 3분의 2의 승인 또는 상하 양원의 4분의 3이 동의해야 한다. 달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바람직한 변화는 아주 먼 미래에서조차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고 비관한다.

주목을 요하는 것은 미국 사법부가 과도한 법률심사권을 갖고 있다는 달의 비판이다.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연방대법관 9명중 5명이 미국인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린다. 한국 역시 지난 5월과 10월의 헌법재판소 위헌 판결을 통해 사법부의 막강한 ‘위력’을 실감한 바 있다. 선출되지 않은 사법권력이 사실상의 ‘입법권’을 행사하면서 대통령과 의회의 결정을 ‘판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이런 점을 들어 장문의 ‘서문’을 통해 헌재와 사법부의 권력을 비판하며 이를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지적한다. 이 책의 주장이 남의 나라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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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요에의 美 - 일본미술의 혼
고바야시 다다시 지음, 이세경 옮김 / 이다미디어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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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가 근대 일본의 풍속화인 우키요에(浮世繪)의 열광적 매니어였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알려져 있다. 모네·드가·로트레크 등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도 모두 우키요에에 흠뻑 빠져 있던 사람들이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 당시 일본 도자기를 감싼 싸구려 포장지로 쓰였던 우키요에가 모네에 의해 발견되면서 유럽에는 ‘자포니즘’(Japonism·일본주의)이 마치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우키요에가 한창 제작됐던 에도(江戶)시대(1603∼1867)에 조선통신사 일행이 에도를 방문했지만 이 그림이 그들을 통해 한국에 건너오지는 못했다. 일본의 미술사학자 고바야시 다다시는 “이국의 풍속화인 우키요에가 그 무렵 한국인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난 6월과 8월 국내에서 열린 대규모 우키요에 전시회가 성황을 이뤘던 것을 보면 우키요에는 한국인들에게도 충분히 매혹적인 모양이다.

‘우키요에의 미’는 자포니즘을 이끌었던 이 일본 미술에 대한 본격적인 안내서다. 우키요에 연구의 대가인 저자 고바야시는 하시카와 모로노부·기타가와 우타마로·우타가와 히로시게 등 대표적인 우키요에 거장 12명의 작품들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들을 도판으로 소개해 놓고 있는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우키요에를 “에도라는 특정한 도시에서 초닌(町人·도시의 상인과 중인층) 문화의 하나로 발전된 서민적 회화”라고 말하고 있다.

‘우키요’는 이 세상, ‘에’는 그림을 뜻하는 말로 우키요에는 한마디로 ‘현재의 세태와 풍속’을 그리는 그림을 의미한다. 에도시대에는 현재를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풍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우키요에에 유곽이나 기녀·가부키·스모 등 현세적인 쾌락과 향락주의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목판화로 제작돼 대량생산되었던 우키요에는 당시 에도 서민들의 애호품이자 특산물이었다.

우키요에가 ‘왜색’을 짙게 풍긴다고 해서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그림들의 간결하되 강렬한 묘사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한세기 전의 서양화가들이 이 작품들에 끌렸던 것은 그들의 이국 취향과 동양적인 것에 대한 편견인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했겠지만 그것은 또한 우키요에가 가진 힘이기도 했다.

이 그림들에 나타난 근대 일본의 풍경은 대단히 활력있고 생동감있다. 그림을 넘어 한 시대의 역동적 실상을 실사로 보여주는 기록물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가장 성공적으로 근대개혁에 성공한 일본의 얼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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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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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이 넘은 노작가는 ‘지옥불 같은 열정’을 숨기며 살았던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왔다. 대가(大家)라 부르는데 조금도 주저됨이 없는 소설가 박완서(73)씨의 열다섯번째 장편 ‘그 남자네 집’은 “가슴이 울렁거리고 발밑의 언땅이 고무공처럼 온몸에 탄력을 주었던” 첫사랑의 순간을 회억한다. 그녀의 많은 전작들이 그러하듯이 6·25 전란이 흑백사진처럼 배경 처리돼 있다. 박씨의 장기인 정겹고 곡진한 ‘수다’는 이 작품에서도 장관을 이루며, 놀라운 흡인력으로 독자들을 빨아들인다

소설은 중년의 여주인공이 첫사랑의 상대였던 ‘그 남자’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느날 그 남자가 어머니와 함께 그녀가 살던 돈암동 안감내의 홍예문이 달린 기와집으로 이사왔다. 그 남자와의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전란의 와중에 식구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미군 부대에서 일하면서부터다. 두 사람은 우연히 퇴근길 전차 안에서 만나 길고 긴 인연의 끈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남자는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백수에다 ‘마마보이’였다.

소설은 박씨 자신이 밟아 왔던 행로와 엇비슷하게 전개된다. 박완서씨가 6·25의 와중에서 오빠를 잃어야 했고, 미군 부대 PX에서 일하며 어머니를 봉양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데뷔작인 ‘나목’에서부터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 그녀의 상당수 소설들은 그 시절의 궁핍과 고통을 실감나게 그려낸 바 있다. 이 때문에 한 문학평론가는 박씨의 소설을 두고 ‘기억의 서사’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 작품에서도 1950년대의 삶은 손에 잡힐 듯 실감나게 그려진다. 첫사랑의 열정과 그것이 사그라드는 과정을 묘사하는 작가의 문체는 감정을 날것 그대로 노출시키지 않는다.

두 사람의 사랑은 여자가 무능한 남자 대신 은행원을 선택하면서 끝난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안락한 생활을 가져다주지도 않았고, 사랑의 묘미도 없었다. 우연히 그 남자를 다시 만나 함께 밀월 여행을 떠나기로 했으나 남자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순간, 여자는 “어딘가로 붕 떠올랐다가” 다시 땅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열패감에 빠진다. 그 후 남자가 뇌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지만 이미 그는 시력을 잃었고, 그녀는 귀여움을 잃은 채였다. 남자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만 담담하게 포옹을 나누며 결별한다.

작가는 머리말에서 50년대라는 남루한 시절에 “문학 때문에 가슴이 울렁거리고 나면 피가 맑아진 느낌이 들곤 했다”며 “문학은 내 마음의 연꽃이었다”고 고백한다. 소설 속 여주인공이 그 시절의 ‘그 남자’를 회고하듯이 작가는 척박한 시대에 그녀를 매료시켰던 문학을 추억한다. 그 때문에 첫사랑을 다룬 이 소설은 작가가 젊은날의 문학에 바치는 헌사처럼 읽힌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는 동안은 연애편지를 쓰는 것처럼 애틋하고 행복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을 읽는 경험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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