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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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강남좌파>(인물과사상사)는 이른바 ‘강준만식 글쓰기’의 전형적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강준만식 글쓰기는 ‘실명비판’이나 ‘성역과 금기에 대한 도전’이니 하는 상찬들이 많았으나 나는 그것을 ‘짜깁기로서의 글쓰기’라고 부른다. 내 책장에 꽂힌 그의 책만도 30여권 정도에 이르는데, 그만큼 오랫동안 그의 책들을 읽어왔다. 처음 발간되었을 때 일인 저널룩이라는 새로운 발간형식으로 주목받았던 <인물과 사상>시리즈는 죄다 내다 버렸다. 아마 그 책까지 합친다면 더 많았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동안 꽤나 성실한 강준만의 애독자였던 셈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더 이상 그의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 읽을 책도 많은데, 이런 쓰레기같은 책을 읽는 것은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강남좌파>를 왜 ‘짜깁기로서의 글쓰기’라고 부르는가. 이유는 말 그대로 그의 글쓰기가 신문 기사와 칼럼, 인터넷 자료, 잡지 기사 등을 주제별로 모아 주석을 달아 펴낸 책이기 때문이다. 이 짜깁기가 그런대로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는 그의 <현대사 산책> 시리즈일 것이다. 주제와 연도를 기준으로 주요 기사를 찾고 거기에 주석과 나름의 ‘평가’(?)를 덧붙인 이 짜깁기 시리즈는 당대의 역사를 당대의 저널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만 의미있는 책이다. <대중매체의 이론과 사상>이라는 대학원생 노트 수준의 글을 모아 전공서적이랍시고 펴내는 것을 보면, 그는 커뮤니케이션 학자라기 보다는 주제별 자료수집가 내지는 그냥 저널리스트라고 보는 게 맞다.

그에 따르자면 <강남좌파>는 강남에 사는 좌파가 아니다. 강남은 “한국 자본주의이 농축된 형태”이고 노무현 정부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강남좌파는 실은 “엘리트”라는 이름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리무진 진보주의자, 보보스족과도 일맥상통하고 이명박 정부의 ‘촌스러움’ 때문에 반MB적 성향을 띠는 고학력 고소득층도 강남좌파다. 강준만은 이런 강남좌파를 1) 강남이 성격이라는 측면에서, 경제적 강남좌파, 문화적 강남좌파, 연고적 강남좌파로 구분하고 있고, 2) 주체의 위상이라는 측면에서 공적 강남좌파, 중간적 강남좌파, 사적 강남좌파로 구분한다. 3) 좌파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이타적 강남좌파, 합리적 강남좌파, 기회주의적 강남좌파로도 나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그의 ‘강남좌파’라는 구분은 주거지와 소득, 학력과 상관없이 진보적(좌파적?) 성향을 갖는 모든 사람을 두루 포괄하는 매우 광범위한 개념이다.

미안하게도 이런 식의 개념은 저널적 흥미를 유발할 수는 있겠지만, 분석적인 개념으로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강남좌파’는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유복한 집의 자손이었던 엥겔스나 루카치도 강남좌파다. 최근 들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세력이 ‘촌스러움’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 외연이 더 넓어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아마 좌파적 실천을 넘어서 ‘미학적 감성’이라는 요소가 하나 더 추가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른바 래디컬한 유미주의자들은 늘 당대와 불화했다. 단적으로 오스카 와일드를 보라.)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라이프스타일이든 당대의 주류적 질서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을 쓰면 될 것이다. 이런 점은 그가 사회과학자라기 보다 저널리스트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강남좌파’에 대한 특집기사를 내보낸 적이 있던 중앙일보는 강준만의 이 책이 나오자마자 대서특필하는 호들갑을 떨었는데, 자신들이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아젠다를 강준만이 응답한 것에 대한 반가움에서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강북우파는 여전히 계급배반 투표 성향을 보이고 있음에 비해 강남 우파의 계급투표 성향은 날로 강화되고 있다. 강북우파의 선택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바가 있지만, 휴전선 부근의 주민들이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것을 보면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른 정치적 선택은 날로 강화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의 정당정치는 더 이상 애매모호한 정체성에 기반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물론, 우파의 문화적 헤게모니와 (가짜) 욕망의 정치가 위력적이라는 점에서 그다지 낙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강남좌파>를 보면서 가장 짜증났던 것은 강준만이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끌어들이고 있는 논거(라기 보다 인용) 때문이었다. 그는 강남좌파론에 기대어 우리시대의 대표적 정치인들을 차례차례로 불러내고 있는데, 그 정치인들의 목록은 노무현, 오마이뉴스(오연호), 조국, 박근혜,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 오세훈 등이다. 이들에 대한 강준만의 ‘비평’은 언론의 기사에 대한 인용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 범위는 한겨레와 경향을 넘어 조중동까지 이른다. 관련 기사의 진위, 칼럼의 정치적 배경, 사실 여부 같은 것은 그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언론의 기사는 항상 부분적 진실에 불과하다. 눈밝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국언론의 ‘사실보도’가 기실은 많은 경우 사실을 빙자한 허위이거나 과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언론의 사실에 대한 기율’은 한국언론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어느 기자에게 선배 기자가 했다는 말, “너는 기자가 아직도 ‘기사’를 믿니?”

노무현에 대한 그의 글은 조선일보 사설(이 신문의 사설이 많은 경우 ‘사심많은’ 정파적 이념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것이다. 정파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정파성과 정파적 이익을 충실하다는 것을 은폐한채 보편타당한 주장을 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게 문제다.) , 뷰스앤뉴스의 박태견(그의 이른바 경제분석은 언제나 한국경제 붕괴론이고 망국론이다. 초치기의 전형을 보여주는 기사다.), 문화일보 논설위원 이신우(이 사람의 글이 과연 칼럼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것인가.), 서강대 명예교수 이태동(영문학을 전공한 인문학자중 이 사람처럼 공격적으로, 동시에 인문적 가치에 반하여 글을 쓰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경향신문 전남식 부국장(이 사람은 참여정부가 역대 정부중 언론에 대해 가장 억압적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유종일 KDI 교수(진보적 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노무현의 ‘아방궁’에 490억이 들어갔다는 언론의 오보를 그대로 생중계하는 사람이다.), 최장집 교수(참여정부가 사회경제적 개혁을 소홀히 했다는 최교수의 비판은 이 정부에 대한 가장 적확한 비판에 해당한다.) 등의 주장과 글들을 인용한다. 조선이나 동아, 문화와 매경, 심지어 한겨레와 경향이 동일선상에 놓이고 주제에 부합하기만 하면 장황하게 인용된다.

박근혜에 대한 글에는 정치컨설턴트 박성민, 임철순 한국일보 주필, 조선일보 사설, 조국 교수,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 한겨레 성한용 기자, 동국대 강정구, 문화평론가 이재현,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 등등이 인용되고 예의 그, 수첩공주, 외모, 말투, 박정희 신화, 주변의 인물들이 거론된다. 언론 주변과 정치인 주변을 돌고 있는 풍문과 소문들, 뒤틀린 시각으로 본 칼럼과 정파적으로 해석된 언어와 행위들, 이 모든 것들이 강준만의 글쓰기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그래서 박근혜에 대한 강준만의 결론은? “맹목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충성파들이 쳐둔 인의 장막에 둘러싸인 박근혜의 모습, 그게 문제의 핵심이다. 박근혜의 당선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거창한 철학과 비전을 말할 필요도 없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이 나라를 어떤 용인술로 이끌겠다는 것인지 그것이 중요하다.” 이런 정도의 비평은 따로 책으로 낼 것도 없이 그가 쓰는 신문 칼럼에 한번 쓰면 그만이다.

소설가 이문열은 <삼국지>를 내면서 소설가로서의 역량도, 대중적 인기와 평가도 급전직하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가진 특유의 고집스러운 노골적인 우파적 시각(따라서 반페미니즘적)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이점에서 평론가 김현이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를 두고, '베끼기의 문학적 의미'라는 평론을 썼을때, 정작 김현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뒤의 이문열의 행보를 미리 짐작할 수 있었던 김현의 혜안에 감탄하게 된다. 이문열의 <삼국지>는 창작이 아니라 ‘베끼기’다. 소설가가 ‘베끼기’로 돌아섰을 때, 그것이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소설가로서는 이미 끝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문열이든, 황석영이든, 장정일이든 삼국지를 쓰면서부터 그들은 이미 퇴행의 길로 접어들었다.  

강준만은 베끼기에서 한참 더 나아간 ‘짜깁기’다. 강준만의 <이건희 시대>를 읽고 이건희를 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심한 착각이 될 것이다. 골방에 틀어박혀 좀처럼 자신을 내비치지 않고 있는 이 은둔의 CEO에 대해, 언론을 통해 소개된 몇 개의 에피소드를 근거로 제대로 그를 평가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강준만은 초기 몇 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짜깁기’만을 해왔으니 그의 짜깁기 이력도 거의 20여년이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짜깁기에 동원된 재료들이 이미 반쯤 썩은 것들이니 아무리 잘 짜깁기해봐야 그건 짜깁기일 뿐이다. 짜깁기라도, 그의 연구실에 파일링되어 있는 이 쓰레기 자료들을 전부 폐기하고 다른 재료로 짜깁기를 했으면 좋겠다. 조중동을 그렇게 비판하면서 정작 글쓰기에 조중동 기사를 주요 글감으로 삼는 모순이라니, 더구나 커뮤니케이션 학자가. 강준만 식 글쓰기의 파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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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5 00: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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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5 08: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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