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
배병삼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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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에세이는 저자의 매력과 더불어 글맛이 살아 있어야 한다.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나온 문학평론가 김병익씨의 ‘글 뒤에 숨은 글’과 정치학자 배병삼 교수의 ‘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는 고수들의 에세이집이다. 김씨의 책이 ‘스스로를 향한 단상’(부제)을 담고 있다면, 배씨의 책은 그의 전공인 동양 정치사상에서 길어 올린 혜안을 바탕으로 우리사회의 굴곡진 모습을 읽어내고 있다.

4·19세대를 자처하는 김병익씨의 에세이를 관통하는 것은 ‘공감과 열림’이다. 공감과 열림은 자신의 견해를 표나게 내세우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깊이 공명하는 그의 태도를 말한다. 일제 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거쳐 대학시절에 4·19를 맞았고, 유신독재 시기에 기자협회장을 지냈으며, 문학과 지성사를 창립해 척박한 한국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던 인물이 바로 김씨다.

그 특유의 공감과 열림의 태도는 중도적 내지 자유주의적 감수성을 낳았다. “좌파의 이념에 문을 열고 있었지만 어느 한계 너머로는 나아갈 수 없었고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병리에 대한 회의도 지울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고 내게 제시된 이상의 세계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주의자가 한국에 있다면 바로 김씨일 것이다. 한국일보 편집위원인 고종석이 책 뒤에 붙은 헌사에서 “김병익이라는 이름은 한 지식인의 이름을 넘어 한국의 문화사·지성사에 활명(活命)의 원기를 불어넣은 한 세대의 헌걸찬 이름”으로 “이 책의 저자는 세대이자 시대다”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배병삼씨의 책 제목은 ‘타초경사’(打草驚蛇), 곧 ‘변죽을 울려 중앙을 흔든다’는 뜻의 고사성어로 일상에서 부닥친 소소한 사물과 사건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핵심 문제를 거론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가령 그는 동네 목욕탕 화장실에 놓인 스테인리스 대접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명암을 거론한다. 밥상 위의 국그릇에서 화장실에 놓인 재떨이로 영락한 스테인리스는 녹슬지 않는 모습으로 활짝 웃고 있지만, 그 녹슬지 않음(stain-less)속에는 세월의 켜가 빚어내는 그늘도 없고 역사도 없다.

세월에 의해 마모돼가는 아날로그가 아니라 영원히 현재만을 비추는 디지털과 닮았다는 것이다. 옷로비 사건에서 이탈리아어로 신부를 뜻하는 ‘La Sposa’를 ‘라스포 의상실’로 ‘오역’한 수사관에게서 언어의 토착화를 위해 애쓰는 ‘성실함의 미덕’을 읽어낸다거나 멍게 장수의 칼솜씨에서 학문의 도(道)를 발견하는 그의 시선은 예리하되 그윽한 통찰로 빛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제목을 빌리자면, 두권의 책은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으로 촉촉히 배어 있다. 삶의 다채로운 모습을 균형잡힌 사유의 언어로 풀어내는 그들의 글은 독특한 인문학적 향기를 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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