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시인과 오현 스님의 열흘간의 만남
신경림.조오현 지음 / 아름다운인연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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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의 말뜻을 풀이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언어[言]의 사원[寺]으로 부른다. 그만큼 시와 종교는 닮아 있다는 것일까. 시가 언어의 근원을 지향하듯이 종교는 인간 속에 내재한 영성과 맞닿아 있다. 중국 명나라의 시인 원호문은 이렇게 말한다. “시가 선승을 만나면 비단을 덮어주고(詩爲禪客添錦化), 선은 시인에게 옥칼을 준다(禪是詩家切玉刀).” 그러니 한 선승과 시의 대가가 만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우리시대의 대표적 시인 신경림과 내설악 백담사 무금선원에 기거하고 있는 선승 오현 스님의 만남도 그러하다. 두 대가는 열흘 동안 만나 속깊은 대화를 나눈 끝에 한권의 책을 펴냈다.

이들의 대화는 ‘여행’으로부터 시작된다. 여행을 통해 시상과 삶에 대한 통찰을 얻어온 시인과 구도의 길 위에 서 있는 선승의 인생행보로 볼 때 그럴 듯한 첫 화두다. 강연차 급행열차를 타고 지방에 내려 가다가 “내가 왜 이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녀야 하지”라는 생각에 기차에서 무작정 내려 홀로 느긋한 성찰의 시간을 갖는 시인. “기다리는 것을 배우고 천천히 가는 미덕”을 가르쳐주는 여행 속에서 두 사람은 ‘느림’의 미학에 대해 깊은 공감을 표한다. 시인은 삶이란 여행의 끝인 죽음에 이르러서도 육신이 “일부는 꽃이 될 것이고, 일부는 나무가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물도 되고 바람도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이들의 대화는 고수들만이 펼칠 수 있는 혜안과 지혜로 빛난다. 여행과 사랑, 환경과 통일, 전쟁과 문학을 화두로 삼은 이들의 ‘말의 향연’에는 시와 게송들이 슬쩍 끼어들기도 한다. “마음에 없는 소리, 쓸데없는 제자랑 따위”는 하지 않고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의 소리”만을 나누기로 한 이들의 대화를 엿듣는 재미는 꽤나 쏠쏠하다. 그들이 겪어 왔던 개인사와 짝사랑, 치기어린 젊은 날을 회고할 때는 이순(耳順)을 훌쩍 넘어 고희(古稀)에 이른 자만이 풀어낼 수 있는 곰삭은 인생이야기가 된다. 욕망에 대한 집착과 그것의 충돌이 빚어낸 전쟁, 남북간의 공생을 말할 즈음이면 소박한 대로 ‘문명비평’이 되기도 한다.

대화의 끝은 결국 깨달음의 의미로 귀착된다. “우리는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으로 먼 길을 오랜 시간 걸어온 셈입니다. 돌아보면 허망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우리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안다는 것은 다 거울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인데.” 두 사람의 대화는 한편의 시로 끝난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까맣게 몰랐다//-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신경림, ‘갈대’) 이 책을 읽는 것은 고즈넉한 선방,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명상에 잠기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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