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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사 ㅣ 서남동양학술총서 25
김한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요동사’라는 제목은 낯설기 그지없다. 우리에게 요동(遼東)은 만주 일대의 옛 고구려 영토를 가리키는 지역 명칭일 뿐이었다. 고구려와 여진·거란·만주족 등이 거주했던 지역일 뿐 거기에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지속되는 어떤 역사를 상상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중간에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고구려사는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닌 요동사’라는 저자의 주장은 자못 논쟁적이다. 이 책은 민족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학계와 과잉 애국주의로 소수민족의 역사까지도 자신들의 역사로 아우르려는 중국 사학계 양편을 겨냥한다. 동아시아사에 관한 일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인 셈이다.
저자인 김한규 서강대 사학과 교수가 제시하는 것은 한국 혹은 중국이라는 ‘국가’의 역사로 환원되지 않는 ‘요동 역사공동체’라는 개념이다. 저자는 7백4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통해 요동 지역의 역사에 드리워진 ‘민족국가적 관점’이라는 장막을 걷어내려 한다. “고구려라는 국가는 바로 이 요동이라는 제3의 영역에서 건립된 국가였다. 즉 고구려는 한국의 국가나 중국의 국가가 아닌, 요동의 국가로 역사상에 출현했다.”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민족주의적 역사 연구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같은 주장에 내포된 폭발력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벌써부터 ‘요동 역사공동체’라는 저자의 시각은 한국 사학자들의 비판목록에 올라 있다.
이 책의 출간은 중국 사학계 입장에서도 불편한 일일 것이다. ‘역사상의 요동’이라는 개념을 담은 저자의 발표문은 한·중 국제 학술대회에서 “한·중 우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발표를 거부당했다. 저자의 또다른 저작 ‘한중관계사’는 중국어 번역을 마치고도 “제국주의 침략에 복무하고 민족 분열주의의 주장을 위한 설법”으로 평가돼 중국에서 출간할 수 없었다. 역사학이 현실정치에 상당한 정도로 복속돼 있는 중국 사학계의 현실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쪽 사정도 비슷하지만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고구려사를 포함한 요동 지역의 역사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고 있다.
물론 저자가 새로운 사실을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사료로 직접 사실을 전달하는 서술양식”을 택했다는 게 김교수의 말이다. 말하자면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라는 역사가 랑케식 실증주의인 셈이다. 한·중 양측에 현존하는 1차 사료들을 토대로 요하(遼河) 유역에 예맥계의 조선·부여·고구려, 숙신계의 말갈·여진·만주, 동호계의 선비·거란·몽골 등 여러 세력이 명멸했다는 것을 논증해 내고 있다. 그는 고구려의 경우 요동국가로 출현했다가 평양성으로 천도하면서 요동과 한국을 아우른 통합국가로 발전했다고 본다. 이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대해 한·중 역사학계가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