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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정치와 국가복지 - 신(new)자유주의에서 신(neo)자유주의로 ㅣ 아산재단 연구총서 313
고세훈 지음 / 집문당 / 2011년 5월
평점 :
조선일보의 ‘자본주의 4.0’ 시리즈는 사실 새로울 게 하나도 없는 내용이다. 비정규직 문제, 워킹푸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등의 화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진보언론이나 시민단체에 의해 제기되었던 문제들이다. 초기자본주의, 케인즈주의,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버전의 자본주의가 필요하다는 게 조선의 주장인데, 시민단체와 다른 것은 그것을 ‘4.0’는 섹시한 이름을 붙이는 포장술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뭐, 그것도 영국 언론인의 책 제목에서 훔친 것이니 사실 조선의 독창성은 별로 없다고 봐야 한다.) 나로서는 그동안 한국사회의 핵심적 화두였던 이 문제들을 좌파들의 선동쯤으로 치부하다 이제야 심각한 표정을 하고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조선의 뻔뻔스러움이 역겹다. 한편으로는, 조선마저도 이 문제들의 해결을 주장하고 나선 마당이니 신자유주의의 극복에 대해서는 얼추 사회적 합의가 가능하리라는 역설적 낙관도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신자유주의의 극복은 결국 맹목적 시장주의에 대한 견제와 복지의 확충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벤담주의와 복지국가 전통
고세훈의 <영국정치와 복지국가>(집문당)을 읽은 것은 신자유주의 담론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한국사회에서 뒤늦게 등장한 이른바 ‘복지담론’ 때문이다. 고세훈은 <영국노동당사>(나남)라는 방대하고도 훌륭한 책을 쓴 정치학자이고, 최근에는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후마니타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앞의 책은 반 이상을 읽었고, 뒤의 책은 아마 1-2장 정도를 보고 덮었던 듯 싶다. 그는 영국 노동당사를 서술하면서 19세기 후반 안개가 짙은 어느 날 열린 사회주의들의 회합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서술은 참으로 인상적이어서 책의 주요 내용은 다 까먹었어도 그 대목만은 기억에 선명하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고세훈이 건조한 정치학자가 아니라 문학적 세례를 받은 축축한(wet) 감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고려대 교수라는 점을 제외하고도, 정당정치의 활성화를 촉구한다는 점에서 넓게 보아 최장집 사단의 일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영국의 복지국가적 전통을 서술하기 위해 19세기 벤담주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대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는 국가의 개입이 필수적이라는 벤담의 주장이야말로 영국적 복지국가의 사상적 배경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벤담주의는 “행복의 계산”에 기초한 다분히 산술적인 “효용”논리에 입각해 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의 행복이나 고통은 동일한 무게를 지니며, 국가적 차원에서 그 ‘총합’을 증가시킨다면 행복의 총량은 늘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저자가 소개하는 벤담주의의 웃기는 점 중의 하나는 “노예의 이익을 고려하면서도 노예 소유주가 얻는 행복의 양이 노예들의 고통의 총합을 초과한다면 노예사회도 효용의 이름으로 옹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벤담에게 빈곤의 문제는 하층민의 도덕적 결함에 기인하는 것으로, 재분배 정책은 “근로의 동기를 소멸시킬 뿐”인 것이다. 노동계급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돼야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제러미 벤담이 파놉티콘의 설계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같은 과감한 주장은 크게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곱씹어봐야할 것은 빈곤의 문제를 개인의 윤리적 문제 혹은 근로의지의 부족 탓으로 돌리는 사고방식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점일 것이다. 21세기 한국사회에는 19세기 벤담주의자가 아직도 득시글대고 있다. 오늘자 경향신문에 실린 김우창 선생의 글(http://goo.gl/NATYT)도 그 합리적 핵심을 충분히 이해할 만함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개인윤리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사고방식으로 해석된다. 지금은 “사람의 근원적 도덕의식”보다 “제도”가 선행되어야 하는 때가 아닌가. 벤담주의가 이후 영국 복지정치에 남긴 유산이라면 국가가 개입하여 바람직한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는 사회공학적 원리를 제시했다는 점에 있다. 그는 자유방임을 주장했지만 효용원리에 따라 법체제를 교정함으로써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 이는 자유방임(laissez-faire) 자본주의 시대에 국가개입 사상의 단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빅토리아조 전반기에는 벤담주의의 영향하에서 선거권을 비롯한 의회개혁, 수정구빈법, 어린이 노동을 금지한 공장개혁, 교육개혁 등 일련의 개혁조치들이 실행되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디킨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구빈소가 왜 그렇게 처참한 몰골이 되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자유방임을 넘어 국가개입으로
영국의 19세기 말은 ‘신(new) 자유주의’ 시대로 불리는데, 이유는 그 이전의 자유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 교정하려는 노력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와서 자유방임이라는 신화는 점차 위축되고 광범위한 국가개입이 이뤄지게 된다. 이 시기의 이론가는 그 유명한 존 스튜어트 밀이다. “사적 개인이 효율적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정부 개입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단일한 정치경제원칙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 즈음의 집권당인 영국 자유당(whig party)은 국가 재정정책과 부자들에 대한 과세를 도구로 삼아 부의 공정한 분배를 이루고자 했다. 저자는 1905년-1914년 자유당 정부를 영국 역사에서 복지국가로의 도약을 이룩한 최초의 정부로 평가한다. 노동쟁의법을 도입하고, 1914년에는 빈곤아동을 위한 무료급식을 의무화했다.(정확하게 영국 자유당이 도입한 것은 ‘선별적 무상급식’이지만, 우리는 그조차도 거의 1백년이나 뒤늦은 셈이다.) 65세 이상 고령자에게 노령연금을 지급하고(이것도 우리는 참여정부에 와서 시작되었다.) 1912년에는 최저임금법이 제정되었다. 1911년에는 건강보험과 실업보험을 축으로 하는 국민보험이 도입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자유당 정부가 자발적으로 개혁조치들을 취한 것이 아니라 점이다. 그 이유는 바로 “살아남으려면 노동계급의 표를 끌어내야"하기 때문이었다. 자유당 정부는 점차 자본주의 체제의 도전세력으로 등장하는 노동계급을 달래고 떠오르는 사회주의를 피하기 위해 복지입법을 주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유당의 이런 야심만만한 정치적 시도는 1923년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급격하게 몰락하게 된다. 자유당의 하위파트너였던 노동당에게 수권의 자리를 빼앗기면서 보수-자유 양당 체제는 영원히 사라지고 대신 보수-노동이라는 새로운 양당체제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 자유당의 몰락과 노동당의 부상이라는 역사적 현실은 노동계급의 성장에 따른 필연이라는 점, 계급적으로 모호한 정당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어쩌면 한국사회의 ‘계급’이 구조화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민주당이나 참여당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영국 노동당은 1900년에 창당해 23년만에 집권당에 이르게 되는데, 이런 점에서 한국의 진보정당들도 희망을 가져봄직하다.(물론 강남좌파만이 아니라 ‘강북우파’가 등장하는 마당에 계급정치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보수당의 온정주의와 복지국가로의 도약
이 책의 2장은 보수당에 의해 진행된 복지정책을 다루고 있다. 영국 보수당의 전통에는 일국보수주의(one nation conservatism)가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빈민과 하층민을 포용해야 한다는 영국 보수당의 ‘온정주의’를 의미한다. 보수당이 중산층와 부유층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면, 그것은 이국보수주의(two-nation)가 될 것이다. 영국 보수주의의 사상적 원조는 그 유명한 에드먼드 버크인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프랑스 혁명이 만들어낸 무질서와 난동에 염증을 느끼고 보수주의의 사상과 철학을 가다듬은 인물이다. 그의 입장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귀족이 가진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강조하는 것이다. 보수당의 복지정책은 바로 그런 귀족적 책임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차 대전 이전까지의 영국 보수당 정치 가운데 기억할만한 정치가는 벤저민 디즈레일리다. 보수당 정부의 재무장관과 수상을 지낸 디즈레일리는 맨체스터 자유무역회관에서 2병의 브랜디를 마시며 3시간 동안 진행된 연설에서 대외적으로 영국 제국의 건설과 대내적으로 ‘인민의 조건’의 개선을 주장한다. (정치인이 술 마시면서 하는 연설이라, 이런 낭만이라니!) 뒤이은 수정궁 연설에서는 “노동자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공장주들의 잔혹한 행위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은 인민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위대한 토리당의 정책적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편다. 이런 디즈레일리의 주장은 신보수주의, 토리민주주의라고 불린다. 그의 보수당은 노조지도자인 맥도널드로부터 “보수당은 5년동안 자유당이 50년 동안 이룩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노동계급을 위해 해냈다”는 감격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보수당의 이런 개혁과 온정주의적 전통은 노동당의 정책과 충분히 ‘합의’ 가능한 것이다. 고세훈은 2차 대전 이전에 영국 정치에는 “국가 복지를 향한 혹은 국가개입주의를 위한 뚜렷한 ‘합의’가 존재했음을 증명해주었다”고 평가한다.
과연 이같은 온정적 보수주의가 한국사회에서 가능할 것인가. 한나라당에는 디즈레일리와 같은 정치가가 존재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복지’문제에 있어 여․야간의 ‘합의’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아이들에게 밥먹는 문제를 두고도 정치적 타협을 하지 못하고 ‘주민투표’를 하는 마당에 이런 질문은 하나마나한 질문이다. 김호기는 이명박 정부를 두고 봅 제솝의 개념을 빌어 “두개의 국민(two-nation) 국가전략”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국민을 ‘적과 동지’로 나눠 두 개의 선택과 배제를 하는 마당에 전간기 영국 보수당과 같은 일국 보수주의가 싹틀 수 있는 토양은 척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시에 보수당이 오히려 복지를 크게 도약시켰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보수당이 복지개혁을 추진할 때 정치적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에 훨씬 더 과감한 개혁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페이비언주의와 노동당의 복지정책
이 책의 3장은 노동당 정치와 페이비언주의를 다루고 있다. 페이비언협회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회주의 단체로 윌리엄 모리스나 시드니/비어트리스 웹 부부, 버나드 쇼 등이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일 것이다. 저자는 페이비언협회에 대한 애정을 이 책에서 표나게 드러내고 있는데(고세훈은 <페이비언 사회주의>(나남)의 역자이기도 하다), 중산층 지식인들로 구성된 이 협회는 각종 조사와 연구 작업을 통하여 노동계급의 삶의 조건들을 개선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혁명을 거부하고 합법적인 방법을 통하여 체제이행을 할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을 편다. 다분히 중산층 엘리트주의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으나 이들은 정당에의 ‘침투’를 통해 각종 개혁입법들을 도입하고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페이비언주의에 따르면 “국가는 계급편향성을 지닌 것은 아니며 근본적으로 중립적인 도구로서, 활용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유익하고 자비로울 수 있다.” 노동계급에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낙관한다. 마르크스주의의 ‘파국적’ 시각에 비하자면 현실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다른 시각에서는 지나친 낙관론일 수 있겠다.
영국 노동당의 복지정책은 이들 “페이비언들의 인적, 이념적, 방법론적, 정책적 영향력이 넓고도 깊게 드리워져 있다”는 게 저자의 평가다. 하지만 불행히도 2차대전 종전 이전까지 노동당이 집권했던 기간에는 이렇다할 복지정책에서의 진전이 없었다. 노동당의 집권기간 동안의 실적은 “사회주의를 표방한 정당으로서는 물론이고, 전전의 자유당 정부와 보수당 정부가 성취한 것들과도 비교가 무색할 정도로 부실하고 취약했다.” 노동당이 노동계급을 배반하는 역설이 벌어진 것. 페이비언협회와 그 정치적 실천조직으로서의 노동당이라는 문제는 한국사회의 현실에 비춰 대단히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진보정당의 중요한 토대중의 하나는 정책생산능력을 가진 싱크탱크 집단이라는 점, 80년대라면 개량주의라고 비판받았을지 모르지만 정책은 현실을 경유하여 만들어진 실현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반대”라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구호로는 한진중공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김대호(http://www.socialdesign.kr/news/articleView.html?idxno=6415)와 김기원(http://www.socialdesign.kr/news/articleView.html?idxno=6420)의 주장이 내겐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전후 30년의 합의정치와 복지체제의 위기
2차 대전 이후 영국은 전전의 합의의 전통과 전시연립내각의 경험 속에서 보수-노동 양당 간의 ‘합의정치’를 꽃피운다. 영국 복지체계의 기틀이 된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베버리지 보고서는 1943년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거의 수정없이 통과되고, 종전 직후의 노동당 정부에서 추구된 혼합경제의 개입주의적 정책구도를 1951년부터 13년 장기집권한 보수당 정부가 그대로 계승한다. 1979년 대처가 집권하기 이전까지 영국 정치에는 이같은 합의에 기반한 국가개입과 복지정책의 기본골격이 그대로 유지된다. 이 시기 노동당은 자본주의 붕괴론이라는 추상적 이론에서 하강하여 구체적 현실과 접목된 정책을 폄으로써(수정주의) “이론을 정책의 차원으로 끌어내림으로써 이 둘을 일관되고 통합된 지평 위에서 사고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는 1945년 전쟁영웅 처칠을 누르고 집권한 애틀리의 노동당 정부가 이룩한 쾌거다. 애틀리 정부 집권 6년 동안 12개 산업의 고용규모는 전체 노동력의 20%에 달했다고 한다. 가족수당법, 국민보험법, 국민의료법, 산업재해법, 국민부조법 등이 제정되어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화된 복지체계를 갖게 되었다는 평가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전후 영광의 세기도 오래가진 못했다. 윌슨-캘러핸 노동당 정부를 거치면서 ‘전후 30여년의 복지국가적 합의체제’는 파국을 맞게 된다. 스태그플레이션이 심화되면서 노동당은 케인즈주의를 점차 포기해나갔고,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통해 복지지출은 과감히 삭감되었다. 노동당은 1979년 광부파업으로 상징되는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을 거치면서 대처의 보수당 정부에게 권력을 이양하게 된다. 노동당에 의한 합의정치의 몰락과 복지후퇴를 고세훈은 이렇게 정리한다. “영국 노동당 정치는 서유럽 사민주의의 주 내용인 완전고용과 복지급여를 하나의 목적으로 간주하고 여타의 정책적 대안들을 모색하기 보다는, 축적의 위기로 간주된 상황 앞에서 언제나 철회될 수 있는 부차적 수단의 하나로서 취급했다. 특히, 노동당의 복지정책은 경제정책과 별개로 존재하면서 언제나 후자가 설정하는 조건에 의해서 지배되었다. 예컨대, 케인즈주의적 경제관리 정책이 완전고용, 물가안정, 지속적인 성장, 그리고 국제수지의 안정 등을 확보하는데 실패하면 복지국가적 합의자체에 ‘원인무효’가 발생한 것으로 간주된다.”
5장은 대처의 시장자유주의를 다루고 있는데, 영국 보수정치의 역사 속에서 보면 대처주의는 영국 보수주의의 특징이 아니라, 일종의 과격한 일탈로 평가될 수 있다. 우선 대처 자체가 과거의 보수당 정치인들과 출신성분부터 달랐다. 명문 귀족이 아니라 공립학교(grammar school) 출신의 식료품상 딸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상업광고에서 말하듯이 ‘수퍼마켓’ 딸이 아니라, 말하자면 대형마트 운영자의 딸이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전직 시장이기도 했다.) 고세훈은 대처에 이르러 영국 보수주의가 ‘일국 토리이즘’에서 ‘이국대처리즘’으로 전화되었다고 평가한다. 대처는 케인즈주의적 합의, 전후 지속된 영국식 복지체제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데, 이것은 합의보다는 개인적 소신을 앞세우고, 공식적인 내각보다는 비공식적인 보좌진들을 통해서 일을 도모하는 대처의 개인적 스타일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 시기 대처리즘에 대해서 국내에서는 ‘영국병’을 뽑아 버렸다는 식의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실제는 이와 상당히 다른 것으로 보인다. 대처 집권 초기 영국 제조업의 20~30%가 도산하면서 제조업의 기반이 와해되었고, 대처 집권 10년 동안 무역적자도 급등했으며, 집권이후 1979~1993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은 1.6%로 대륙국가들에 비해 형편없이 낮은 수준이었다. 1979년 이래 최하위 20%의 실질소득은 3% 감소한 반면, 상위 20%의 그것은 50%나 증가할 정도로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대처리즘은 과연 성공했을까. 대처는 소비를 부추긴 스테로이드경제, 민영화를 통한 주식소유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 열광, 과격한 노동조합에 대한 무력화 등을 통해 정치적으로 지지를 동원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처리즘의 공격적 신자유주의가 가능했던 까닭은 “북해 석유가 주는 횡재와 더불어 방대한 국유재산 매각을 통해 얻은 재정적 지원의 덕이 컸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다. 역사상 어떤 영국 정부도 “북해 석유와 민영화라는 황금거위를 소유한 적이 없었다”는 것. 경제상황만 놓고 보면 대처시대는 ‘전혀’ 성공한 정부가 아니었고, 그 시대가 낳은 여파는 전후 최악의 불황을 낳기도 했다. 저자의 말대로, 북해 석유와 민영화, 그리고 거기에 추가하여 포클랜드 전쟁이 없었다면 과연 대처의 장기집권이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복지정책과 관련하여 역설적인 것은 대처시대에도 복지의 양적 규모는 줄어들기는 커녕, 과거 노동당 시기보다 더 빠르게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복지의 정치적 불가역성’이다. 그러나, 대처시기에 와서 복지는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최소생활을 위한 선택적 안전망이라는 최소개념으로 추락했다.
복지국가의 퇴조, 노동당의 우경화
대처의 시대에 폭동과 테러, 대중의 소요와 범죄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은 최근의 토트넘 폭동과 관련하여 되새겨야할 대목이다. 대처시기 노동당은 뭘 하고 있었을까. 노동당은 1979년 패배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황당한 정책과 강령을 주장하고 있었다. 1983년의 노동당 선거강령은 영국 산업의 전면적 국유화, 소득정책의 폐지, 일방적 핵비무장, 상원 폐지 등을 내걸고 있었는데, 이 강령은 “역사상 가장 긴 자살문서”라는 평가를 받으며 선거에서 참패했다. 블레어는 이같은 당내 강경좌파의 몰락과 대처리즘의 승리 한 가운데에서 부상했다. 알려진대로 블레어의 노선은 기든스가 정초한 ‘제3의 길’이었는데, 이는 과거 노동당 정부를 ‘구좌파’로 비판하면서 등장했다는 점에서 노동당의 ‘신수정주의’라고 불린다.
블레어의 복지정책은 ‘일을 위한 복지’(welfare to work)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국가복지가 교육과 훈련, 탁아등 서비스 중심으로 재편되고 조세체제도 근면에 대한 보상과 유인을 위한 제도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이 보상받는’ 체제가 자리잡을수록 실업과 복지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제3의 길의 복지개념은 김대중 정부에 의해 ‘생산적 복지’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바 있다. 고세훈은 '일을 위한 복지‘에 대해서도 비판적인데, 그것은 노동의욕을 고취시킨다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실업의 구조적 순환을 해결하지 못했고, 훈련된 새 노동자가 기존 노동자를 대체하면서 후자를 쓸모없는 실업자로 전락시키는 전치효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블레어 정부에서도 불평등은 지속적으로 심화되어 직전의 메이저 정부보다도 더 악화되었다. 블레어 정부는 경제성장을 통해 고용증가와 재분배를 꾀한다는 ’성장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 증상은 한국의 보수층이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신화이기도 하다. 고세훈은 “성장이 빈곤이나 불평등을 자동적으로 해소시키리라는 가정, 혹은 최고 소득세와 기업세를 낮추고 소비세를 높여서 투자, 성장, 고용을 촉진하고 그렇게 창출된 흑자를 복지 등 공공지출을 위해 활용한다는 논리는 불행하게도 현실세계에선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
블레어 시대는 복지를 노동시장 유연화와 급부조건을 엄격하게 함으로써 ’재상품화‘했던 시대로 평가된다. 제3의 길에서 국가는 기업활동을 위한 안정된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에 한정되었고 경제사회정책에서도 경제자유주의와 시장보수주의가 두드러졌다. “국가의 재정위기는 시장실패나 자본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과도한 복지지출이 결과한 복지국가 자체의 위기이며 복지지출의 과잉은 복지사기꾼, 복지의존적 저변계급(underclass) 탓이라는 우파의 상투적 견해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이같은 이른바 ‘책임전가의 정치’는 한국사회의 보수언론이 확대재생산하는 유력한 담론중의 하나일 것이다. 제3의 길에 이르러 노동당은 더 이상 ‘노동당’임을 포기한 듯하다. 과거의 합의가 ‘수정된 좌파’(보수당의 노동당으로의 접근)이라면, 블레어 시대의 그것은 ‘수정된 우파’(노동당의 보수당에로의 접근)이라는 게 저자의 평가다.
영국에서 전후 합의정치에 기반한 복지국가가 출현할 가능성에 대해서 저자는 매우 비관적인 결론을 내린다. “오늘날 민영화는 대세가 됐고 노동운동의 사기는 최저점에서 헤어날 줄 모르며 세계화는 압도적인 권력으로서 국내 정치의 운신을 제약하고 있다. 영국 노동당은 유럽 사민정당 가운데 가장 우경화된 정당으로 평가될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더 비관적이다. “한국정치는 생성의 꿈틀거림을 용납하고 그 과잉을 여과하며 견제할 만한 존재 영역의 광범위한 중간지대를 가져본 경험이 없다. 이론이 없으니 이념이 없고, 이론과 이념의 죽음도 없고, 그 부활 또한 없으며 합의도 합의로부터의 이탈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정치는 갈수록 비대해져 왔지만, 그것은 조야한 권력의지의 난투였을 뿐 존재와 생성의 여지는, 있었다면, 그 가공의 신기루 앞에서 번번이 무너져 내렸다.”
복지한국, 희망은 있는가
그래, 저자의 이 비관론 만큼이나 이 책을 읽고 나서도 한국의 복지에 대해서 더욱 비관하게 된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비롯하여 복지담론을 주도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이 등장하고, 무상급식과 반값등록금이 현안으로 등장한 것은 과거에 비하면 한층 진전이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담론들을 정치화하고 제도화하는 정치권을 보노라면 저자의 비관론에 동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영국이 내세우는 ‘전통’도 ‘합의’도 없으며, ‘계급정치’의 가능성은 더더욱 기대하기 난망한 노릇이기 때문이다. 2008년 경제위기를 통해 우리가 따라가야할 자본주의의 ‘모델’이 와르르 무너지는 꼴을 보았어도, 경제선진화를 떠들며 미국 자본주의 따라가기를 떠들었던 그 사람들은 여전히 중요한 정책입안자의 위치에 있다. 엊그제 한겨레 칼럼을 보니 이정우는 영국의 폭동을 보수연립정부의 예산삭감과 재정삭감에서 찾고 있다.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491714.html) IMF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며 순치된 탓일까. 대학생들의 반값등록금 집회와 비정규직 철폐 집회가 영국같은 폭동으로 번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나저나, MB의 ‘공생발전’은 복지국가일까, 아닐까. 박근혜의 복지는 도대체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