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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친구로부터 이 책을 선물받았을 때 기쁜 마음에 비해 어쩐지 제목이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자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세대이기도 하거니와, 중국소설은 아직까지 많이 접하지 않은 탓인가 했다. 가만가만 생각해보니 삼국지, 손자병법과 같은 한국작가의 중국소설을 접한 이후로 중국작가의 소설을 첫번째로 읽어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란 사실도 이제야 알았다.
그런저런 생소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젠 친근해지고 읽는 내내 함께 호흡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한 인간의 삶이 그리 낯선 것이 아니며, 역사를 통틀어 사람이 가족을 이룬 이후 비록 문화는 틀릴지 몰라도 살아가는 인생역정은 현재의 나, 혹은 읽는 누구나의 얘기도 될 수 있는 개연성에 있지 않나 싶다. 허삼관(許三觀)은 주인공의 이름이며, 매혈기(賣血記)는 말그대로 피를 팔러다닌 인생역정의 기록이다. 왜 피를 팔았는지, 그리고 그가 팔았던 피는 그의 인생에서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있다. 다만 작가처럼 엮어내지 못했을 뿐, 혹은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지 않았을 뿐이다.
"오늘에서야 피땀 흘려 번 돈이 어떤 거라는 것을 안 셈이지요. 제가 공장에서 일해 번 돈은 땀으로 번 돈이고, 오늘 번 돈은 피 흘려 번 돈이잖아요. 이 피 흘려 번 돈을 함부로 써 버릴 수는 없지요. 반드시 큰일에 쓰도록 해야지요."(31p) 주인공 허삼관은 우연한 기회에 첫번째 매혈을 하고 난 뒤 이렇게 말했다. 그런 마음으로 그 돈으로 그는 '허옥란'과 결혼을 하여 아들 셋을 낳고 가정을 이루지만, 그의 매혈은 인생의 질곡마다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를 수 밖에 없는, 그리하여 글 읽는 우리를 마음 조리게 하는 이 소설의 가장 큰 긴장요소이다. '허옥란'의 부정한 사실을 알고 아내의 짐을 다 들어낸 후, 그 살림살이를 찾아오기 위해서 피를 팔았고, 가뭄으로 못 먹은 가족에게 국수 한 그릇을 먹이기 위해 피를 팔았고, 죽어가는 아들을 위해 위험천만한 매혈여정을 감행한다.
"아니, 먼저는 힘을 싹 팔았고, 그 다음엔 온기를 싹 팔았다더니, 그럼 이제는 목숨만 겨우 남았을텐데, 또 피를 팔면 그건 목숨을 팔아 넘기는 거 아니요?"(285p) 그런 걱정스런 만류에도 피를 팔았던 허삼관이지만, 정작 매번 피를 팔고나서 먹던 돼지간볶음과 황주 맛이 그리워, 정말로 자신을 위해 유일하게 피를 팔고 싶었을 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매정한 거절과 힘없이 늙어빠진 자신에 대한 슬픈 자각이었다. 매혈하고 후둘거리는 다리에 한기에 오돌거리는 그의 모습은 낯익은 우리들 아버지의 모습이며, 슬픈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인생여로를 다룬 많은 소설처럼 이 글에서도 순탄치 않은 가족사의 단면을 자주 보여준다. 애지중지 키우던 첫 아들 '일락'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오는 그의 배신감과 역설적 행동은 오히려 허삼관의 순박함을 보여주는 듯 하다. 친아비(하소용)의 죽음을 막고자 지붕 위에서 영혼이 떠나지 않게 이름을 불러대라고 아들을 타이르고는 직접 지붕에서 '일락'을 데리고 내려와 구경하는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일락'이 죽어가는 '하소용'의 아들이 아니라 내 친아들임을 선언하는 장면은 영화였으면 눈물 한번 흥건하게 쏟아내었을 장면이다. 문화혁명 시절 인민재판을 받은 아내의 수난과 농촌 생산대에 끌려간 아들들의 모습, 첫 아들 '일락'으로 인한 많은 얘기들 속에서 갈등과 붕괴, 봉합과 치유의 가족사를 접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이 모두 이 단어들 사이를 오가는 시소놀이인지도 모른다.
어릴 때 읽었던 펄벅의 "大地"가 생각났다. 중국 농촌의 음울한 분위기가 아직도 가슴 속에서 스믈대는 듯 한데,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는 또 다른 느낌이다. 복잡한 인생사를 다루나 간결하고, 역설적이나 오히려 직설적이다. 일생동안 허삼관이 피를 파는 이야기를 통해 변해가는 자신의 많은 것들 속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보여 준, 슬프나 즐거운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