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라는 이름의 외국
유종호 지음 / 현대문학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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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선생이 새로 낸 책은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선생은 이 제목을 에릭 홉스봄의 ‘과거는 타국이다’라는 말에서 차용했다고 하는데, 그보다 앞서 영국 작가 L.P 하틀리가 “과거는 외국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다르게 산다”라고 말했다는 점도 쓰고 있다. 방대한 독서에서 나오는 “적정한”(이 말은 선생이 책에서 자주 쓰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인용은 언제나 감탄스럽다. 내게는 얼마 전에 본 “과거는 낯선 나라다”라는 1986년 김세진․이재호의 분신과정을 다룬 영화 제목으로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 죽은 두 사람의 벗들은 분신으로 사람이 죽었음에도 신림동 네거리의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별일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끔찍스러웠다고 회고하고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역사학자 데이비드 로웬덜이 쓴 책이 또한 <과거는 낯선 나라다>(개마고원)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책 제목으로 자주 쓰인다는 것은 그게 어떤 지혜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은 그의 현재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과거의 어떤 한순간에 대한 총체적인 열망일 것이다. 시간과 장소를 벗어난 존재는 그리움에 값하지 않는, 훼손된 이미지일 것이다. 그러니, 그리움이란 허망한 노릇일 터이다. 과거는 나의 조국이 아니며, 나는 거기를 떠나 다른 나라에 망명했기 때문이다.

유종호 선생의 문장을 따라가는 것은 내게 아주 편안한 경험이다. 만연체인데다 특유의 조어까지를 고려하면, 그의 문장은 보통의 독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수 있겠으나 벌써 20여년 가까이 그의 글을 읽어온 처지에서 보면 그렇다. 번뜩이는 통찰과 넉넉한 긍정, 노년에 걸맞지 않은 ‘캐주얼’한 재치, 아마 고급의 인문학 문장이 있다면 바로 유선생의 그것이 아닐까 한다. 그의 글에서는 백낙청의 지사적 ‘계몽주의’도, 김우창의 가끔 이해 못할 ‘철학’도, 김윤식의 도무지 요령부득의 ‘독백’도 찾아보기 어렵다. 유선생이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는 소식을 한겨레 최재봉 기자의 리뷰로 접했을 때, 나는 그것이 몇 년 전에 펴낸 <나의 해방전후>(민음사), 그리고 <그 겨울 그리고 가을>(현대문학)의 연장선일 것이라 생각했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정교한 기억력과 섬세한 사회사적 세목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이 ‘구술 사회사’들은 한국 현대사의 ‘생활세계’(lebenswelt)를 생생하게 증거하기에 충분한 사료일 것이다. 해방 전후에서 한국전쟁 전후까지 ‘증언’을 했으니 이제는 아마 50년대 대학시절 얘기쯤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랐다. 모두 3장으로 구성된 책 중 1장의 일부 글만 ‘회고’에 부응할 뿐, 나머지는 선생의 본령인 ‘에세이적 비평’이다. 그것도 이태준의 <사상의 월야>,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정지용의 <향수>, 손창섭의 소설들,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로셀리니와 잉그리드 버그만, 프랭크 커모드와 조지 슈타이너 등의 텍스트를 종횡하면서 특유의 인문적 사유를 풀어놓고 있다. 송욱 교수가 'listen'을 “귀 기울여라”라고 번역했다거나 제자들의 높은 추앙을 받고 있는 고 서울대 철학과의 박홍규 교수가 기실은 이름값에 못미치는 부실한 강의를 했다거나 하는 등의 한국 전쟁 직후의 대학 강의실의 풍경은 당대의 지적 풍토에 대한 호사취미를 충족시켜줄 만하다. 놀라운 기억력으로 이미 정평이 높은 유선생이고보면, 아마도 그가 풀어놓고 있는 이런 ‘전근대의 대학풍경’은 실질에 부합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많은 에피소드의 경우 목동 아파트의 거실에서 서너 시간을 내리 구라를 푸는 과정에서 풀어놓은 것들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여전히 관통되고 있는 유선생의 사유는, 내 식대로 정리하자면, ‘북위 37도의 사유’, 그리고 ‘텍스트에 대한 경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북위 37°는 선생이 태어난 충청북도 증평의 위도이다. 북위 38°와 36°사이에 위치한 이 지리적 공간은 선생의 정치적, 사회적 사유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선생이 펴낸 <나의 해방전후>의 첫 장 소제목은 바로 이 위도를 가리킨다. 그것은 서울의 사유도 아니고, 변방의 사유도, 그렇다고 ‘남도’의 사유도 아니고, ‘좌’의 그것도, 온전히 ‘우’의 그것도 아니다. 때로 그것은 좌파에 대한 비판으로, 우파에 대한 부분적 수용과 비판으로, 혹은 엘리티즘에 대한 비판과 대중주의에 대한 혐오로 부단히 유동한다. 어정쩡한 정치-지리적 위상이다. 긍정적으로 말해 중용이겠고, 충청도스러운 기질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중용의 정치학은 대부분 보수로 귀결되는데, 그의 보수주의는 정치적 보수주의, 문화적 고전주의라는 내용을 갖고 있다. 식민지 시기 보기드문 섬세한 문장가였다가 월북한 이태준(그는 사상적으로 투철한 좌파는 아니었다), 한국시의 언어를 한단계 끌어올린 정지용과 청록파에 대한 과도할 정도의 고평, 좌파 역사가 홉스봄에 대한 ‘인식론적 수용(가치론적이 아닌)’, 아이자이어 벌린, 프랭크 커모드, 에드먼드 윌슨, 조지 슈타이너에 대한 경사(이들의 성향은 좌우로 나뉠 수 있으나 공유하는 것은 자기 분야에서 요구되는 고전적 기율에 철저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등으로 나타난다. 북위 37° 는 위 아래의 위도 사이에서 유동하되 한계를 넘지 않는다.

유선생은 선우휘의 회고를 빌어 해방 직후 국군이 조직될 때 “일찌기 X장군은 조국광복을 예견하시고 이에 대비하기 군에 입대하여 군사적 경륜을 쌓은 바”라는 식의 낯뜨거운 당시 장교들의 말을 써놓고 있다. 일본 육사에 들어간 행위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낯뜨거운 자기기만이다. 정치사로는 포획되지 않는 당대의 풍경이자 ‘사회사’의 한 대목인 셈이다. 문학텍스트를 통하여 사회사적 세목을 확인하고 풀이하려는 노력은 이같은 타국으로서의 과거에 대한 세밀한 역사상을 그려보기 위함일 것이다. 비숍의 책을 빌어 ‘타자의 시각’이 가진 위력을 말하면서 민족주의의 문제를 지적할 때, 선생의 인식론적 진보성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비숍과 더불어 바흐찐의 ‘외재성’(exotopy)를 말할 때, 괴테가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세계문학’을 거론한 맥락이거나 중고등 교육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소르본 대학의 임용을 거부한 철학자 알랭을 말할 때, 인문학에서 그리고 역사적 에피소드에서 끌어올리는저 ‘적정한 인용’의 설득력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문화적 고전주의자로서의 풍모가 짙게 배어 있는 글은 하루키에 관한 에세이 <문학의 전락>이다. 하루키를 “고급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허드레 대중문학”이라 폄하하는 그는, <상실의 시대>를 두고, “감상적인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쓰여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교제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음담패설집”이라 혹평한다. 그 책과 반대편에 놓인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보여주는 “성숙을 위한 모색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문학이 한때는 정신귀족으로 올라갈 수 있는 교양의 핵심부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자기파괴적 허드레 문학”이 득세하는 시대가 되었다. <보봐리 부인>은 <안나 카레니나>를 낳았지만, 하루키의 경쟁상대는 텔레비전과 스포츠와 비디오란다. 하루끼에 대한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으나, 나는 이런 비판이야말로 유선생과 같은 문화적 고전주의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마땅히 나와야 한다고 믿는다. 뛰어남, 곧 탁월함에 대한 경의가 사라지는 시대, 유선생의 비관주의는 이 부박한 시대에 문화적 고전주의의 필연적 귀결일 터이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향수는 인간에게 남겨진 몇 안되는 자율과 선택의 주체적 영역이다. 문학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다.”

표절과 상호텍스트성의 맥락을 말하는 <기이한 상봉>은 유선생의 특장이 발휘된 에세이다. 로셀리니와 사랑에 빠진 잉그릿 버그만이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커플이 된 이후 만든 영화 <이탈리아 여행>으로 시작하여,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사자>로, <안티고네>와 마르케스의 소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과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 자크 티보와 알프레드 콜토가 연주하는 세자르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로 이어지는 ‘상호텍스트성’을 둘러싼 담론의 전개는 현란하면서도 “적정하다.” 칠십노인과 십대 소녀 사이의 성공하지 못한 섹스를 미학화하는 마르케스를 두고 “임박한 성적 무능이 빚어 내는 플라토닉 러브의 환상적 서사”라고 평가하거나, 조이스의 단편에서 “나이들어 볼품없이 시들고 쇠하기보다 어떤 열정의 찬연한 불길 속에서 과감히 저승으로 가는 편이 낫다”는 대목을 끄집어 내거나, 중간 중간에 삽입된 “불후의 연인을 그려낸 시인은 흔히 하숙의 평범한 하녀밖에 알지 못하였다”는 프루스트의 대목을 끌어들인 것도 그러하다. 다른 평론가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박람강기, 독서의 넓이와 깊이의 문제다.

가끔 막막한 장벽에 가로막힌 듯한 느낌도 준다. 그가 책 밖에서 내놓는 언설들을 통해서 나는 북위 37도의 유연성에서 문화적 고전주의의 완강한 보수주의로, 급기야 우파적 인식을 넘어 정치적 반동주의로 귀결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유선생의 정지용 <향수> 옹호가 그 정교한 분석과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는 배경이기도 하다. 홍난파의 친일 행적을 두고 그가 만든 동요가 없었다면 식민지 시기의 유년이 얼마나 황폐했었던가를 묻는 것은 타당한 문제제기다. 그러나, 유선생의 친일에 대한 상황논리적 이해와 청록파 혹은 정지용 비판에 대한 반비판의 맥락은 ‘문화적 진영 논리’의 자장 안에 스스로 기투하여 전사임을 자임한데서 벌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종부세에 대한 날선 비판과 전직 대통령에 대한 혐오에 가까운 비판도 그렇게 이해된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유튜브로 조지 슈타이너의 강연을 듣는 그에게, 괴테가 보여준 너그러움과 포용력을 기대하는 어려운 일일까. 프랭크 커모드를 두고 “에드먼드 윌슨 이후 마지막 박람강기의 문인이라는 말은 과장된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얼추 커모드의 위치를 가리켜 준다”고 하니, 그 말을 유종호 선생에게 돌려도 크게 과한 것은 아닐 것이다. 누가 있어 유종호 이후에 이런 에세이를 쓸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그의 정치적 수사도 문화적 보수주의도 조금은 유연하기를 기대해보는 것이다.


* ps. 유종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마지막 대목을 두고 말하면서 베르테르의 시체 옆에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가 놓여 있었다는 부분을 거론하고 있다. 흔히 베르테르는 실연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에밀리아 갈로티가 지배계층에 의한 성적 폭력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체제와의 창조적 유대가 불가능했던 생기발랄한 청년의 비극”으로 볼 수 있으며 로테와의 사랑은 죽음의 한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서문당 문고로 나온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었을 때, 아버지가 딸을 죽일 수밖에 없는 그 장중한 비극성에 감동받은 바 있는데, 그 책을 읽게 된 계기도 유종호 선생 때문이다. 문학독서의 수준을 가늠하기 위한 질문이었을 것인데, 나는 레싱도, 에밀리아 갈로티도, 그것을 인용한 하이네의 <독일, 겨울동화>도 잘 알지 못했던 것. 이 책을 읽고서야 10여년 저쪽에 유선생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 ps 2. 이 리뷰를 본 후배가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하이네의 작품은 <독일 겨울 동화>가 아니라, <아타트롤>이라고, 아, 찾아보니 그게 맞다. 창비에서 교양문고로 나란히 <아타트롤>과 <독일 겨울동화>가 출간된 터라 두 작품을 헷갈렸던 모양. 블로그 글인데도 부실한 기억에 기대 대충 쓰면 안되는 모양이다. <아타트롤>의 해당 대목은 이러하다. "시민으로서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 / 자기 딸 에밀리아 갈로티를 단도로 찔러 죽였던/아버지 오도라도처럼/아타트롤도 차라리/앞발을 들어올려 / 자기 딸을 죽여버리고 싶을 것이다." (23장, 김남주 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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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2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든사이 2011-06-02 08:56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이 책에서 <피아니스트>의 감독인 폴란스키 얘기가 나와서 제가 헷갈렸던 모양입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2011-06-09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앵보 2011-06-15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보니 더 잘 썼네. 님 글의 특장 - 유려하고 단정하고 '멜랑'하고 빠르고, 무엇보다 이 네 개가 같이 있다는 - 이 더할 나위 없이 잘 드러난다요. 삘이 제대로 꽉 찼던 모양.

페크(pek0501) 2011-07-09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방문했는데, 책장이 놀랍군요. 맘에 들어요. 책도 책장도 참 잘 생겼습니다. 글 당선을 축하 드리며...

다음 방문엔 글을 꼼꼼히 읽어보겠습니다. 오늘은 꽂혀 있는 책만 보고 감.

모든사이 2011-07-10 12:28   좋아요 0 | URL
방문 감사드립니다. 책장은... 보시다시피 좀 잡스러운데 맘에 드신다니 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