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이 종로에 새로 오픈한 헌책방에 다녀왔다. 종로에 있는 대형 헌책방이라...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보통 헌책방은 도심이 아닌 부도심이거나 변두리에 있게 마련이고 퇴락한 분위기와 머리가 허연 주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분위기가 대부분이기 때문. (신촌의 정은책방은 매장을 열 때부터 주인과 인사를 트고 지냈는데, 까맣던 머리칼이 그새 허옇게 변해 있었다. 그만큼 세월이 흐른 것이고, 그래서 지금 더 헌책방 스럽다.) 그런데, 알라딘의 종로 헌책방은 깔끔한 분위기에 잘 정돈된 서가, 헌책 보다 더 많아 보이는 새 책들, 그리고 북적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헌책방이라기보다 출판사의 재고처리용 매장 같았다.
누군가는 이 곳이 '종로서적'에 대한 향수를 마케팅으로 끌어들였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 진단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교보에 비해 매장 넓이나 구비된 책의 절대적 양에는 못미쳤지만 옛 종로서적은 푸근한 분위기가 있었다. 바로 옆에 있던 양우당 서점도 그랬다. 종로에서 시위를 하다 종로서적 뒷골목으로 도망쳤을 때, 시위대가 건물안으로 들어오자 마자 셔텨를 내려 전경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줬던, 마음씨 좋은 건물 수위 아저씨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종로서적이라는 이름은 그런 향수를 풍긴다. 알라딘 헌책방 손님의 상당수가 나이든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이런 진단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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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다수의 한국·일본·서구소설들. 빈약한 인문사회과학서, DVD와 CD 매장, 깔끔한 실내와 탁트인 쉼터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서가에 꽂힌 책들은 이빠진 세계문학전집(펭귄판, 문학동네판),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일본 현대 작가의 소설들이 많이 보였다. 열린책들이나 현대문학에서 나온 소설들도 많았다. 인문서나 사회과학서들은 이미 철지난 것들이거나 그다지 내구성이 없어 보이는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요컨대, 매력적인 도서목록을 갖춘 곳은 아닌 셈이다. 더구나 출간된 지 5년 내지 10년 미만의 책들이 많아서 헌책방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 나남출판사판 <겐지이야기>, <아르센 뤼팽 전집> 몇 권,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세 천황이야기> 정도를 샀다. <겐지이야기>는 한길사판과 나남판, 그리고 수 십년 전에 나온 판본 세 가지가 있는데, 각기 1권만 갖고 있던 터라 이참에 2, 3권을 추가로 샀다. 일본의 천황에 대해서는 <근대 일본의 천황제>(이산)와 메이지 유신에 관한 다수의 책을 흥미롭게 본 바 있어 저절로 손이 갔다. 메이지, 다이쇼, 쇼와 세명의 천황을 다루고 있는데, 번역자가 근대일본에 정통한 일본사 전공자여서 신뢰가 갔다. 허명 뿐인 천황이 이 세명의 근대천황을 거치면서 어떻게 ‘발명’되고 ‘무책임의 구조’가 만들었는지는 여전히 일본근대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서 가와바타의 <잠자는 미녀>를 꺼냈다. 이 사람은 가스배관을 물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유미적 취향으로는 늙음이 주는 육체의 퇴락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그렇듯이 일본 작가의 자살에는 자신의 미학과 이데올로기, 삶에의 태도가 일치하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물론, 아무리 좋게 보려해도 그럴 수 없지만 말이다. <잠자는 미녀>는 어쩌면 늙음의 추레함을 견딜 수 없었던 가와바타의 내면을 짐작케 해주는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67세의 노인이 사창가를 찾아 다섯 명의 젊은 아가씨와 차례로 잠을 자는 이야기.
이 소설에서 섹스는 한 장면도 나와 있지 않지만, 에로틱한 분위기가 소설 전반을 지배한다. 그 에로티시즘은 깨어있는 노인과 잠들어 있는 젊은 여자의 선명한 대비에서 온다. 67세의 노인 에구치는 사창가를 방문하는데, 그곳의 규칙은 섹스는 안되고 깨지 않고 내내 잠만 자는 젊은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다. 잠자는 미녀를 깨워서도, 장난을 쳐서도 안된다. 에구치는 그렇게 이곳을 다섯 번 방문해 모두 여섯명의 여자와 잠을 잔다. 그 중 한번은 잠자는 두명의 여자와 함께였다. 에구치의 노인됨은 여자의 싱싱한 몸과 대비되어, 노년의 추레함이 도드라진다. 동시에 이것은 남자의 능동성 대 여자의 절대적 수동성의 대비이기도 하다. 무방비 상태로, 옆에 누가 있는지, 밤새 자신과 같이 잠을 잔 사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 잠을 자는 미녀(들), 그러고 보니,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여성은 일본식 에로영화의 단골 소재다.
여인들은 에구치에게 어떤 응답과 대응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두 사람 이상의 관계와 그 관계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서사’는 없다. 그래서 이 소설은 에구치의 내면으로 향한다. 그의 옆에는 진홍빛 비로드 커튼 아래서 알몸으로 잠을 자는 여인이 있지만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도, 섹스를 할 수도,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을 나눌 수도 없다. 에구치는 다만 여인을 바라보고 가만가만 만져보고, 몽상에 젖을 뿐이다. 이 몽상은 그가 노인이기에 과거로 향한다. 그가 첫 키스를 했던 여인, 결혼식 뒤 아내와 함께 자신의 집에 도착했을 때 보이던 만발한 꽃들, 출장간 지방에서 만나 잠시 외도를 했던 젊은 여인. 이 소설의 재미는 욕망의 존재와 그 욕망의 실현불가능성을 아슬아슬하게, 그리고 서글프게 보여주는 데 있다. 가와바타이 상상력은 물론 남성 판타지에 입각해 있다. 동시에 지배적인 남성 대 무기력한 여성이라는 비대칭적 성-권력의 발현이기도 하다. 가와바타의 ‘미학적 상상’은 이런 정치적 독해를 빨아들일 만큼 독하다.
이 소설과 함께 실린 <한 팔>도 판타지이긴 마찬가지인데, 이 역시 욕망의 극단적 형태로서 ‘육체성의 소유’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자신의 한 팔을 떼어준다. 살아있는 여인의 한 팔을 품에 안고 집에 돌아온 남자는 여인의 팔과 대화를 하고, 자신의 팔을 떼어 그 자리에 여인의 팔을 붙이기도 한다. 여인의 모든 것은 오로지 한 팔에 집약되어 그녀의 모든 것을 대신한다. 욕망이 어떤 극한에 이르면 대상의 모든 특성이 집약된 어떤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이를 것이다. (프로이드의 전치(displacement)?)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할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한 부분에 집약시켜 그것을 욕망의 대상에게 헌정하는 것. 결혼식 반지는 이것의 상징적 의례 도구이리라. <설국>의 작가다운 지극히 탐미적인 소설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