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 가을호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편의 글은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다룬 김현미 교수의 논문과 2013년 체제를 주제로 한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의 글이다. 한국 사회의 중산층 이하 계층의 삶이 위기에 처한 이유와 대안적 모색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계몽적이다. 민주정부 10년은 물론이고 보수정부 4년에서도 삶의 위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별로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나아진다’는 것이 경제적 삶의 풍요든, 문화적 삶의 질이든, 일상의 행복이든, 분야와 방향에 상관없이 현실은 팍팍하기 그지없다. 지나친 비관론인가. 이른바 ‘안철수 현상’은 한국정치의 제도화 수준이 그만큼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 밥 먹는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깽판은 겨우 이 정도의 문제조차도 ‘사회적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 나는 별로 이 나라의 국민이고 싶지 않다.
김현미는 하우스 푸어 등으로 대별되는 중산층의 위기가 ‘재생산 위기’라고 말한다. “한국의 빚더미 중산층은 사회적 재생산 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빈곤계층의 삶의 불안정성과 위기도 문제지만, 중산층의 위기를 심각하게 토론해야 하는 것은 중간 정도의 자산가 계층도 이제 스스로의 재생산을 이루어내지 못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삶의 재생산 영역이 급격하게 시장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장화 상황 속에서는 인공출산, 산후조리원, 육아, 사교육, 취업 사교육, 취업과 사회적 삶의 상승을 위한 건강과 패션(성형, 스타일), 장례와 상조서비스까지 모든 것에 ‘비용’을 지불하고 ‘구매’해야 한다. 중산층의 재생산 위기는 바로 이런 ‘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벌어진다. “재생산 영역의 상업화는 인간의 물적, 감정적, 인지적 존재성 자체를 아웃소싱하여 개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70년대 석유파동 당시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저 먼 아랍세계에서 벌어진 일로 시골마을의 전등을 호롱불로 교체해야 했다. 아마도 한국민이 세계화를 몸소 체감하게 된 것은 바로 이 1차 석유파동이 아니었을까. 가보지도 않은, 알지도 못하는 먼 나라의 일이 시골 무지렁이의 삶에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의 확인. 2008년 초 미국발 금융위기도 그렇고, 지금의 유럽 재정위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세계화라는 구조속에서의 우리의 삶은 더욱 심각한 불안정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김현미에 따르면, 그것은 재생산 위기를 타개해보려는 ‘개별화된 가족전략’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한국의 노동자는 가족의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하고, 이를 메우기 위해 시장에서 물질적/비물질적 재화를 구매한다. 가계대출금 상환과 높은 사교육비 때문에 재정난에 빠진 중산층은 다시 주식, 펀드, 부동산 등 불예측성이 높은 재테크에 몰두하거나 맞벌이, 겹벌이 등을 통해 소득을 증가시키고자 한다. 안정성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가족의 사회적 재생산 분야는 가장 투기적이고 불예측적인 시장상황에 의해 그 질이 좌우되는 불안정한 영역으로 전락했다.”
그러니까, 월급으로 '비용'을 지불해 사회적 삶을 재생산하기 어렵게 된 중산층은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주식과 부동산에 손을 대 '투기적 돈벌이'에 나서게 되고, 그러다 세계경제의 위기라는 또다른 복병을 맞아 워킹푸어, 하우스푸어로 전락한다는 얘기다. 이는 굳이 사회학자의 분석을 빌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가 주변에서 몸소 체험한 현실일 것이다. 재생산 위기는 개별화된 노력을 통해 해결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아이들 밥한끼 주는 무상급식도 ‘정치적 사안’이 되는 나라에서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장기적 전망을 찾기란 어렵다.” 그래, 참 어렵다. 한나라당과 그 당 지지자들이 대오각성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김현미는 “고비용 저효율의 소모전 속에서 끊임없이 공회전을 하는 중산층이 이제 삶의 질과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국가의 책임에 대해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한다”는 다분히 선언적인 대안에 그치고 있다. 그 정치적 선택의 정책적 결과는 아마도 복지의 확충이 될 것인데,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참으로 요원하다. 사회적 재생산을 개인과 가족이 온전히 감당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는 사회적 재생산은 거의 불가능하다. “공공적 자원이 투여되어야할 사회적 재생산 영역이 시장에 의해 지배될 때 중산층은 당연히 ‘빚더미’에 오르게 된다.” 그 비용을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가 함께 떠맡고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사회적 재생산의 탈시장화, 국가에 의한 사회적 재생산이 이뤄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포스트 MB 시대에 요구되는 대안적 방향이다.
김대호는 2012년 대선과 총선을 계기로 형성될 ‘2013년 체제’를 전망한다. 그는 지금의 한국사회를 규율하는 것은 멀리는 분단 냉전구조를 형성한 ‘1953년 체제’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정상화를 추구한 ‘87년 체제’라고 규정한다. 87년 체제는 어떠한 경제사회 모델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외시하고, 독재권력을 방지하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추구하는데에만 집중했다. 그 결과는? “독재방지에 치중한 나머지 공공의 핵심인 정치적 안목, 책임성, 국가경영능력등이 매우 약화된 체제”로서, “정치의 혼미와 무능을 틈타 공공적 마인드는 취약하지만 재력, 조직력, 전문성, 여론조작력 등을 가진 관료, 재벌, 토건족, 언론집단, 직능협회 등의 정치사회적 힘이 급성장” 했으며, “진보적 선출권력은 이 거인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포박, 포섭당하는 위기상황”이라는 것이다.
MB 정부는 김대중 정부가 완성한 시스템에 박정희적 요소(단속경제)와 현대건설과 서울 시장 시절의 저돌적 추진력과 변칙, 편법“을 결합한 정부다. 김대중 시스템은 기업, 금융, 노동, 공공부문 구조개혁으로 이뤄졌는데, 금융개혁의 일정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은행은 서민과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중개기능을 외면하고 부동산 투기를 위한 자금공급원으로 전락했고, 고용유연성은 대기업과 공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에서만 관철되었다. 중국특수로 돈을 번 대기업들은 고용을 늘리기 보다는 임직원의 보상을 강화하고, 종업원의 고액연봉을 보장함으로써 노조를 순치시켰다. 대기업 노조의 이익과 기업의 이익이 맞아 떨어지면서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은 급증했다.
진보좌파는 복지확대, 청년고용할당제와 같은 공공부문의 적극적인 역할, 정리해고 및 비정규직 반대 등의 예외없는 정년보장와 같은 신자유주의의 ‘과잉자유’에 대한 규제를 통해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거창한 명분과 소망과는 달리 현실적 대안이 되기 어렵다. “이 시대 수많은 빈곤과 갈등, 절망, 죽음의 확실한 원흉인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와 시장’은 단지 규제가 적어서, 경제주체들의 자유가 과잉이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김대호의 입장은 거칠게 정리하자면, 진보적 현실주의라는 레테르를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진보좌파의 주장은 ‘새로운 규제’를 통한 대안이겠으나, 그것이 불러올 ‘풍선효과’를 보지 못하거나 외면하기 때문에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성매매 근절을 위해 집창촌을 철거해야 한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 ‘현실적 허구’인 것과 마찬가지이리라.
가령, 다음과 같은 주장은 진보좌파 내지 시민사회의 주요 세력들이 경청할 만하다. “민주, 노동, 민중, 시민 세력은 보수와 마찬가지로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화시키는 큰 그림(국가비전) 없이, 대체로 자신이 부당하게 빼앗기고 억눌려온 약자라는 확신을 깔고 상하좌우(공동체 전체)를 살피지 않은 채 자기 권리찾기에만 매진해온 것 아닐까?” 부당하게 빼앗긴 권리를 찾는 것은 정당한 행위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것의 방법론이 역설적으로 부당하게 빼앗는 방식이 되어서는 그 역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이른바 진보진영이 대화와 타협이라는 정치적 행위에 매우 취약한 사람들이며, ‘결국 역관계가 결정한다’라는 논리로 비타협적 투쟁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것은 잘못된 진단이 아니다. 민노당/진보신당, 민노당과 참여당의 통합 결렬 과정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정치적 갈등의 조정과 타협’에 무능한 인간들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래 맞다, “빼앗긴 권리를 찾아 각개약진만 하면 그것이 곧 공공성이 되는 시대가 더 이상 아닌 것이다.” 아마도 참여정부와 노무현이 좌우에서 협공을 당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을 것이다. 보수는 그렇다치고, 진보진영에서도 비판을 받은 것은, 이 정부의 한계와 실책도 있지만, 비타협적 권리찾기 투쟁만을 소명의식으로 삼았던 많은 진보진영 활동가들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력 결핍’에도 책임이 있다. 이제는 국가의 재구성, 유능한 정부를 만들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김대호의 말대로, 새로운 2013년 체제는 “국가경영을 오랫동안 준비해온 잘 조직된 정치집단과 지식인 집단”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런 준비된 조직이 있는 집단은 어디인가. 이명박 정부는 “압도적 지지율과 국회의석수, 보수친화적인 검찰과 사법부와 재벌대기업, 시장지배적 언론"이라는 민주화 이래 최대의 호조건 속에서도 "거의 아무런 성과도 보여주지 못했다." 대기업-거대신문사와 방송-의회를 장악하고도 유능한 정부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앞으로 MB만큼 좋은 여건(?)을 가진 집권세력은 아마 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미안하게도 안철수 역시 국가를 재구성하고 유능한 정부를 만들 수 있는 집단이 없고, 민주당도 그러하다. 현재의 진보정당에게 '유능한 정부'를 기대하기란 더더욱 난망하다. 김대호는 ‘자아성찰, 지공무사와 구동존이’의 정치적 상상을 말한다. 포스트 MB시대의 대안적 방향으로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겠으나, 막상 현실로 눈을 돌려보니 여전히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