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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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의 <순수박물관>은 애절한 사랑이야기다. 이 책 표지 뒤에 쓰인 발문을 인용하자면,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찾아 헤맸으며, 2864일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이다. 이 소설의 애절함은 바로 이 발문의 숫자가 보여준다. 앞 뒤 맥락 없이 수치만 보자면, 소설의 주인공은 세상에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집요한 ‘스토커’다.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박물관을 만들어 그녀를 추억하는 집요함이라니, 참으로 질긴 인간이다. 사람에게는 망각의 힘이 있어야만 비로소 살아갈 수 있다는 게 <망각의 강, 레테>(문학동네)를 쓴 하랄트 바인리히의 주장인데, 이 소설의 주인공 케말은 외려 망각의 순간 삶이 멈추어 버리는 사람이다.

두 권짜리 이 소설을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읽었다. 소설이 난해해서도 재미가 없어서도 아니다. 이 소설속의 시간은 남주인공 케말의 내면을 따라 아주 느릿느릿 흘러가는 것이어서 어떤 박진감이나 속도감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주인공의 이름은 퓌순인데, 터키어를 모르는 처지에서 이 이름은 내게 영자니 순이니 하는 지극히 전통적인(?) 한국 여자이름을 상기시켰다. 그 퓌순의 내면은 거의 도드라지지 않고, 대부분 케말의 시선과 내면이 주조를 이룬다. 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고통과 희열, 고뇌와 설렘, 그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희비가 오르고 내리는 감정의 굴곡이 이 소설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은 퓌순과 케말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첫 장면은 의미심장한데, 그날 퓌순은 귀걸이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퓌순이 잃어버린 귀걸이는 둘만이 간직하는 내밀한 사랑의 실존을 상징하는 소도구쯤 될 것이다. 훗날 재결합한 케말과 퓌순이 8년 만에 다시 사랑을 나누고 난 뒤 케말은 이 귀걸이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하여간, 부유한 기업가 집안의 아들인 케말은 약혼식을 앞두고 사촌동생인 퓌순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대학입시를 앞둔 18살의 퓌순은 미인대회에 참여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 둘은 케말의 아파트에서 한달 반 동안 거의 매일 섹스를 하며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이 44일이 그들이 8년 뒤에 다시 결합할 때까지 온전히 함께 한 시간들이다.

퓌순은 케말의 약혼식에 초대받아 약혼녀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 직후 케말에게서 사라져버린다. 케말은 그녀를 찾아 이곳저곳을 수소문하고 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퓌순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케말의 결혼은 파경에 이르게 되고 약혼녀 시벨과도 결국 헤어지게 된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에서 라비크가 조앙 마두와 만나 마시는 술은 칼바도스다. 케말에게 칼바도스는 터키 고유 술인 ‘라크(laki)’다. 케말은 라크를 마시며 겨우겨우 실연의 세월을 견뎌낸다. 다시 만난 퓌순은 영화감독 지망생과 이미 결혼한 상태였고 절망한 케말은 그녀의 집을 매일 방문하며 퓌순을 바라보고, 그녀와 관련된 물건을 수집하는(사실은 훔쳐오는) 것으로 8년의 세월을 보낸다. 이 집요한 사랑은 퓌순이 이혼을 하고 케말과 결혼하는 것으로 행복하게 마무리될 듯하나, 뜻밖의 결말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만나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으나, 케말은 퓌순의 귀걸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신은 귀걸이도 못 알아봤어!” 이 말을 남긴 퓌순은 자동차 사고로 죽는다.

케말의 남은 인생은 전세계의 박물관을 돌아보며 퓌순이 남긴 것, 퓌순과 인연이 있는 사물, 퓌순의 흔적들을 수집해 박물관을 만드는 일에 바쳐진다. 과연 실제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이스탄불에 있다는 ‘순수박물관’이다. 파묵은 이 소설의 뒷부분에서 소설가인 자신을 등장시키는데, 부엔디아 가문의 일대기가 양피지에 쓰인 역사였다는 <백년동안의 고독>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은 바로 그 순수박물관에 전시된 물건들의 내력, 그것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 안내서라는 것이다. “관람객들이 모든 진열장, 모든 상자, 이 모든 물건들을 본다면, 내가 팔년 동안 저녁 식사 때 퓌순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그녀의 손과 팔, 머리카락의 굴곡, 그녀가 담배꽁초를 비벼 끄는 모습, 눈썹을 치켜 올리는 모습, 미소, 손수건, 머리핀, 신발, 손에 쥔 수저, 이 모든 것에 내가 얼마나 집중했는지를 본다면 사랑이 커다란 관심과 커다란 연민이라는 걸 느끼게 될 것입니다.”

케말은 사랑이 무엇인가 묻는 퓌순의 질문에 “사랑은 퓌순이 도로, 인도, 집, 정원 그리고 방을 거닐 때, 야외찻집, 식당 그리고 저녁 식탁에 앉아 있을때, 그녀를 바라보는 케말이 느끼는 애착을 일컫는 말”이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이들의 사랑에서 ‘바라보기-보여지기’는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한다. 사랑이 마악 싹 텄을 즈음 44일간 이뤄진 육체적 관계는 그 후의 사랑의 내구성을 규정짓는 중대한 의식이지만, 8년의 세월에 비하면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케말은 퓌순과의 관계를 알고 있는 그녀의 부모와 남편이 있는 집에 매일이다시피 찾아가 함께 게임을 하고 티비를 보며 마치 한 식구처럼 살아간다. 퓌순을 바라보는 것, 그게 케말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방식이다. 케말은 바라보고, 퓌순은 보여진다. 영어의 ‘see’가 ‘보다-알다’라는 두가지 의미를 갖고 있듯이, 시각은 전통적으로 인식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케말은 퓌순을 바라봄으로써 그녀와 그녀에 대한 사랑을 인식하고, 자기 안의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말하자면, 케말은 바라봄의 주체고, 퓌순은 바라봄의 객체다.

이 소설에서 퓌순은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주체적으로 드러내는 순간은 세 번 정도 등장한다. 그 첫째는 케말과 사랑을 나눈 뒤 “이제 내 삶은 당신과 결부되어 있어”라고 말할 때, “걱정 마, 죽을 때까지 당신 이외에 그 누구와도 잠자리하지 않을 테니까”라고 말할 때, 그리고 죽기 직전 “당신은 귀걸이도 못 알아봤어”라고 말할 때다. 그녀의 발언이 주체적인 까닭은 거기에 그녀의 진심과 더불어 어떤 결단의 감정이 강하게 묻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퓌순의 죽음은 애절한 사랑이 만들어내는 불가피한 비극이거나 그녀가 가진 사랑의 상관물인 귀걸이에 대한 케말의 무신경함 때문이 아니다. 퓌순은 죽기 전 케말과의 대화에서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욕망을 방해했던 케말에게 “당신 때문이야, 난 내 인생을 살지 못했어.... 너희들은 내가 유명해져서 너희들을 떠날까봐, 질투심 때문에 날 집에 붙들어 두었어”라고 말한다. 8년 동안 바라봄의 객체로 포획된 여성, 설사 내밀한 사랑으로 이어져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퓌순의 삶의 욕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바라봄의 감옥에 갇힌 수인, 그녀가 케말의 사랑에 마냥 행복할 수 없는 이유다.

바라본다는 것은 ‘안다’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그것은 보이는 것에 대한 지배의 욕망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은 임철규의 <눈의 역사, 눈의 미학>(한길사)의 한 구절에서 훔쳐온 것이다. 임철규는 “눈은 ‘본 바’를 타자화하며, 이 ‘타자화’는 ‘차별화’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 차별화는 전체에서 부분을 떼어내어 그것이 마치 전체인양 틀짓는 인식의 작란이 자리잡고 있다.” 바라봄에는 ‘인식의 제국주의’가 스며들어 있다는 얘기다. 자살에 이르는 퓌순의 절망은 바로 그러한 것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바라봄의 대상으로서 객체화되어 케말의 삶과 “결부”되어 있는 그녀의 삶은, 주체적인 삶의 조건을 갖추기는커녕,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 거기에 케말의 ‘시선’은 “퓌순은 삼순(담배) 한 개비를 평균 구분 동안 피웠다”라고 말할 정도로 집요하지만(시선의 일방성), 정작 그것은 ‘귀걸이’를 배제하고(선택적 배제) 종국에는 퓌순마저 타자화하는 시선의 폭력성을 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케말에게 순수박물관은 시각에서 시작하여 온 감각으로 확장되는 퓌순에 대한 기억이다. “가장 행복한 순간을 생각했을 때, 그것이 이미 아주 오래전 일이며,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황금의 순간이 남긴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다. 행복한 순간들 이후에 남겨진 물건은 그 순간의 기억, 색깔, 보고 만지는 희열을, 그 행복을 느끼게 해준 사람들보다 더 충실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독법을 달리하자면 이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의 결과로 남은 ‘순수박물관’은 남성적 시선의 대상물로 채워진 박물관이 아닐까. 그가 18살의 대입을 앞둔 사촌 동생 퓌순과 사랑에 빠지고 섹스를 하고 그녀의 흔적을 집요하게 찾아다닐 때부터, 이들의 사랑에는 불가피한 비극성이 내장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

그래 인정하자, 이 소설의 바라보기를 두고  폭력적이며  지배의 욕망을 실현하는 행위로서만 읽는 것은 지나친 윤리적 독법일 것이다. 이 지극히 애절한 사랑을 아주 가난하고 앙상하게 읽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눈은 바라보면서 사물을 인식하기도 하지만, 또한 눈물을 흘리는 기관이기도 하다. 임철규는 앞서의 책 말미에서 “아도르노는 희망은 망각된 것의 복귀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줄 그 ‘망각된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보고 있는 눈물’로 가득찬 ‘울고 있는 눈’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한다. 케말은 자신의 수집품을 바라보며 퓌순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고통을 받으며 눈물을 흘린다. 그의 순수박물관을 방문한 사람들도 “커다란 관심과 연민”으로 눈물을 흘릴 것이다. 타자는 비로소 시선의 감옥에서 나와 바라보는 자와 슬픔과 공감의 눈물로서 조우한다.  이 때의 눈물은 제국주의의 시선이 아니라 사랑의 희열과 고통, 깊은 공감과 연민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게 순수의 이름에 값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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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은 2011-08-11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희망은 망각된 것의 복귀'라.. 그리고 희망의 복귀는 '울고 있는 눈'이라.. 이 소설을 읽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이 소설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모든사이 2011-08-12 14:01   좋아요 0 | URL
이 리뷰만 보고 책 안보면, 이 소설을 반페미니즘 소설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ㅎㅎ

이영은 2011-08-12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설은 어떨지 모르지만 님의 리뷰만 보면 한 인간의 어쩔 수 없었던 욕망의 흐름을 끝까지 밀고가서, 끝을 보고야만 지점에서 섰을 때 느껴지는 어떤 슬픔... 이런 게 느껴지는데,, 반페미니즘이라는 프레임이 맘 속에 떠오를 새는 없이. 아, 그런 것도 있겠다. 소설을 읽으면 읽는 내가 여자라도 남자주인공에 동화, 몰입하게 되는 경향이 있지요. ㅎㅎ 나만 그런가?

트레바리 2011-08-15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약, 희랍말 '이데아'가 '본다'가 아닌 '듣는다'에서 나온 말이었다면, 서양 철학이나 문명 자체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거라고 누군가 그러더군요. 어쨌든 "바라봄의 감옥에 갇힌 수인"에 대한 기막히고 흥미진진한 사랑 곡절에 다시 혀를 내둘렀습니다. 인도에 있는 타지마할 영묘는 17세기의 어느 왕이 둘도 없는 죽은 왕비를 기려서, 22년간 매일 2만여의 노동자를 동원해 아주 정교하고 아름답게 지은 것이라 합니다. 예전 티비에서 본 기억대로라면, 묘를 지키는 시종의 木像에 손발톱과 머리카락 한올까지 실제 것으로 하나하나 세심하게 심어놨다고 하더군요. 그 왕도 아마 죽은 왕비의 눈과 '마주보고' 눈물을 흘리고 싶었을 겁니다... 과연,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무튼 텍스트 횡단과 교직의 재미를 늘 보여주셔서, 저도 모르게 자꾸 어설피 따라하게 되네요..^^

모든사이 2011-08-15 22:44   좋아요 0 | URL
텍스트 횡단과 교직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저것 읽은 것을 뒤섞어 쓰는 글인데, 그게 때로는 지나친 텍스트에의 몰입을 막아주기도 하더군요. 텍스트를 회피하는 방법으로 채택한 우회적 글쓰기랄까요.. 사실 글쓰기랄 것도 없지요. 9 to 6의 삶을 사는 월급장이일진대, 책을 들춰보는 것은 그런 일상에 대한 초월의 욕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초월하고 싶으나 초월은 못되고 주저앉아 버리고 그 텍스트에 대한 글쓰기 마저 꽁꽁 마음을 감추고 오로지 텍스트에 몰입하여 글을 쓰게 되는 이 너절함이라니 말이지요.

트레바리 2011-08-16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러시다면 혹시, 정명환 선생의 아래 대목이 좀 위안(?)이 되시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저는 요령있게 요약하는 재주가 없고, 필자의 본지를 왜곡할까 저어해서, 많이 길지만 그대로 옮겨 봅니다..^^
"고래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노동하는 자아와 지적, 정신적인 일들에 관심을 갖는 자아의 양자로 구분해 왔고 그 사이를 넘나들었다. 이 이중의 활동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주경야송’이라는 옛 중국의 구절이다. 한데 그 당시에는 인간이 자신을 이분하는 것이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을 것이다. 밭갈기와 책읽기라는 두 가지 활동은 이율배반적이거나 대립적이기는커녕, 도리어 연속적이며 동질적이었다고조차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양자가 모두 인간의 존재를 다스리는 자연과 우주의 이치를 터득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경우가 되면 사정은 벌써 달라진다. 그는 망원경의 렌즈를 연마하는 일상적 노동과 철학적 탐구 사이에 어떤 긴밀한 관련을 설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자는 후자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 양자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모순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아마도 그는 생계를 위한 노동 때문에 사색을 위한 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호모 파베르와 호모 사피엔스가 본질상 양립하기 어려웠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정명환, "세계화와 인문학자", <현대의 위기와 인간>에서)

모든사이 2011-08-17 08:2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차라리 호모파베르와 호모사피엔스를 일부러 '분열'시키는게 더 나을 때가 있더군요. 의도된 정신분열이 사는데 더 편하더라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