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세계화 - 새로운 세계를 위하여
월든 벨로 지음, 김공회 옮김 / 잉걸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1980년대부터 1999년까지 개발도상국의 연간 1인당 국내총생산 성장률은 1.5%(세계은행 2001년 보고서)였다. 이 수치는 그 이전 시기보다 훨씬 낮은 것으로 ‘세계화’가 급진전되는 동안 선진국은 승승장구했던 반면(같은 시기 평균 2.2% 성장), 개도국은 성장이 더딜 뿐만 아니라 유례없는 빈곤상황에 부닥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필리핀의 사회학자 월든 벨로는 현재 추진되고 있는 세계화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고 경고한다. 전세계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대다수 세계인들의 삶이 황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번역된 그의 저작 ‘탈세계화’는 경제적 세계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오늘날 기업 주도의 세계화는 독재적이고 광신적이며 권위적인 대중추수 세력들의 사육장 역할을 할 뿐이다. 그것은 당시(20세기 초)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불안과 분노, 그리고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세계화는 자신의 약속을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을 비참한 상황으로 몰아 넣고 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했을 당시 국제 금융계의 큰 손 조지 소로스는 “WTO는 하나의 이정표”라며 세계 최강의 경제국 미국을 굴복시킬 유일한 초국가적 기구라며 낙관론을 폈지만 저자는 그것을 악몽의 시작으로 해석한다.

그가 보기에 현재의 위기는 세가지 기원에서 비롯됐다. 그 하나는 1997년의 아시아 금융위기로, 이는 금융자본과 투기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촉진시키기 위한 자본자유화가 초래한 사태였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1999년 결국 무산된 시애틀 WTO 2차 각료회의. 시애틀에 모인 반세계화 시위는 그 이후 계속된 반세계화 국제시민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던 것이다. 세번째는 미국의 클린턴 집권기 장기 호황이 끝나고 주식시장이 붕괴된 것. 정보기술(IT) 산업의 발전을 기반으로 한 미국의 ‘신경제’(New Economy)는 거품으로 판명났고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과잉생산의 말로를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비판은 미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외교·군사만이 아니라 경제 부문에서도 강경노선을 걷고 있는 부시 정부의 ‘일방주의’는 곳곳에서 역풍에 휘말리고 있다고 본다. 미국 중심의 글로벌 통치체제의 세 기둥인 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IMF)·WTO는 일방주의적 세계화의 첨병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가 현재의 세계화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자는 주장을 펴는 것은 아니다. 그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탈세계화’는 “시장논리 및 비용 효율성 추구를 안전·평등·사회연대라는 가치에 의식적으로 종속시키는 접근”이다. 세계 각지의 지역경제들을 보존하고 강화하기 위한 실질적 국제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중독재 - 강제와 동의의 사이에서
책세상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사상 유례없는 독재자였으면서도 대학생들로부터 복제하고 싶은 인물 1위로 꼽힌다. 서민경제가 불안할수록 ‘박정희 신드롬’은 불쑥불쑥 고개를 들곤 한다. 왜 한국의 대중들은 민주화 시대가 활짝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독재자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 욕망의 뿌리에는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국내외 학자 18명이 참여한 ‘대중독재-강제와 동의사이에서’는 ‘대중독재’라는 낯선 개념으로 이런 질문에 답하고 있는 논쟁적인 책이다.

이 책은 ‘독재체제’를 독재자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성격에서 찾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독재체제를 허용하고 적극적으로 내면화한 ‘대중’들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낸다. 나치즘과 같은 우파독재이건, 스탈린체제와 같은 좌파독재이건 대중이라는 ‘아래로부터의 동의’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중은 독재자의 강압에 의해, 혹은 자발적인 동의를 통해 독재체제를 정당화한다. 독재 권력은 박정희 시대에서처럼 중앙정보부 같은 억압적 국가 기구를 통해 대중을 순응하도록 강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중의 꿈을 실현시킴으로써 열광적 지지를 얻어내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양한 욕망과 의지를 지닌 ‘다중’(多衆)은 단일한 속성을 지닌 ‘국민’으로 재탄생한다.

‘대중독재’의 사례는 의외로 풍부하다. 1930년대 이탈리아인들은 경제적 안정을 제공해줬기 때문에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지지했다. 독일 노동자들은 나치 시대를 실업 감소, 경제 호황의 좋았던 시절로 회고한다. 그 ‘동의’의 기반 아래 끔찍한 유대인 학살이 이뤄지고 2차대전의 악몽이 시작됐음에도 말이다. 1930∼40년대 일본의 전시 총동원체제는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일본 국민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세계 최장 시간의 노동 등 정치·경제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국민들은 박정희 정권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 책에서 독일·일본·러시아·한국의 학자들은 20세기의 전세계에서 등장한 ‘대중독재’의 사례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있다.

한국의 지적 전통에서 민중은 언제나 이상화된 존재였다. 그들은 한없이 순결하고 도덕적이며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필자들은 그런 ‘민중의 신화’를 여지없이 부숴버린다. 민중은 독재자의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해 독재체제의 충실한 구성원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나치 하의 독일인들처럼 민족주의적 수사에 도취된 채 인종주의자가 된다. 이런 과정 속에서 파시즘은 서서히 고개를 들고 급기야는 권력을 찬탈해 버린다. 이 책은 사악한 소수와 선량한 다수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독재체제와 파시즘이 지닌 복합적인 성격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해준다. 지난 세기 한국과 전세계에서 벌어진 정치적 억압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파시즘이 어떻게 등장할 수 있는지를 예언하고 있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경림 시인과 오현 스님의 열흘간의 만남
신경림.조오현 지음 / 아름다운인연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시(詩)의 말뜻을 풀이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언어[言]의 사원[寺]으로 부른다. 그만큼 시와 종교는 닮아 있다는 것일까. 시가 언어의 근원을 지향하듯이 종교는 인간 속에 내재한 영성과 맞닿아 있다. 중국 명나라의 시인 원호문은 이렇게 말한다. “시가 선승을 만나면 비단을 덮어주고(詩爲禪客添錦化), 선은 시인에게 옥칼을 준다(禪是詩家切玉刀).” 그러니 한 선승과 시의 대가가 만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우리시대의 대표적 시인 신경림과 내설악 백담사 무금선원에 기거하고 있는 선승 오현 스님의 만남도 그러하다. 두 대가는 열흘 동안 만나 속깊은 대화를 나눈 끝에 한권의 책을 펴냈다.

이들의 대화는 ‘여행’으로부터 시작된다. 여행을 통해 시상과 삶에 대한 통찰을 얻어온 시인과 구도의 길 위에 서 있는 선승의 인생행보로 볼 때 그럴 듯한 첫 화두다. 강연차 급행열차를 타고 지방에 내려 가다가 “내가 왜 이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녀야 하지”라는 생각에 기차에서 무작정 내려 홀로 느긋한 성찰의 시간을 갖는 시인. “기다리는 것을 배우고 천천히 가는 미덕”을 가르쳐주는 여행 속에서 두 사람은 ‘느림’의 미학에 대해 깊은 공감을 표한다. 시인은 삶이란 여행의 끝인 죽음에 이르러서도 육신이 “일부는 꽃이 될 것이고, 일부는 나무가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물도 되고 바람도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이들의 대화는 고수들만이 펼칠 수 있는 혜안과 지혜로 빛난다. 여행과 사랑, 환경과 통일, 전쟁과 문학을 화두로 삼은 이들의 ‘말의 향연’에는 시와 게송들이 슬쩍 끼어들기도 한다. “마음에 없는 소리, 쓸데없는 제자랑 따위”는 하지 않고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의 소리”만을 나누기로 한 이들의 대화를 엿듣는 재미는 꽤나 쏠쏠하다. 그들이 겪어 왔던 개인사와 짝사랑, 치기어린 젊은 날을 회고할 때는 이순(耳順)을 훌쩍 넘어 고희(古稀)에 이른 자만이 풀어낼 수 있는 곰삭은 인생이야기가 된다. 욕망에 대한 집착과 그것의 충돌이 빚어낸 전쟁, 남북간의 공생을 말할 즈음이면 소박한 대로 ‘문명비평’이 되기도 한다.

대화의 끝은 결국 깨달음의 의미로 귀착된다. “우리는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으로 먼 길을 오랜 시간 걸어온 셈입니다. 돌아보면 허망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우리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안다는 것은 다 거울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인데.” 두 사람의 대화는 한편의 시로 끝난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까맣게 몰랐다//-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신경림, ‘갈대’) 이 책을 읽는 것은 고즈넉한 선방,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명상에 잠기는 경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 지음, 형성백 옮김 / 부키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개발도상국 경제 관료들에게 인기가 높은 경제학자다. 장교수가 자신의 대학에서 진행하는 세미나에는 주로 개도국 경제전문가들이 참석한다. 그가 왜 이런 대접을 받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저서가 바로 ‘사다리 걷어차기’다. 이 책에서 장교수는 경제개방과 자유무역을 외치는 선진국들의 주장을 실제 역사를 들어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 책으로 그는 지난해 뮈르달상을 수상했고, 연초 ‘뉴스위크 한국판’은 그를 주목할 만한 한국인 10인 중 한명으로 선정한 바 있다.

‘사다리 걷어차기’의 한국어판은 사실 뒤늦은 감이 있다. 2002년 6월 영국에서 처음 출간된 책이 그로부터 2년 가까이 지난 뒤인 지금에야 번역 출간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에 이어 참여정부에서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기조가 여전히 계속되고,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추종하는 현실에서 저자의 주장은 여전히 경청할 만하다. 아마 최근 출간된 경제학 저서 가운데 이 책만큼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도 드물다. 프랑스의 좌파 언론 ‘르몽드디플로마티크’를 비롯한 반세계화 진영은 이 책을 반세계화의 ‘교과서’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저자가 일차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을 비롯한 국제개발정책을 주도하는 세력이다. 이들은 주로 선진국들 의사를 대변하면서 무역·투자의 자유화, 보호관세·무역장벽의 철폐를 목청 높여 외친다. 자유화와 개방화, 민주적 제도의 도입이 경제성장을 이끈다는 ‘워싱턴 합의’는 이들에 의해 자명한 진리처럼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장교수는 이런 주장을 “위선적이고 허구적”이라고 통박한다. 비판을 위해 그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오늘날 세계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국가들의 성장사다.

장교수가 거론하고 있는 경제 선진국들의 위선의 목록은 참으로 다채롭다. 완전한 자유무역을 시행했다고 하는 영국은 기실 정부의 대대적인 유치산업 보호 정책으로 경제발전을 이뤘다. 경제사학자 베어록은 미국을 “근대 보호주의의 모국이자 철옹성”이라고 말할 정도다. 선진국들은 경제발전 과정에서 보호관세와 정부보조금으로 발전을 이뤘고, 유색인종과 여성에게는 투표권도 주지 않았으면서 현재는 민주주의의 도입을 주장한다. 특허권과 상표권을 밥먹듯이 침해했으면서도 이제는 후진국들에 지적재산권을 보호하라고 압력을 넣는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타고 올라온 사다리를 이제는 후진국들이 쫓지 못하도록 걷어차 버리는 게 최근 선진국들의 행태라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이 강한 설득력을 갖는 것은 선진국들이 부인할 수 없는 실제의 역사와 꼼꼼한 통계를 들이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장교수를 공허한 반세계화 이론가와 뚜렷하게 구별해주는 지점이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개발도상국의 경제를 끌어올려 ‘다 함께 잘사는 세계’를 만들기 위함이다. 실제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파고가 높았을 때 개도국 경제는 정체 내지 하락 추세였다. “세계화의 바깥은 없다”는 신화가 횡행하는 한국 사회에도 이 책은 적잖은 지적 충격을 가져다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의 역사
버나드 로 몽고메리 지음, 승영조 옮김 / 책세상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인간의 역사 치고 야만의 기록 아닌 것이 없지만 그 ‘야만’ 중의 야만은 아마 전쟁일 듯하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만이 아니라 전쟁을 직접 수행하는 군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2차대전의 명장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은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군인은 타인을 적으로 삼지 않고 인간 내면의 야수를 적으로 삼는다. 한 군인으로서 나는 희망한다. 황금빛 노을이 지고, 반목과 싸움을 잠재우는 소등 나팔소리가 울리는 그 날이 오기를. 이윽고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르며 세계 온 나라의 친선과 평화를 깨우는 기상 나팔이 울리는 그 시대가 오기를.”

몽고메리 장군은 영국 육군 원수로 ‘사막의 여우’였던 독일의 롬멜 장군을 꺾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인물. 평화에 대한 이런 갈망은 그가 참전 군인으로 숱한 전투를 치렀던 인물이기 때문에 심상찮은 무게감이 느껴진다. 게다가 이 말은 기원전 7000년부터 2차대전까지 9천년에 달하는 기간 중 인류가 치러온 전쟁의 모든 역사를 통찰한 끝에 나온 결론이기도 하다. 1천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전쟁의 역사’는 돌도끼에 의존했던 고대의 전쟁에서부터 핵무기가 등장하는 현대전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수행한 ‘잔혹사’를 추적한다.

그가 그리고 있는 전쟁의 양상은 결코 스펙터클한 모험담이 아니다. 전쟁의 발발과 전개 과정, 전쟁에 동원되는 전략과 전술 등에 대한 서술이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정작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군인으로서의 고뇌’다. 그는 ‘전쟁영웅’이란 자신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피로, 공포, 소름끼치는 상황, 심한 결핍, 궁극적으로는 부상의 확실성과 죽음의 가능성”을 계속 언급한다. 그는 전쟁을 결정한 정치인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다. “상당수의 군사작전과 전투는 단지 정치적인 이유만으로 치러졌다. 정치적 이유들은 수많은 군인들의 명성을 매장시킨 무덤이었다.” 그가 써내려간 전쟁의 역사는 승리와 영광의 역사가 아닌 인간 내면의 야수성에 대한 기록이다.

저자는 주로 서구전쟁사를 언급하고 있지만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서술도 등장하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비해 “이순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이라크의 전장에서 민간인과 군인이 계속 죽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이 책이 던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그는 현대전의 기술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전쟁의 기술은 발달했지만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저작을 “아프리카와 유럽의 전장에서 함께 싸운 전우들”에게 헌정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