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댄스
귄터 그라스 지음, 이수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70대 중반을 넘어선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는 ‘노익장’을 과시한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이리 와, 나와 춤춰 주오, 내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한, 이리 와 내 곁에 누워주오, 나의 하나이자 전부인 그것이 일어서는 한”, 그리고 “이리 와 나를 지켜봐주오. 내가 물구나무 설 수 있는 지”라는 것이다. 춤과 섹스는 생의 열정을 가장 생동적으로 보여주는 몸짓, 그는 이 행위에 열광하고 있다. ‘물구나무 서기’는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거꾸로 세웠던 것처럼,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의 좌파적인 사유를 지속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 책은 귄터 그라스가 시와 그림을 통해 생의 열정과 환희를 노래하는 시화집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귄터 그라스는 지난해 한국을 방문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인물이다. ‘양철북’이나 ‘나의 세기’ 등 그의 대표작들은 번역된 지 이미 오래다. 한국에는 그의 소설작품만이 소개됐지만 그는 미술대학에서 동판화와 석판화를 배운 조각가이자, 판화가이며, 시인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가 쓰고 그린 36편의 시와 32점의 그림을 싣고 있다.

연필과 목탄·색연필을 사용해 그린 그림들은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격정과 열망이 흘러 넘친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통의 표정을 짓거나 열락에 빠져 있다. 혹은 집단적 윤무를 하거나 바닥에 쓰러져 격렬한 정사를 나눈다. 이 그림들에 담긴 것은 진한 에로스적 욕망이다. 탱고나 왈츠처럼 리듬감 있게 전개되는 그의 시도 남녀의 몸짓을 따라간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두 그루 너도밤나무/부드럽게 움직인다. 춤추는 그들 주위로/내가 원을 그리며 돌자마자//미끈미끈한 줄기들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때마침 한줄기 바람 불어와/살갗을 어루만진다”(‘짝짓기하다’). 쓰러질 듯 격렬하게 춤추던 남녀는 이윽고 스스럼없이 성적 환희로 치닫는다. “먼저 유리잔들이, 다음에는 우리가/듀엣으로 쨍그랑거렸다/그러나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았다”(‘격렬한 부딪침’). 하지만 그와 동시대를 살던 철학자 바타이유가 “에로티즘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끈적이는 에로스 뒤에는 죽음에의 욕망인 타나토스가 엄습한다. “고통은 다만 가면일 뿐, 분장한 채로 우리는/미끄러진다, 가없는 평면 위를/발꿈치까지 따라온 죽음 위를.”

그렇다고 이 책이 말년을 앞둔 노작가의 쾌락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눈먼 폭탄은/숨쉬는 모든 것을 좋아하지”나 “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장군들은 이제/스크린 위에서 명성을 떨치는구나/그건 너무도 힘겨웠지/검둥이로서 자신의 역할을 기어코 흰색보다 더 희게 만드는 일이란/(…중략)/정복자 보스들의 글로벌 비즈니스를 위하여”(‘밀리터리 블루스’)같은 구절에서 파월 미 국무장관과 이라크전을 연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거장에게 춤은 삶의 굴곡과 환희에 대한 은유다. 하지만 그 열락 속에서도 ‘전쟁의 세기’를 살아가는 작가의 깨어 있는 사유는 멈추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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