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게 사과하라 - 정재승 + 김호, 신경과학에서 경영학까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신뢰 커뮤니케이션
김호.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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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10) 아침 신문을 읽는데 ‘반값 등록금’ 집회를 위해 광화문 광장에 앉아 있는 여대생이 들고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정재승과 김호가 쓴 <쿨하게 사과하라>(어크로스 펴냄)라는 책. 저간의 사정을 찾아보니 반값 등록금 시위를 응원하기 위해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가 참가 대학생들에게 이 책 100권을 기증한 모양이다. 제목 그대로 ‘쿨하게 사과하는 방법’을 담고 있는 책인데, 이들 표현대로 ‘미친 등록금‘을 두고 누가 누구에게 사과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벌써 몇 달 째 책장위에 놓여 있는 이 책을 최소한 같은 사무실 사람들에게라도 소개해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을 부추긴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는 늙어 백발이 휘날리는 써(Sir) 엘튼 존이 1976년부터 내리 30여 년간을 “사과란 말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이라고 노래하는 걸 보면 확실히 사과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그 뿐이랴. 팝그룹 시카고 또한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어려워”(Hard To Say I'm Sorry)라고 속삭이고 있으니, 이쯤 되면 사과는 만인의 공통적 고민거리 쯤 되는 것 같다. 명분 중시의 한국문화에서 사과를 주고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사과 자체도 어려운 마당에 ‘쿨하게 사과하라’니, 사과를 잘하지도, 게다가 쿨하지도 못한 사람들은 과연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아마도 이 책을 유용하게 참고해야할 사람들은 보통의 사람들보다는 장관 후보자 청문회 자리에 섰던 분들처럼, 자신의 잘못 혹은 높은 자리에 있다는 바로 그 사실 하나로 타인의 잘못까지 덤터기로 떠안고 불가피하게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들일 것 같다. 기자들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으며 마이크 앞에 서서 사과를 해야만 하는 사람의 외롭고 고독한 내면(?)을 범인이 어찌 알 수 있으랴만, 그 자리에 서기 전에 이 책 한번 들춰 봤으면 조금의 출구는 찾을 수 있을 듯 싶다. 저자들은 “사과는 결코 패자의 언어가 아니라 승자의 언어이며, 존경과 신뢰를 받기 위해서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인 ‘리더의 언어’”라고 말한다. 연신 “국민여러분께 송구 스럽습니다”를 되뇌며 눈물 콧물 흘리느니, 쿨하게 사과하는 게 21세기 한국국민의 일반적 윤리감각에도 맞는 것 같다.

두 명의 공동 저자는 잘 알려진 물리학자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정재승은 카이스트 교수로 이미 <과학콘서트> 등의 검증된 베스트셀러를 낸 학자이고, 김호는 그쪽 동네에서 꽤나 내공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홍보전문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직업 탓인지 대체로 공허한 수사를 남발하는 경향이 강하다. 보통 ‘실용서’쯤으로 분류되는 책들의 경우도 대체로 허망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침형 인간이 되라’는 교훈을 얻기 위해 300여 페이지나 되는 같은 제목의 책을 읽느니, 그냥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나을 것이다. 이 책은 수사학의 공허함을 신경과학과 인지과학으로 무장한 과학자가 메워주고 있는 형국이다. 실용서치고는 꽤나 탄탄한 셈이다. (김호는 ‘사과’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는데, 세상에, 별게 다 논문이 되는 세상이다.)

이 책의 핵심 부분에 해당하는 대목만 살펴보자. 우선 잘못된 사과가 일으킬 2차 후폭풍을 막기 위해 피해야할 표현 세 가지. 그 첫째는 조건부 사과(conditional apologies)다. 가령, 이것은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겠다” 같은 경우다. 이런 사과는 듣는 사람을 별거 아닌 일에 기분 나빠하는 ‘옹졸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더 나아가 사과의 내용을 모호하게 흐려버린다. 백희영 여성부 장관 후보자는 다운 계약서 의혹에 대해 “적절치 않은 점 있었다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가 도리어 비난을 샀다. 김태호 총리후보자는 “그렇게 돼 있다면 저는 인정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가 결국 낙마했다. 이 경우, “사과하고 싶다”는 표현 역시 ‘사과 아닌 사과’란다. 사과하려면 쿨하게 ‘사과한다’고 단정해야 맞다는 얘기다. “살 빼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실질적인 체중감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두 번째는 ‘그러나, 하지만’ 같은 접속 부사를 쓰지 말라는 것이다. “미안합니다”라는 말 뒤에 붙는 “하지만”은 구차한 변명으로 이어지게 되고, 결국 사과 아닌 사과로 끝나고 만다. 한 철학자는 “사과란 동의를 전제로 하는데, ‘그러나’라는 접속사는 의견 불일치를 나타내기 위해 쓰는 표현”이라 지적한다. 9.11 테러 진상조사위원회에서 미국 NSC 대테러 자문담당관인 리처드 클라크는 ‘그러나’ 대신 ‘그리고’를 써서 이렇게 ‘쿨하게’ 사과했다. “정부가 여러분을 실망시켰습니다. 여러분을 보호할 사람들이 여러분을 실망시켰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을 실망시켰습니다. 이런 실패와 실망에 대해 여러분의 용서와 이해를 구합니다.”

세 번째는 “실수가 있었습니다”라는 식의 수동태 사과다. 일종의 전략적 모호성(deliberate ambiguity)을 깔고 있는 사과인 셈인데, 이런 경우 사과의 주체가 누구인지 애매모호하다. 저자들은 이를 두고 “워싱턴의 언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정치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바다. 헨리 키신저는 전쟁범죄 관련 의혹에 대해 “내가 일했던 행정부에 의해서 실수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뭐가 뭔지 도대체 요령부득의 언어인 셈이다. 이는 비난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는 사과의 방식으로 “실수는 있었으나 내가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비겁한 사과다. 이런 사과를 듣는 사람은 분노 게이지가 더 치솟게 마련이다.

언어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모여 바람직한 사과의 내용과 방식에 대해 연구를 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1) 사과의 앞 뒤로 변명을 붙이지 마라(“미안해, 하지만 네가 약속을 너무 촉박하게 잡았잖아”) 2) 무엇이 미안한지 구체적으로 표현하라. (그냥 ‘미안해’가 아니라, “내가 약속을 까먹는 바람에 널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3)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의미로 “내가 잘못 했어”라고 명확히 표현해라. 4)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개선의 의지나 보상의사를 표현하라. 5) 재발방지 약속을 해라.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해 놓고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면 외려 무책임해 진다. 정말 방지를 해야 한다.) 6) 쉽지 않지만 용서를 구하라. (“나를 용서해 주겠니?”라는 말을 하라는 것인데, 이거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여섯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방식의 사과를 종합하면 이렇다 : 지난번 전화로 정보를 알려주기로 해놓고, 잊어 버린거 정말 미안해. (유감과 사과의 내용)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책임),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할 게(재발방지 약속), 조금이라도 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알려줘(개선책 제시). 그런데, 저자들이 주장하는 이런 ‘이상적 사과’를 보니, 평균적 한국인이라면 입밖으로 드러내기에 조금은 민망하다 느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이 했던 사과를 위의 기준으로 평가해보면 어떨까? 짐작컨대, 그리 만족할 만한 점수는 아닐 것 같다. 대통령의 ‘사과’ 이후에도 여론이 사그러들지 않았던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는 셈이다.

책 내용을 요약하고 보니, 커뮤니케이션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부부 혹은 연인 사이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두 사람 사이의 사소한 언쟁이 대형 참사로 이어졌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겠는가. 가장 좋은 것은 사과할 일 만들지 않는 것이고, 그런 일 있다하더라도, 제대로 ‘쿨하게’ 사과하면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만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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