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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주드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5
토마스 하디 지음, 정종화 옮김 / 민음사 / 2007년 5월
평점 :
영국 출신 여배우 케이트 윈슬렛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하나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떤 ‘운명적 비극성’이라할 만한 것이 묻어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출연했던 많은 영화들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부과된 비극을 운명적으로 수락하는 인물을 연기한다. 중산층 가족의 허위와 폭력성(레볼루셔너리 로드), 10대 소년과 사랑에 빠진 하층 여성(더 리더), 정치선동가의 애인(올 더 킹스맨), 안락한 상류층의 삶을 거부하고 제 몫의 사랑에 투신한 여성(타이타닉) 등 영화속의 그녀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설사 그것이 자신의 삶을 더 큰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하더라도 담담하게 수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여배우들처럼 쭉쭉빵빵 몸매를 만들지 않고 통통한 제 몸 그대로 살겠다는, 여배우로서는 보기드문 결기도 그녀답다. 그녀의 필모그래피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이런 캐릭터를 처음으로 선명하게 각인시켜 주었던 <비운의 주드>다.
토마스 하디의 <이름없는 주드>(민음사)를 읽은 것도 그 때문이다. 수년 전 이 영화를 보고 그 서늘한 감동을 잊지 못해 하디의 원작 소설을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디는 <테스>와 몇편의 시 정도를 제외하고는 잘 몰랐는데, 그 뒤로 <캐스터브리지의 읍장>(한마당)과 같은 하디 소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비운의 주드>의 원제는 <Jude the obscure>다. 번역 판본에 따라서 <비천한 사람 주드>, <이름없는 주드>, <무명의 주드> 등 제목도 제각각이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1980년대 나온 두 개의 판본과 비교적 최근에 나온 민음사판 <이름 없는 주드>이다. ‘이름 없는’ 이라는 형용사가 영어 원제에는 부합할 지 모르나, 원작의 스토리와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는 ‘비운의’라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끊임없이 비가 내리는 지난 여름, 이 서늘한 사랑이야기를 읽으며 겨우겨우 습기 많은 여름밤을 견뎌냈다.
주드 폴리와 수 브라이드헤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자 사촌간인 이 두 사람의 삶을 읽다보면, 삶이란 참으로 어렵고 쓸쓸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하는 데는 온갖 장애물들이 등장하게 마련이고, 때론 예기치 않은 우연들이 틈입하기도 한다. 서로에 대한 절절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취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설사 성취된다하더라도 그게 곧 행복이 아닐 수도 있다. 남녀 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소설은 숱하게 많겠으나 이 소설만큼 운명적이고도 비극적인 사랑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운명적’이라는 말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극복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할 터인데, 애정 소설에 대한 형용사로는 아주 진부한 클리쉐다. 그럼에도 주드와 수의 경우에는 이 말 외에는 달리 쓸 말이 없을 것 같다. 두 사람의 비극적 운명은 이들이 가진 사랑에의 의지가 초래한 것일 수도, 두 사람의 집안에 내려오는 “폴리 집안 사람들은 결혼하게 되면 불행해진다”는 내력에서 온 것 일수도, 당대 영국 사회가 가진 인습과 편견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겠다. 두 사람이라면 심리학이, 집안 내력이라면 숙명론이, 인습이라면 사회학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근대인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삶의 아이러니’라고 보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선의가 배반을 당하고, 사랑이 참담하게 실패하며, 욕망이 좌절되는 삶의 아이러니는 착하고 선한 근대인이 겪어야할 불가피한 운명일 것이다.
주드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학문’을 하겠다는 야심을 키웠다. 그가 들어가고자 하는 세계는 ‘크라이스트민스터’라는 중세적 대학전통을 잇고 있는 학문의 성지. 이 소설 속의 크라이스트민스터는 가상의 대학공간으로, 하디는 옥스퍼드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주드는 돌을 쪼개고 다듬는 가난한 석공이지만, 밤이면 집으로 돌아와 홀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익히며 대학에 대한 꿈을 꾼다. 언덕 위에 올라 저 멀리 보이는 대학도시 크라이스트민스터를 동경하는 어린 소년의 꿈은, 그러나, 한 동네의 처녀 아라벨라를 만나 풋사랑에 빠지면서 결국 좌절된다. 돼지를 죽여 순대를 만드는 거친 일을 척척 해내는 억척스럽되, 지적 생활과는 거리가 먼 이 여자와의 삶을 위해 그는 계속 돌을 쪼개고 다듬어야 했다. 그의 첫 번째 좌절.
아라벨라와의 불행한 결혼은 그녀가 부모와 함께 호주로 떠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된다. 자신의 유보된 꿈을 실현하게 위해 찾아간 크라이스트민스터에서 그는 사촌간인 수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주드와 수는 가까운 친척이라는 것 외에도 “한 사람이 둘로 쪼개진 것 같은” 존재이자 “속박되지 않으면 얼마든지 잘하는 일을 속박되면 마음이 내키지 않는 습성이 우리 핏줄기에 들어있는” 연인들이다. 둘로 쪼개진 한 몸은, 아마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비유를 끌어들인 것이리라. 본래 한 몸이었던 남자-여자를 제우스가 남자/여자로 쪼갰다는 신화. 그런 플라톤에게서 사랑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행위다. 그래서 수가 주드의 옛 스승이자 나이차가 많은 필롯슨과 성급하게 결혼을 했어도 두 사람이 서로의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며 두 사람의 온전한 결합을 꿈꾸는 것도 그렇게 이해된다. 주드는 수의 곁을 떠나 사도가 되려 하나 첫 결혼으로 좌절된 학문에의 욕망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수 때문에 좌절되고 만다. 주드는 그의 야심과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사랑, 제도의 굴레 속에서 좌절당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가장 섬뜩한 부분은 주드의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가 두 사람의 아이를 죽이고 자신마저 자살하는 장면이다. 비극의 신인 멜포메네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이 아이가 남긴 유서는 “우리들이 너무 많아서 이렇게 떠납니다”라는 것. 크라이스트민스터의 집주인들이 아이들이 셋이나 되는 이 가족에게 세를 들이지 않으려 하자 이 아이는 임신한 수를 향해 “세상 안에 있는 것보다는 밖에 있는 편이 낫죠?”라며 “어머니는 어째서 이토록 심술궂고 잔인할 수가 있어요! 우리 모두를 좀 더 큰 고통으로 끌고 가는 거예요! 우리 모두가 함께 있을 방이 없어서 아버지가 다른 곳으로 가야하고 우리는 내일 쫓겨 나가야 하는데도 식구 하나를 곧 또 데려오다니!”라고 격렬하게 말한다. 이 대목은 어린아이의 투정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이것은 주드와 수의 사랑의 실존이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어떤 운명적 장벽처럼 느껴진다.
주드와 수의 사랑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둘의 삶은 더 비극적이 되고, 사랑의 결실인 아이들로 인해 더 큰 비극성이 잉태된다. 수는 주드에게 “날 사랑해선 안돼요. 나를 좋아하기만 하세요. 그 이상은 안돼요”라는 말하지만 두 사람의 애정은 그 한계를 용납하지 않는다. 둘은 가정을 꾸리고 살지만 그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결혼에는 이르지 못한다. 사랑의 감정적 완성과 사회적 공인, 내지는 제도 속의 편입은 두 사람에게 불가능하다. 그것은 “난 오빠의 사랑을 받는 허가가 주어진 순간부터 오빠를 두려워하기 시작할 거예요”라는 수의 진술처럼, 제도 안으로 진입하는 순간 깨어지는 것이다. “서둘러 결혼하고 천천히 후회하라”라는 당대 영국 사회의 권고사항과 상반되게 둘은 결혼에 실패하고 자신들의 사랑이 낳은 비극(아이들의 죽음) 앞에서 결국 결별하게 된다. “안녕하 가세요, 나의 동료 죄인이며, 가장 친절한 친구인 오빠”, “잘 가시오 나의 잘못 생각하는 아내여.” 이어 주드는 다시 돌아온 첫 부인 아라벨라로부터 버림받은 채 죽는다.
죽어가는 주드가 외치는 성경의 구절들은 자기부정의 묵시록으로 기억될 만하다. “내가 태어난 날을 멸하게 하라. 남자 아이를 잉태하였다하던 밤도 멸하게 하라.”“그날이 어둠이 되게 하라. 하느님이 위에서 돌보지 말게 하라. 빛이 그날을 비추지 말게 하라. 그 밤이 적막하게 하라. 거기서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게 하라.” “어찌하여 나는 태에서 죽지 아니하였는가? 어찌하여 어미에서 나오면서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그럼 이제는 조용히 누워 쉬고 있을 것이니, 잠들었을 것이니, 그러면 쉬고 있었을 것이니! 어찌하여 비참한 자에게 빛을 주시고 번뇌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는가.” (욥기) 토마스 하디의 서술은 주인공들의 비극에 대해 그 어떤 감정이입도 드러내지 않을 만큼 차갑고 냉정하다. 하드보일드 문체란 이런 것이 아닐 것인가. 가난한 석공 주드의 주검 옆에는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 그리고 그리어 신약성서와 돌가루가 묻은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가난하고 사랑에 눈먼 석공은 사회적 출세도, 사랑의 욕망도 이루지 못한 채 떠들썩한 축제의 날에 홀로 외롭게 죽어간다. 크라이스트민스터에 돌아온 주드가 이 대학도시의 시민들에게 외치는 다음의 말처럼, 우리의 삶에서 좋은 것은 무엇이고,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패배한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고 나의 가난이었습니다. 내가 한세대 안에 이루려고 했던 것은 대개 두 세대 내지 세 세대가 걸리게 마련입니다. 나의 충동은-애정은- 결점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사회적 이점이 없는 사내에게 방해물이 되지 않기에는 너무나 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좋은 기회를 잡으려면 물고기처럼 냉혈한 인간이 되고, 돼지처럼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비웃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감수할 용의가 있습니다. 나는 그런 대상으로는 딱 맞는 인물이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겪은 심적 고통을 안다면 나를 오히려 동정할 것입니다. (중략) 내가 여러분에게 병들고 가난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나에게서 가장 흉한 면은 아닙니다. 나는 원칙의 혼돈 속에 빠졌습니다. 어둠 속에서 암중모색을 하고 있습니다. 선례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팔구년 전 내가 처음으로 이곳에 왔을 때 나에게는 확고한 의견이 쏠쏠하게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견들은 하나씩 하나씩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나에게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의 내 생활법규에서는 나 말고는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오히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실상 기쁨을 안겨주는 내 기호를 따르는 것 이외에 달리 할 것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중략) 내 생각에는 우리의 사회적 구도가 어딘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보다 더 큰 통찰력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서 발견되겠지요. 혹시 정말로 그들이 그것을 찾아낸다면, 적어도 우리 시대에서 말입니다. ‘일평생 사람에게 무엇이 좋을 것인지 누가 알며, 또 몸 뒤의 태양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전도서, 6장 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