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 철도로 돌아본 근대의 풍경
박천홍 지음 / 산처럼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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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차의 화륜이 굴면 여러 차의 바퀴가 따라서 모두 굴게 되니 우레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같이 날뛰었다. 한 시간에 3, 4백리를 달린다고 하였는데, 좌우에 산천초목 가옥 인물이 보이기는 하나 앞에 번쩍 뒤에 번쩍함으로 도저히 잡아보기가 어려웠다.” 1876년 일본 수신사로 요코하마(橫濱) 열차에 탑승했던 김기수에게 기차는 경이의 대상이었다. ‘은둔의 왕국’ 조선에서 살아온 대다수의 조선인들처럼 그에게도 ‘근대’는 무엇보다 기차와 같은 신문물의 도래로 받아들여졌다. ‘근대’는 사학자들의 책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민중들이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는 생활의 문제였을 것이다.

이 책은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온 근대의 역사를 조명한다. 20세기 초 근대 한국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근대 문물이 어떤 충격과 놀라움, 그리고 생활상의 변화를 가져 왔는지를 실증적으로 추적하고 있는 책이다. 타계한 서지학자 고(故) 이종학 선생이 평생 수집해온 3백90여장의 근대사 관련 희귀사진과 도판, 그리고 당대의 풍속을 그린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1백여년 전 조선인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해 내고 있다. 이 책은 20세기 초반의 역사를 일제의 침략과 민족해방투쟁의 점화라는 시각으로 해석하는 단선적 접근을 거부한다. 근대사를 책상머리에서 끌어내 당대 민중들이 거닐던 거리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일간지 문화부 기자인 저자는 철도·전기·통신·도로·상가·탈것에 주목한다. 매천 황현은 당시 “10년만에 다시 한양성에 다다르니/오로지 남산만이 옛 푸름 여전하구나/길가 유리창엔 전등불 휘황하고/허공을 가로지른 전깃줄 아래 전차 경적이 울린다/수륙만리 어느 곳에나 신문물뿐이구나”하고 읊조렸다. 이들 신문물은 일본이 강요한 서구식 근대화의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오랫동안 지속돼온 조선인의 일상을 변화시킨 것이기도 했다.

저자는 이들을 ‘뒤틀린 근대성의 상징들’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2부는 각 지역의 모습을 조명하면서 근대 문물이 조선 팔도를 어떻게 뒤바꿔 놓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함경도는 공업화 기지가 됐으며, 충청도와 전라도에는 철도의 종착점에 식량 수탈 항구가 건설됐다. 훗날 미국의 도시학자 마이어가 “인류 역사에서 서울만큼 빠르고 압축적인 성장을 경험한 도시는 없었다”고 말할 만큼 당시 경성은 혁명적 변화의 와중에 놓여 있었다.

어느 소설가의 말마따나 우리는 봉건에서 근대를 지나 다시 탈근대(postmodern)으로 이행하고 있다. 이 책 속에는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활보했던 근대의 거리가 되살아나 있다. 불과 1백년 저쪽의 삶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탈근대적 삶의 뿌리는 아마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한 재야사학자의 집요한 수집벽과 남다른 역사의식을 지닌 기자의 성실함이 우리를 근대적 삶의 기원으로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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