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독재 - 강제와 동의의 사이에서
책세상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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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은 사상 유례없는 독재자였으면서도 대학생들로부터 복제하고 싶은 인물 1위로 꼽힌다. 서민경제가 불안할수록 ‘박정희 신드롬’은 불쑥불쑥 고개를 들곤 한다. 왜 한국의 대중들은 민주화 시대가 활짝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독재자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 욕망의 뿌리에는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국내외 학자 18명이 참여한 ‘대중독재-강제와 동의사이에서’는 ‘대중독재’라는 낯선 개념으로 이런 질문에 답하고 있는 논쟁적인 책이다.

이 책은 ‘독재체제’를 독재자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성격에서 찾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독재체제를 허용하고 적극적으로 내면화한 ‘대중’들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낸다. 나치즘과 같은 우파독재이건, 스탈린체제와 같은 좌파독재이건 대중이라는 ‘아래로부터의 동의’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중은 독재자의 강압에 의해, 혹은 자발적인 동의를 통해 독재체제를 정당화한다. 독재 권력은 박정희 시대에서처럼 중앙정보부 같은 억압적 국가 기구를 통해 대중을 순응하도록 강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중의 꿈을 실현시킴으로써 열광적 지지를 얻어내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양한 욕망과 의지를 지닌 ‘다중’(多衆)은 단일한 속성을 지닌 ‘국민’으로 재탄생한다.

‘대중독재’의 사례는 의외로 풍부하다. 1930년대 이탈리아인들은 경제적 안정을 제공해줬기 때문에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지지했다. 독일 노동자들은 나치 시대를 실업 감소, 경제 호황의 좋았던 시절로 회고한다. 그 ‘동의’의 기반 아래 끔찍한 유대인 학살이 이뤄지고 2차대전의 악몽이 시작됐음에도 말이다. 1930∼40년대 일본의 전시 총동원체제는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일본 국민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세계 최장 시간의 노동 등 정치·경제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국민들은 박정희 정권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 책에서 독일·일본·러시아·한국의 학자들은 20세기의 전세계에서 등장한 ‘대중독재’의 사례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있다.

한국의 지적 전통에서 민중은 언제나 이상화된 존재였다. 그들은 한없이 순결하고 도덕적이며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필자들은 그런 ‘민중의 신화’를 여지없이 부숴버린다. 민중은 독재자의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해 독재체제의 충실한 구성원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나치 하의 독일인들처럼 민족주의적 수사에 도취된 채 인종주의자가 된다. 이런 과정 속에서 파시즘은 서서히 고개를 들고 급기야는 권력을 찬탈해 버린다. 이 책은 사악한 소수와 선량한 다수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독재체제와 파시즘이 지닌 복합적인 성격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해준다. 지난 세기 한국과 전세계에서 벌어진 정치적 억압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파시즘이 어떻게 등장할 수 있는지를 예언하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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