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간체로 쓴 사랑의 경건주의 

아마 범우사에서 나온 사루비아 문고가 아니었을까. 사춘기 즈음에 읽으면 딱 어울릴 이 책을 20여년이 훨씬 넘어 다시 읽으면서 가끔 낯간지러웠고, 더 자주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이름부터가 지극히 사춘기스러운 ‘제롬과 알리사’. 사랑하면서도 ‘더 높은 사랑’을 위해 상대를 내치는 알리사의 선택은 ‘어른’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 가장 읽을 만한 부분은 뒷부분의 알리사의 일기 부분인데,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내간체로 쓴 사랑의 경건주의’라는 말을 떠올렸다. 내간체는 규방 여인들이 구사하던 문체, 그 문체로 알리사는 경건한 사랑, 사랑의 성스러움, 그것도 따라야할 의무로서의 성스러운 사랑을 말한다. 이런 사랑은 지상에 존재할 리 없다. 그런데, 100여년이 지난 뒤 한국의 소설가 김훈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바다의 기별>, 생각의 나무) 실현될 수 없는, 가망 없는 희망으로 존재하는 것이 사랑이라니, 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관료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최장집의 말을 빌자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질적으로 더 나빠졌다. 그의 제자 정상호 박사는 더 나아가 민주화 이후에 ‘관료지배’가 더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관료는 국민에 의해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세력. 민주화 이후에는 관료만 힘이 세진 게 아니라 똑같이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사법부"도 힘이 세졌다. 정치가 문제해결을 못하니 헌재와 법원의 사법적 판결에 모든 것이 좌우되는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가 비일비재해진 것. 정상호의 이 책은 관료지배의 연원과 해소방법에 대해 말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체계화된 정책이념, 민간 싱크탱크 등의 정책네트워크, 정치적 기획가로서의 정치 리더십 세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을 갖춘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성공했고, 그렇지 못한 노무현의 동반성장 전략은 실패했다. 이 책에서 정상호가 제기하고 있는 또 하나의 쟁점은 ‘이익을 수렴하고 대변하는 제도로서의 정당의 존재’다. 정당은 이해관계 집단의 이익을 정치적으로 수렴하고, 이를 의회라는 제도적 공간 안에서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구다. 정당은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신화’다. 한국정치와 정당에 대해 상당한 통찰을 제공해준 책.   

 

죽음에 이르는 사랑, 죽음으로 가는 사랑

몽파르나스의 마르그리트 뒤라스 묘지에는 그저 ‘M. D'라는 두 이니셜만 있을 뿐이었다. 뒤라스의 이 소설은 그녀의 묘지명만큼이나 간결하되 시적이다.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피아노 교습을 받으러 간 여인이 카페에서 한 여자의 죽음을 목격한다. 피흘리고 죽어 있는 여자의 곁에는 “내 사랑, 내 사랑”하며 울부짖는 한 남성이 있었다. 두 연인은 지상에서의 사랑을 절대적인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 사랑의 어떤 지극한 경지를 죽음이라고 말하면 어불성설일 것인가. 다음날부터 여인은 이 카페를 찾아 두 남녀의 사랑의 흔적과 내면의 고투를 더듬어 나간다. 카페에 단골로 와 있는 낯선 사내와의 대화를 통해 두 연인이 도달했던 경지를 추체험한다. 타자를 통해 자신의 내부에 침잠되어 있는 욕망의 근원을 찾아나서는 것. 결국 여인과 카페의 사내는 두 연인에 대한 대화를 통해 바로 그 두사람이 도달했던 사랑의 경지에 도달한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로 되었어요.” 뒤라스의 문장은 대단히 밀도가 높고, 중층적이며 그래서 암시적이다.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지만, 암시적으로 보여지는 여인과 사내의 내면에는 폭풍우가 치고 있다. 들끓는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연인들의 죽음과 낯선 자와의 대화, 극도로 절제된 대사로 풀어낸다. 고급소설이다. 
 

 

무지와 부재의 고통 

파리에 정주한 체코 망명객 여인이 사회주의 정권이 망한 뒤 고향을 방문한다. 쿤데라 자신의 내력인 듯, 이런 스토리에는 공산정권이 무너진 뒤 고향으로 돌아갔던 다수의 체코 망명객들의 집단무의식이 반영돼 있는 듯 하다. 인상적인 대목은 앞 부분의 ‘향수’(nostalgia)의 어원을 기록한 부분이다. “그리스어로 귀환은 ‘노스토스’nostos이다. 그리스어로 ‘알고스’algos는 괴로움을 뜻한다. 노스토스와 알고스의 합성어인 ‘노스탈지’, 즉 향수란 돌아가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 체코인들도 그리스어에서 취한 ‘노스탈지’nostalgie란 단어 이외에 ‘스테스크’stesk라는 그들만의 명사와 동사를 갖고 있다. 체코어로 표현된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문장은 ‘나는 너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인데, 이는 ‘나는 너의 부재로 인한 고통을 견딜 수 없다’는 뜻이다. (...) 어원상으로 볼때 향수는 무지의 상태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나타난다. 너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네가 어찌 되었는가를 알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고통, 내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고통 말이다.”  그리하여, 무지는 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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