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 지음, 형성백 옮김 / 부키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개발도상국 경제 관료들에게 인기가 높은 경제학자다. 장교수가 자신의 대학에서 진행하는 세미나에는 주로 개도국 경제전문가들이 참석한다. 그가 왜 이런 대접을 받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저서가 바로 ‘사다리 걷어차기’다. 이 책에서 장교수는 경제개방과 자유무역을 외치는 선진국들의 주장을 실제 역사를 들어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 책으로 그는 지난해 뮈르달상을 수상했고, 연초 ‘뉴스위크 한국판’은 그를 주목할 만한 한국인 10인 중 한명으로 선정한 바 있다.

‘사다리 걷어차기’의 한국어판은 사실 뒤늦은 감이 있다. 2002년 6월 영국에서 처음 출간된 책이 그로부터 2년 가까이 지난 뒤인 지금에야 번역 출간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에 이어 참여정부에서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기조가 여전히 계속되고,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추종하는 현실에서 저자의 주장은 여전히 경청할 만하다. 아마 최근 출간된 경제학 저서 가운데 이 책만큼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도 드물다. 프랑스의 좌파 언론 ‘르몽드디플로마티크’를 비롯한 반세계화 진영은 이 책을 반세계화의 ‘교과서’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저자가 일차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을 비롯한 국제개발정책을 주도하는 세력이다. 이들은 주로 선진국들 의사를 대변하면서 무역·투자의 자유화, 보호관세·무역장벽의 철폐를 목청 높여 외친다. 자유화와 개방화, 민주적 제도의 도입이 경제성장을 이끈다는 ‘워싱턴 합의’는 이들에 의해 자명한 진리처럼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장교수는 이런 주장을 “위선적이고 허구적”이라고 통박한다. 비판을 위해 그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오늘날 세계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국가들의 성장사다.

장교수가 거론하고 있는 경제 선진국들의 위선의 목록은 참으로 다채롭다. 완전한 자유무역을 시행했다고 하는 영국은 기실 정부의 대대적인 유치산업 보호 정책으로 경제발전을 이뤘다. 경제사학자 베어록은 미국을 “근대 보호주의의 모국이자 철옹성”이라고 말할 정도다. 선진국들은 경제발전 과정에서 보호관세와 정부보조금으로 발전을 이뤘고, 유색인종과 여성에게는 투표권도 주지 않았으면서 현재는 민주주의의 도입을 주장한다. 특허권과 상표권을 밥먹듯이 침해했으면서도 이제는 후진국들에 지적재산권을 보호하라고 압력을 넣는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타고 올라온 사다리를 이제는 후진국들이 쫓지 못하도록 걷어차 버리는 게 최근 선진국들의 행태라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이 강한 설득력을 갖는 것은 선진국들이 부인할 수 없는 실제의 역사와 꼼꼼한 통계를 들이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장교수를 공허한 반세계화 이론가와 뚜렷하게 구별해주는 지점이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개발도상국의 경제를 끌어올려 ‘다 함께 잘사는 세계’를 만들기 위함이다. 실제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파고가 높았을 때 개도국 경제는 정체 내지 하락 추세였다. “세계화의 바깥은 없다”는 신화가 횡행하는 한국 사회에도 이 책은 적잖은 지적 충격을 가져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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