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 가상 세계의 아이들
에티엔 바랄 지음, 송지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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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벨 옵세르바퇴르’ 기자로 주일 특파원을 지낸 에티엔 바랄은 현대 일본 사회의 독특한 특성을 해명하기 위해 ‘오타쿠’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오타쿠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전문가적 안목과 지식을 가진 열혈 매니어를 뜻한다. 애니메이션과 게임 등 문화산업 분야에서 일본이 보여준 성취는 바로 이들의 존재 덕분이다. 에티엔 바랄이 서울에 부임한다면 그는 ‘사이버 폐인’을 탐구대상으로 삼을 지도 모른다. 초고속 인터넷 가입률 세계 1위의 한국에서 사이버 폐인들은 전세대와는 전혀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며, 한국의 문화를 밑바닥에서부터 서서히 바꿔 나가고 있다.

‘폐인’은 “병이나 못된 버릇으로 몸을 망친 사람”을 뜻하는 부정적 뉘앙스의 말이다. 거기에 ‘사이버’라는 말이 붙었으니 ‘사이버 폐인’은 인터넷 중독으로 몸을 망친 사람을 뜻할 것이다. 이들은 여러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디지털 노마드 등으로 불리다 최근에는 블로그족·디카족 등 활동유형에 따라 새로운 종족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사이버 폐인’을 일컬어 ‘대한민국 신인류’라고 부른다. 이 말속에 스민 부정적 의미를 걷어내고, 거기서 기성세대와는 다른 세대적 정체성을 찾고 있다. 황교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변화가 어떤 특성을 갖는지를 해부한다. 그에 따르면, 이들은 “머지않아 우리 사회의 주류집단으로 등장할 것”이다.

저자는 최근 몇년 동안 사이버 공간에 대한 심리학적 탐구를 지속해 왔다. 한국인의 행동특성과 생활양식을 규명해온 그에게 이 공간은 오늘날 한국인의 삶과 문화를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한국은 인터넷이 대통령을 뽑은 나라가 아니던가. 저자는 사이버 폐인들을 네버랜드를 찾아가는 동화 피터팬 속의 웬디에 비유한다. 이 ‘웬디들’이 만드는 세상에 대해 그는 낙관한다. “사이버 신인류가 새로운 주류집단으로 등장하면 우리 사회는 다양한 생각과 행동을 더욱 더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그런 한국사회라면 세대 전환이라는 자연현상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겠지요.” 최근 국회 정치개혁특위가 사이버 공간을 통제하고 검열하기 위해 내놓은 ‘인터넷 실명제’는 이들의 문화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심리분석과 생태연구는 상세하고도 흥미롭다.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을 우려하고, ‘인터넷 중독증’을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성세대에게는 상당한 계몽의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삶에 중독됐다’라는 말이 없듯이 인터넷이 삶인 이들에게 ‘인터넷 중독증’이란 말은 애시당초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사이버 폐인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책일 지도 모른다. 인류학자가 펴낸 책이 정작 연구 주제가 된 부족들에게는 읽히지 않듯이 말이다. 게다가 사이버 폐인들이 만드는 문화는 끝없이 변동중이기 때문이다. 비평가들과 학자들이 따라잡기에는 이들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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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사 서남동양학술총서 25
김한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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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사’라는 제목은 낯설기 그지없다. 우리에게 요동(遼東)은 만주 일대의 옛 고구려 영토를 가리키는 지역 명칭일 뿐이었다. 고구려와 여진·거란·만주족 등이 거주했던 지역일 뿐 거기에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지속되는 어떤 역사를 상상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중간에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고구려사는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닌 요동사’라는 저자의 주장은 자못 논쟁적이다. 이 책은 민족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학계와 과잉 애국주의로 소수민족의 역사까지도 자신들의 역사로 아우르려는 중국 사학계 양편을 겨냥한다. 동아시아사에 관한 일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인 셈이다.

저자인 김한규 서강대 사학과 교수가 제시하는 것은 한국 혹은 중국이라는 ‘국가’의 역사로 환원되지 않는 ‘요동 역사공동체’라는 개념이다. 저자는 7백4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통해 요동 지역의 역사에 드리워진 ‘민족국가적 관점’이라는 장막을 걷어내려 한다. “고구려라는 국가는 바로 이 요동이라는 제3의 영역에서 건립된 국가였다. 즉 고구려는 한국의 국가나 중국의 국가가 아닌, 요동의 국가로 역사상에 출현했다.”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민족주의적 역사 연구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같은 주장에 내포된 폭발력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벌써부터 ‘요동 역사공동체’라는 저자의 시각은 한국 사학자들의 비판목록에 올라 있다.

이 책의 출간은 중국 사학계 입장에서도 불편한 일일 것이다. ‘역사상의 요동’이라는 개념을 담은 저자의 발표문은 한·중 국제 학술대회에서 “한·중 우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발표를 거부당했다. 저자의 또다른 저작 ‘한중관계사’는 중국어 번역을 마치고도 “제국주의 침략에 복무하고 민족 분열주의의 주장을 위한 설법”으로 평가돼 중국에서 출간할 수 없었다. 역사학이 현실정치에 상당한 정도로 복속돼 있는 중국 사학계의 현실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쪽 사정도 비슷하지만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고구려사를 포함한 요동 지역의 역사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고 있다.

물론 저자가 새로운 사실을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사료로 직접 사실을 전달하는 서술양식”을 택했다는 게 김교수의 말이다. 말하자면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라는 역사가 랑케식 실증주의인 셈이다. 한·중 양측에 현존하는 1차 사료들을 토대로 요하(遼河) 유역에 예맥계의 조선·부여·고구려, 숙신계의 말갈·여진·만주, 동호계의 선비·거란·몽골 등 여러 세력이 명멸했다는 것을 논증해 내고 있다. 그는 고구려의 경우 요동국가로 출현했다가 평양성으로 천도하면서 요동과 한국을 아우른 통합국가로 발전했다고 본다. 이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대해 한·중 역사학계가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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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람 2011-08-20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제목이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까 만주 몽골의 역사군요. 김한규의 견해는 소수의견 이긴 하지만 아주 새로운 의견은 아닙니다.

유명한 것은 것은 프랑스 사학자인 르네 그루세가 쓴 유라시아 유목제국사』(L'Empire des Steppes, 1939. 김호동·유원수·정재훈 옮김, 서울, 사계절, 1998.) 인데 출판연도가 1939년이라는게 놀랍죠. 고유명사가 많아서 읽기가 괴롭긴합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청사를 지배자인 만주 민족의 입장에서 보는 움직임이 있는데 국내에 번역된 것은 이블린 S. 로스키, 구범진 옮김, 최후의 황제들 – 청 황실의 사회사 가 있읍니다

지금까지의 중국역사 기술이 중국 한민족 중심이었다면 북방민족을 하나의 큰 변수로 보고 다시 역사를 기술하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아주 바람직하다고 보고 흥미진진하기도 합니다. 중국사에 대한 큰 시각 교정효과가 있고 한국사도 다시 보입니다.

번역 안된 것으론 Peter Perdue 의 China March West 가 있는데 강희제의 신강지역 점령이 주제입니다. 소위 중국의 동북공정이 뿌리가 어디 있나 알 수 있는 책이죠.

다만 너무 전문적이어서 청사나 중국사에 관심이 없으면 읽기 힘든 점이라는 게 단점입니다. 님께서 두꺼운 책을 힘들게 읽었을 것 같군요. 흥미있어 보이는 책인데 미국에서 이 책을 구하는 건을 그림의 떡일것 같군요.

모든사이 2011-08-21 09:44   좋아요 0 | URL
이 책이 나온지 벌써 꽤 됐으니 이제는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새롭다는 것은 아마 이런 시각이 '국내 학자'에 의해서 제기되었다는 점일 것 같습니다. 외국의 학자들은 더 '보편적' 시각에서 볼 수 있을 테니 말이지요..
 
라스트 댄스
귄터 그라스 지음, 이수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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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0대 중반을 넘어선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는 ‘노익장’을 과시한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이리 와, 나와 춤춰 주오, 내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한, 이리 와 내 곁에 누워주오, 나의 하나이자 전부인 그것이 일어서는 한”, 그리고 “이리 와 나를 지켜봐주오. 내가 물구나무 설 수 있는 지”라는 것이다. 춤과 섹스는 생의 열정을 가장 생동적으로 보여주는 몸짓, 그는 이 행위에 열광하고 있다. ‘물구나무 서기’는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거꾸로 세웠던 것처럼,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의 좌파적인 사유를 지속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 책은 귄터 그라스가 시와 그림을 통해 생의 열정과 환희를 노래하는 시화집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귄터 그라스는 지난해 한국을 방문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인물이다. ‘양철북’이나 ‘나의 세기’ 등 그의 대표작들은 번역된 지 이미 오래다. 한국에는 그의 소설작품만이 소개됐지만 그는 미술대학에서 동판화와 석판화를 배운 조각가이자, 판화가이며, 시인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가 쓰고 그린 36편의 시와 32점의 그림을 싣고 있다.

연필과 목탄·색연필을 사용해 그린 그림들은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격정과 열망이 흘러 넘친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통의 표정을 짓거나 열락에 빠져 있다. 혹은 집단적 윤무를 하거나 바닥에 쓰러져 격렬한 정사를 나눈다. 이 그림들에 담긴 것은 진한 에로스적 욕망이다. 탱고나 왈츠처럼 리듬감 있게 전개되는 그의 시도 남녀의 몸짓을 따라간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두 그루 너도밤나무/부드럽게 움직인다. 춤추는 그들 주위로/내가 원을 그리며 돌자마자//미끈미끈한 줄기들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때마침 한줄기 바람 불어와/살갗을 어루만진다”(‘짝짓기하다’). 쓰러질 듯 격렬하게 춤추던 남녀는 이윽고 스스럼없이 성적 환희로 치닫는다. “먼저 유리잔들이, 다음에는 우리가/듀엣으로 쨍그랑거렸다/그러나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았다”(‘격렬한 부딪침’). 하지만 그와 동시대를 살던 철학자 바타이유가 “에로티즘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끈적이는 에로스 뒤에는 죽음에의 욕망인 타나토스가 엄습한다. “고통은 다만 가면일 뿐, 분장한 채로 우리는/미끄러진다, 가없는 평면 위를/발꿈치까지 따라온 죽음 위를.”

그렇다고 이 책이 말년을 앞둔 노작가의 쾌락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눈먼 폭탄은/숨쉬는 모든 것을 좋아하지”나 “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장군들은 이제/스크린 위에서 명성을 떨치는구나/그건 너무도 힘겨웠지/검둥이로서 자신의 역할을 기어코 흰색보다 더 희게 만드는 일이란/(…중략)/정복자 보스들의 글로벌 비즈니스를 위하여”(‘밀리터리 블루스’)같은 구절에서 파월 미 국무장관과 이라크전을 연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거장에게 춤은 삶의 굴곡과 환희에 대한 은유다. 하지만 그 열락 속에서도 ‘전쟁의 세기’를 살아가는 작가의 깨어 있는 사유는 멈추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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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 철도로 돌아본 근대의 풍경
박천홍 지음 / 산처럼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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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차의 화륜이 굴면 여러 차의 바퀴가 따라서 모두 굴게 되니 우레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같이 날뛰었다. 한 시간에 3, 4백리를 달린다고 하였는데, 좌우에 산천초목 가옥 인물이 보이기는 하나 앞에 번쩍 뒤에 번쩍함으로 도저히 잡아보기가 어려웠다.” 1876년 일본 수신사로 요코하마(橫濱) 열차에 탑승했던 김기수에게 기차는 경이의 대상이었다. ‘은둔의 왕국’ 조선에서 살아온 대다수의 조선인들처럼 그에게도 ‘근대’는 무엇보다 기차와 같은 신문물의 도래로 받아들여졌다. ‘근대’는 사학자들의 책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민중들이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는 생활의 문제였을 것이다.

이 책은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온 근대의 역사를 조명한다. 20세기 초 근대 한국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근대 문물이 어떤 충격과 놀라움, 그리고 생활상의 변화를 가져 왔는지를 실증적으로 추적하고 있는 책이다. 타계한 서지학자 고(故) 이종학 선생이 평생 수집해온 3백90여장의 근대사 관련 희귀사진과 도판, 그리고 당대의 풍속을 그린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1백여년 전 조선인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해 내고 있다. 이 책은 20세기 초반의 역사를 일제의 침략과 민족해방투쟁의 점화라는 시각으로 해석하는 단선적 접근을 거부한다. 근대사를 책상머리에서 끌어내 당대 민중들이 거닐던 거리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일간지 문화부 기자인 저자는 철도·전기·통신·도로·상가·탈것에 주목한다. 매천 황현은 당시 “10년만에 다시 한양성에 다다르니/오로지 남산만이 옛 푸름 여전하구나/길가 유리창엔 전등불 휘황하고/허공을 가로지른 전깃줄 아래 전차 경적이 울린다/수륙만리 어느 곳에나 신문물뿐이구나”하고 읊조렸다. 이들 신문물은 일본이 강요한 서구식 근대화의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오랫동안 지속돼온 조선인의 일상을 변화시킨 것이기도 했다.

저자는 이들을 ‘뒤틀린 근대성의 상징들’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2부는 각 지역의 모습을 조명하면서 근대 문물이 조선 팔도를 어떻게 뒤바꿔 놓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함경도는 공업화 기지가 됐으며, 충청도와 전라도에는 철도의 종착점에 식량 수탈 항구가 건설됐다. 훗날 미국의 도시학자 마이어가 “인류 역사에서 서울만큼 빠르고 압축적인 성장을 경험한 도시는 없었다”고 말할 만큼 당시 경성은 혁명적 변화의 와중에 놓여 있었다.

어느 소설가의 말마따나 우리는 봉건에서 근대를 지나 다시 탈근대(postmodern)으로 이행하고 있다. 이 책 속에는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활보했던 근대의 거리가 되살아나 있다. 불과 1백년 저쪽의 삶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탈근대적 삶의 뿌리는 아마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한 재야사학자의 집요한 수집벽과 남다른 역사의식을 지닌 기자의 성실함이 우리를 근대적 삶의 기원으로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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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
배병삼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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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에세이는 저자의 매력과 더불어 글맛이 살아 있어야 한다.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나온 문학평론가 김병익씨의 ‘글 뒤에 숨은 글’과 정치학자 배병삼 교수의 ‘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는 고수들의 에세이집이다. 김씨의 책이 ‘스스로를 향한 단상’(부제)을 담고 있다면, 배씨의 책은 그의 전공인 동양 정치사상에서 길어 올린 혜안을 바탕으로 우리사회의 굴곡진 모습을 읽어내고 있다.

4·19세대를 자처하는 김병익씨의 에세이를 관통하는 것은 ‘공감과 열림’이다. 공감과 열림은 자신의 견해를 표나게 내세우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깊이 공명하는 그의 태도를 말한다. 일제 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거쳐 대학시절에 4·19를 맞았고, 유신독재 시기에 기자협회장을 지냈으며, 문학과 지성사를 창립해 척박한 한국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던 인물이 바로 김씨다.

그 특유의 공감과 열림의 태도는 중도적 내지 자유주의적 감수성을 낳았다. “좌파의 이념에 문을 열고 있었지만 어느 한계 너머로는 나아갈 수 없었고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병리에 대한 회의도 지울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고 내게 제시된 이상의 세계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주의자가 한국에 있다면 바로 김씨일 것이다. 한국일보 편집위원인 고종석이 책 뒤에 붙은 헌사에서 “김병익이라는 이름은 한 지식인의 이름을 넘어 한국의 문화사·지성사에 활명(活命)의 원기를 불어넣은 한 세대의 헌걸찬 이름”으로 “이 책의 저자는 세대이자 시대다”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배병삼씨의 책 제목은 ‘타초경사’(打草驚蛇), 곧 ‘변죽을 울려 중앙을 흔든다’는 뜻의 고사성어로 일상에서 부닥친 소소한 사물과 사건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핵심 문제를 거론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가령 그는 동네 목욕탕 화장실에 놓인 스테인리스 대접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명암을 거론한다. 밥상 위의 국그릇에서 화장실에 놓인 재떨이로 영락한 스테인리스는 녹슬지 않는 모습으로 활짝 웃고 있지만, 그 녹슬지 않음(stain-less)속에는 세월의 켜가 빚어내는 그늘도 없고 역사도 없다.

세월에 의해 마모돼가는 아날로그가 아니라 영원히 현재만을 비추는 디지털과 닮았다는 것이다. 옷로비 사건에서 이탈리아어로 신부를 뜻하는 ‘La Sposa’를 ‘라스포 의상실’로 ‘오역’한 수사관에게서 언어의 토착화를 위해 애쓰는 ‘성실함의 미덕’을 읽어낸다거나 멍게 장수의 칼솜씨에서 학문의 도(道)를 발견하는 그의 시선은 예리하되 그윽한 통찰로 빛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제목을 빌리자면, 두권의 책은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으로 촉촉히 배어 있다. 삶의 다채로운 모습을 균형잡힌 사유의 언어로 풀어내는 그들의 글은 독특한 인문학적 향기를 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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