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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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의 인상적인 배경은 ‘기차역’이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 만난 곳도 기차역이었고, 안나가 자살한 곳도 기차역이며, 연인을 잃은 브론스키가 안나를 처음 만난 시절을 회상하며 전장으로 떠나는 곳도 기차역이다. 기차가 질주하는 근대성의 상징이라는 식의 해석은 이미 진부할 것이다. 그보다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분별없는 열정”을 비유하는 상징적 장치로 보는 게 낫다. 그것 역시 진부한 해석이기는 마찬가지이겠지만 그것만큼 이들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을 살아있는 비유로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되돌아가지 못하는 기차는 사랑이 싹트고 나아가며 위반하고 넘어서는 선조적(linear) 일방향성의 운명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을 흔히 말하는 대로 한 유부녀와 청년이 벌이는 불륜행각의 파국적 일대기로 읽을 수도 있겠다. 대체로 많은 소설에서 불륜은 단골소재로 등장했고,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보봐리 부인>에서 줄리안 반즈의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에 이르기까지 행복하게 끝난 경우는 드물다. 소설은 안나-브론스키의 스토리와 톨스토이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레빈의 이야기로 엮여져 있다. 그 두 이야기는 러시아 귀족 사회라는 경계 안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얽히기도 한다. 레빈의 아내인 키티는 전에 브론스키에게 연정을 품었고, 그 때문에 레빈은 한동안 실연의 고통을 겪기도 한다. 그럼에도 두 이야기는 마치 독립적인 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병치되며 전개된다.  

안나-브론스키의 스토리는 뒷 이야기에 대한 흥미를 이끌어내지만 레빈의 이야기는 그렇질 못하다. 그것은 아마도 톨스토이가 레빈을 통해 당대 러시아 사회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풀어놓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광수는 이런 식의 톨스토이식 계몽주의를 장광설을 펼치며 자신의 소설에 끌어들인 바 있다. 물론, 춘원의 계몽주의는 그의 친일행각만큼이나 싸구려다. 농업사회주의 혹은 농업 중심의 아나키즘에 기독교적 성찰까지 더해진 레빈의 사유는 때로 지나친 관념론으로 치달으며 성급한 독자의 부아를 자극한다. 민음사판 세계문학 전집으로 세권이나 되는데다 각 권이 모두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한달 동안 읽으며 이성과 감성을, 합리와 비합리의 세계를 넘나들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꽃이 지더니 이내 장마가 시작되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그녀와 유사한 소설적 인물, 예컨대 플로베르의 마담 보봐리에 비해 훨씬 매력적이다. 쿤데라는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그녀의 남편 카레닌을 개 이름으로 붙여 놓고 있다. 보봐리가 그녀의 이름에서 비롯된 ‘보봐리즘’의 속성 그대로, 진부한 일상에서 벗어나 삶을 미학화하려는 속물적 욕망을 대변한다면, 안나의 사랑은 그보다 적극적인 능동성으로 하여 더욱 빛이 난다. 보봐리의 사랑은 애정-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가 경제적 파산에 이르게 되지만, 안나의 그것은 ‘열정으로서의 사랑’이 가진 속성과 운명을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그것은 보봐리가 재미없고 시시한 시골 의사의 아내라는 것과 안나 역시 답답하고 고루한 남편을 갖고 있지만 러시아 귀족 사회의 일원이라는 현실적 여건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적어도 안나는 경제적 파산 때문에 몰락하거나 자살에 이르지는 않는다.  

안나의 사랑을 읽기 위해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새물결)의 한 대목을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루만에게 사랑이란 ‘소통의 코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가진 사랑이라는 감정상태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코드화’할 수 있으며, 열정이라는 고양된 감정의 상태 또한 그 내부에 내장된 코드를 읽어내고 그 변천과정을 이론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중의 한 코드로서 열정적 사랑은 현대적 사랑의 원형이 되었던 낭만적 사랑을 형성한 한 계기였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와 열정이 개체화(개인화)하면서 사랑의 능동성을 실현하는 원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랑은 연원을 알 수 없는 내면의 저 밑바닥에서 움직이고 시작되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인간 주체의 능동적 선택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의 바닥에는 '코드‘가 작동하고 있다. 
 

“그녀가 대단히 아름다워서도 아니고, 그녀의 모습 전체에서 풍기는 우아함과 겸손한 기품 때문도 아니었다. 다만 그의 옆을 지나치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 표정에 유난히 상냥하고 부드러운 그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뒤돌아보자 그녀 또한 고개를 돌렸다. 짙은 속눈썹 때문에 검게 보이는 그녀의 빛나는 회색 눈동자가 다정한 빛을 띠며 마치 그를 알기라도 하듯 그의 얼굴을 유심히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마치 곧 누군가를 찾는지 가까이 다가오는 군중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짧은 시선을 통해, 브론스키는 그녀의 얼굴에서 뛰노는 절제된 활기를 포착할 수 있었다. 붉은 입술을 곡선 모양으로 만든 희미한 미소와 빛나는 눈동자들 사이에서 차분한 생기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다녔다. 마치 그녀의 존재에서 어떤 것이 흘러넘쳐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짝이는 눈빛과 미소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일부러 눈 속의 빛을 꺼버리긴 했지만, 그 빛은 그녀의 의지에 반해 희미한 미소로 반짝였다.”(137-138) 

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묘사를 꼽으라면 아마도 브론스키가 기차역에서 안나를 처음 만나는 이 장면이 아닐까. 브론스키의 내면에서 움직이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와 안나가 가진 “절제된 활기와 차분한 생기”를 말하는 이 대목은 두 사람 사이의 열정적 사랑이 예비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마담 보봐리가 교외를 산책하다가 자신의 결혼생활이 가진 진부함과 불행함을 탓하며 “맙소사 내가 어쩌자고 결혼을 했을까”라고 주저앉는 대목과 비교하면 사랑의 기원이 이렇듯 다르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여기서 보여지는 안나의 면모는 사랑을 향한 내면의 능동적 계기를 잠재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안나는 자신의 남편이 “그가 단 한번도 나를 사랑이 필요한 살아있는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난 살아 있는 여자야. 내게는 죄가 없어. 하느님은 날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그런 여자로 만들었어”라고 독백한다. 자신의 사랑을 찾는 능동적 여성 주체, 그 사람이 바로 안나 카레니나다. 

다시 루만에 의하면, 열정은 합리적 통제 영역의 외부에서 작용한다. 사랑은 다양한 모순과 역설 속에서 이뤄진다. 그것은 “정복하는 복종, 고뇌를 원하는 것, 눈 뜨고 있는 맹목, 기꺼이 병에 걸리는 것, 기꺼이 감옥에 갇히는 것, 달콤한 순교”와 같은 ‘역설’을 만들어낸다. “가장 커다란 달콤함은 남몰래 고통을 겪는 것이다.” 이 사랑의 역설은 ‘열정의 과도함’이라는 코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만약 열정을 지배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열정을 잘못 보여주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비합리성의 영역에 존재하는 열정은 통제불가능하며 무절제함과 과도함으로 건너간다. 안나의 사랑도 그런 운명이다. 사랑에 빠진 뒤에 그녀는 “난 그를 사랑해요. 난 그의 연인이에요. 난 당신을 견딜 수 없어요. 당신이 무서워요. 난 당신을 증오해요”라며 과감히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이다. 담대함으로서의 사랑, 그게 안나 카레니나의 열정이다.  

그런데, 루만에 의하면 사랑과 결혼은 양립할 수 없다. 사랑은 법적 형식으로 규제되는 결혼에 맞서 분화된다. 사랑의 신이 격노하여 연인들을 결혼으로, 따라서 타락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더이상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는 결혼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열정의 과도함에는 한계가 없어 충동, 욕망, 요구에 대한 제한도 없지만, 시간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사랑은 반드시 끝나게 마련이며 게다가 아름다움보다 빨리 따라서 자연보다도 빨리 끝난다.” 행복의 순간성과 고통의 영원성, 이것은 열정적 사랑이 숙명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장벽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과도함을 내장하고 있으며, 그 과도함이 바로 사랑을 종말로 이끌게 된다. 그러니, 안나의 사랑은 애초부터 비극적 파국을 예비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사랑은 시간에 의해 부식되며 더 이상 연인은 자신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는다. 안나는 브론스키에게 안타까운 구조신호를 보내지만 그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벌을 주고 모든 사람에게서, 나에게서 벗어날 거야”라며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진다.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무엇 때문에? 그녀는 몸을 일으켜 고개를 뒤로 젖히려 했다. 하지만, 거대하고 가차 없는 무언가가 그녀의 머리를 떠밀고 그녀를 질질 잡아 끌고 갔다. ‘하느님,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하소서’ 그녀는 어떠한 저항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왜소한 농부가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철로 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불안과 허위와 슬픔과 악으로 가득찬 책을 읽을 때 그 옆에서 빛을 비추던 촛불 하나가 어느 때보다 밝은 빛으로 확 타오르더니, 이전에 암흑 속에 잠겨 있던 모든 것을 그녀 앞에 비춰 보이고는 탁탁 소리를 내며 흐릿해지다가 영원히 꺼지고 말았다.”(455-456) 

안나가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장면은 이렇듯 갑작스럽게 타오르다 꺼지는 초의 불꽃으로 묘사된다. 열정적 사랑이 마침내 이른 곳, 그것은 사랑의 종말이자 죽음이다. 여기서 루만을 인용하자면, 열정적 사랑이 과도함에 이르렀을 때 “사랑은 총체화”한다는 점이다. "사랑은 애인과 관련된 것이라면 하찮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요하게 만든다. “애인의 모든 체험과 행위는 사랑/무관심, 정직한 사랑/부정직한 사랑과 같은 도식 아래서 끊임없이 관찰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안나가 브론스키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가 다른 여자와 정분이 난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마침내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은, 소설상의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 안나가 가진 열정의 과잉이 불러낸 허깨비다. 그녀가 바보여서도 아니고, 사랑에 눈 멀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열정적 사랑이 내장하고 있는 고유의 코드가 작동한 것일 따름이다.  

<보봐리 부인>의 마지막에서 남편 샤를르와 그녀의 정부 로돌프는 어색하게 만난다. 샤를르는 로돌프에게 그녀의 죽음에 대해 “이게 모두 그 운명 탓이지요”라고 말한다. 아내의 죽음과 경제적 파산이라는 현실이 주는 압도함 때문이었는지 샤를르의 현실인식은 “그저 운명”이라는 환멸이 섞인 진부함에 불과하다. 그것이 아내 보봐리의 운명을 가리키는 것인지, 그녀와 정부 로돌프의 사랑과 배신이 운명이라는 것인지, 자신의 처지가 운명이라는 것인지 모호할 뿐이다. 플로베르는 이 단 한마디 말을 통해 남편 샤를르의 성격과 한계 등 모든 것을 압축해 놓았다. 그것은 안나에게 와서 19세기 후반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상의 한 러시아 귀족 여인의 운명이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으로서의 안나의 운명이 아니라, ‘열정적 사랑의 운명’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나의 모든 삶은, 삶의 매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의 명백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나에게는 그것을 삶의 매 순간 속에 불어넣을 힘이 있어”라는 레빈의 고백으로 끝난다. 레빈의 고백은 아마도 톨스토이가 공들여 고민하고 썼겠으나 내게 감동을 주진 못했다. 그 이유는 안나가 행위의 인간이었음에 비해, 레빈은 사유의 인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 파국적 종말로 귀결될 지언정 상호적이며 능동적 행위를 통해 이뤄진다면, 사유는 자신의 우주 속에서 홀로 유영하는 것에 가깝다. 루만은 ‘열정 이후’에야 현대적 사랑이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의 모던화 이전, 19세기적 사랑의 가장 완전한 형태는 안나 카레니나에게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프로이드가 말한 대로, 때로 시가는 그저 시가일 뿐이다. 안나는 19세기 소설가의 한 소설에 나오는 인물일 뿐이고, 루만도 그저 독일 사회학자 루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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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7-11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로자 룩셈부르크가 옥중에서 여자 교도관한테 추천한 책이 바로 이 소설이라더군요. '열정'은 역시 혁명과 사랑의 공분모인가 봅니다. 암튼 고전의 신선하고 정치한 재음미, 안나-보봐리-루만을 엮는 사랑론, 혀를 내두르며 잘 읽었습니다..^^ 참고로 보봐리는 젊은 정부와 바람나서 마차로 파리 시내를 목적지없이 계속 달리며 파국을 향해 달려가죠. 보봐리 불륜의 그런 시간구조를 누군가 "파국을 향한 절망적 반복"이라고 했던데, 말씀하신 "선조적 일방향성의 운명"과 대비되는 것 같습니다. 아마 '환멸'이 '열정'을 집어삼키는 시대성을, 같은 세기의 안나와 달리 보봐리는 잘 보여주지 않나 합니다. 하지만 안나의 열정에 우리가 더 이끌리는 것도 사실이겠죠. 톨스토이는 첨엔 안나를 부정한 여자로 지탄할 목적이었는데, 써가면서 그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게 됐다는 얘기도 있습니다.('안나는 나요'라고 할만큼..?) 그런 점에서 소설은 애당초 아이로니컬한 예술이라는 쿤데라의 경구도 새겨 들어야 할 듯합니다..^^

모든사이 2011-07-11 14:43   좋아요 0 | URL
네 로자가 이 소설을 좋아했다니,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혁명에 대한 열정과 사랑에 대한 열정은 아마 유사한 내면적 동기에서 출발할 테지요. 금기를 넘어서는 위반의 열정이라는 점에서 말이지요. 더구나, 대중의 자발성을 누구보다도 존중했던 로자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 같네요. 보봐리 부인의 마차장면은, 아마 플로베르가 그것 때문에 기소되었던 것 같기도 한데, 묘사가 아주 재밌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전에 <아이엠러브>라는 영화를 봤는데, 거기 여주인공의 모습이 안나와 상당부분 겹쳐 보이길래, 아마도 안나의 열정에서 보이는 것은 어떤 '슬라브적 요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을 한달여 전에 읽고, 안나의 열정을 어떻게 이해할까 곱씹다가 저런 식으로 정리를 해봤는데, 쓰고나서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닌가하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님께서 공감해주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방문과 댓글, 거듭 감사드립니다.

트레바리 2011-07-13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데, '카레닌'을 개이름으로 삼은 쿤데라의 '가벼움'의 소설에서 어쩌면 '슬라브적 열정'의 '무거움'이 지적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령 카레닌에 대한 테레사의 사랑 방식을 말하면서, "그녀는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의 한 쌍을 괴롭히는 질문을 해본 적이 없다.: 그가 나를 사랑할까? 나보다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 이런 모든 의문은 사랑을 그 싹부터 파괴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는 다른 무엇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송동준 역)라고 성찰하는 대목도 그렇지 않을까요..? 이것은 또한 카레닌의 죽음에 이르러,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들의 관계라는 것이 어느 정도가 우리들의 감정--사랑, 반감, 호의, 혹은 악의--의 결과인가,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개인 간의 항상적 권력 놀음에 의해서 결정되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결코 확실하게 확증할 수 없다."고 하는 대목과도 상통하는게 아닐까요?

모든사이 2011-07-13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님의 이번 댓글은 뭐라 제 의견을 말씀드리기가 애매하군요. 다시 쿤데라를 들춰볼 수도 없는 일이고.ㅎㅎ 어쨌거나 위에 인용된 부분을 보자면 님의 해석에 대체로 동의하게 됩니다. 후자의 인용문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들의 관계라는 것은 어느 정도 우리들의 감정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개인간의 항상적인 권력 게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기도 하며, 이는 우리가 일상적 경험으로서 많은 경우 확증할 수 있는 바이기도 하다"라고 바꾸고 싶네요. 쿤데라와 달리 적어도 감정의 실재성 혹은 감정이 낳은 긍부정의 결과 앞에서 망연해본적이 있는 자로서 말이지요.

트레바리 2011-07-13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사실 안나와 테레사를 대질시켜 따져 볼 재량은 없는데, 괜시리 저런 막연한 비교 충동이 생기는군요..^^ 저 역시 안나를 다시 들춰보지도 않고 '슬라브적'인 걸 잘 아는 척 했구요. 하여간 쿤데라 문장의 변용은 참 그럴듯하고 멋지네요..^^ 그리고 아마 안나의 첫 페이지에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복음서에 적힌 예수의 말이 나왔던듯 합니다. 안나의 열정은 남편에 대한 복수의 한 방식이었고, 남편 역시 그녀한테 철저히 되돌려 주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고보니 카레닌이 참 마른 장작개비 같아도(화력은 좋아서?) 교활했던 넘 같아요..^^ 암튼 쿤데라의 장난기가 그를 더 살려주는 듯 합니다.

모든사이 2011-08-01 10:44   좋아요 0 | URL
벤야민에 대한 글 뒤에 쓰신 댓글은 왜 지우셨는지? 댓글을 달면 바로 이메일로 댓글 내용 일부가 전송되어 오는데, 안타깝게도 지운 댓글은 일부만 알아볼 수 있어서 말입니다. 여기 리뷰가 다른 분들에 비하면 많지도 않은데, 님께서는 제가 올린 포스팅의 대부분을 보신 것 같아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군요. 감사합니다..

튤립나무 2011-08-11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요일 시인의 <애초의 당신>에 쓰신 글을 읽고 이 서재에 들어왔다가 여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안나까레니나는..소설로는 여태 읽지 않고 있고..최근 오래전 흑백영화를 봤었지요.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