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위기가 그것이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명색이 방송사에 몸담고 있던 나는 불안감만 느꼈을 뿐 일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중략) 워싱턴으로 출장 간 남편이 매일같이 전화를 해서 "여기는 한국에 전쟁 난다고 난린데 거기는 괜찮으냐"고 묻는 것뿐이었다. (중략) 워싱턴에서는 수십년 동안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던 한반도 전쟁계획 '작전계획 5027'이 처음으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한반도에는 그해 4월 중순 패트리엇 미사일이 실전배치되었고 공격용 아파치 헬기도 들어왔다. (중략) 그해 5월 셋째주 주한미군은 NEO (비전투원 소개작전)를 실시했다. 비상시 미국 민간인들을 안전한 다른 나라로 대피시키는 훈련이다. (중략) 우리 정부는 미군에 '소개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좋지만 조용히 해달라'는 입장을 비공식적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중략) 결국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위원장을 만나면서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 양국의 대립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고 한반도의 위기는 남북정상회담 국면으로 급변할 수 있었다. (중략) 기자가 되기 직전의 일이었지만 당시 무지했던 나에 대한 스스로의 비판은 나로 하여금 한반도 주변 정세에 더욱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생활필수품이나 금 사재기를 하던 일부 계층을 비난만 하던 언론. 대북제재는 북한을 대화로 나오도록 하기 위한 것일 뿐 위기를 증폭시키는 것이 아니라며 연일 대북 강경책을 내놓던 정부. 미국인들이 한반도를 떠나는 훈련을 받는지도 모르고 우리에게 지급될 방독면이 없는지도 모른 채 정부를 믿고 생업에 충실하던 선량한 국민들. 한반도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36-40p쪽
금강산 관광을 위해 통일전망대에서 철책에 이르는 군사도로는 버스가 다닐 수 있도록 정비되었다. 보수진영에서 남북 도로 연결이 남침 진격로를 열어준다고 펄펄 뛰는 게 근거없는 얘기는 아닐 듯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슷한 시기 임시 개통된 경의선 남북연결 도로는 더욱 심각하다. 1시간도 채 안되는 거리에 바로 서울이 있지 않은가. 1950년 6.25 당시 미아리 고개를 넘어 유유히 진격해온 인민군의 모습을 기억하는 세대나 군사 당국은 걱정이 될 법도 한 일이다. 그렇다면 한 번 거꾸로 생각해보자. 금강산 연결 육로와 개성으로 가는 경의선 육로는 북한의 보수 진영과 군부에게 어떤 의미일까? 인천 상륙작전 뒤 압록강 인근까지 밀린 경험이 있는 북한군은 남북연결 육로를 '북침로'로 여겼다고 한다. (중략) 남북이 철도도로 연결에 합의했을 때 북한 군부의 위기감은 남쪽 보수 인사들의 걱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한다. 아무리 하늘 같은 '장군님' 명령이라 해도 개성에서 평양까지 고속도로로 달리면 불과 2시간. 북침 진격로를 열어주는 것이라고 걱정을 했다고 한다. 우회로도 없는 데다 공군력에서도 열세인 만큼 북한 군부의 고민은 더욱 컸다. 서부전선의 군사 작전 계획을 변경하고 포 진지를 이동한 뒤에야 어렵사리 도로를 개통할 수 있었다.-60p쪽
남북관계 개선이 우리의 정신을 해이하게 한다는 일부 보수 인사들의 발언과 북한에서 빚어진 소동이 어찌나 닮아 있는지. 그러나 남쪽은 도로만 개방했을 뿐 땅을 내놓지는 않았다. (중략) 개성공단 예정지는 배후단지를 포함해 총 2000만 평. 이곳에 우리 공장들이 들어가고 있으니 군사분계선을 그만큼 북으로 밀어낸 형국이다. 북한군은 공단 개발을 위해 지하의 군사시설과 무기를 모두 옮겨야 했다. 금강산도 마찬가지다. 해상 호텔과 해상 골프연습장. 해수욕장과 횟집 등이 들어서 있는 장전항은 북한의 최전방 천혜의 군사항이다. 한 퇴역 군인은 과거 정보부대가 가장 갖고 싶어했던 정보 중 하나가 장전항 사진이라고 했다. 그런 장전항에 남쪽의 배가 무시로 드나들었다. (중략) 최전방 군사항을 내준 북한 해군의 속은 얼마나 쓰렸겠는가? (중략) 앞으로는 내륙 쪽 내금강까지 개방하기로 했으니 북쪽 군부의 걱정은 늘어가고 있다. 남쪽에서 오는 저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누군지, 뭘 하는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이다.-62p쪽
우리가 북한에 퍼주는 돈은 눈에 보이지만 남북관계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중략) 핵문제나 남북관계로 인해 북한만 경제적 효과를 얻는다는 주장은 분명 착각이다. 북한의 한 해 예산은 삼성전자의 1/4분기 매출 정도이다. 이렇게 엄청난 경제규모의 차이로 볼 때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 안정으로 우리가 가져오는 경제적 효과는 북한이 얻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다. 되로 주고 말로 퍼오는 격이다.-69p쪽
2000년 6월 13일 평양.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을 순안공항으로 직접 영접 나왔다. 그리고 김 대통령의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를 직접 찾아와 정상회담을 했다. 당시 언론은 김위원장의 파격적인 행보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측근들이 "김대통령을 직접 찾아다니는 것을 반대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용순 비서가 자꾸 빨간 불을 켜는데 새총으로 빨간 신호등을 깨버리겠다고 하고 이리 찾아왔노라"고 했다. (중략) 그의 발언을 찬찬히 뜯어보면 그도 수많은 빨간 신호등에 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8월 남한 언론사 사장단은 대남적화를 언급한 노동당 규약과 강령을 바꿀 의향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도 (노동당) 규약은 고쳤으나 1945년에 만들어진 강령은 안 바꿨습니다. 그런데 강령은 해방 직후 것이어서 과격적, 전투적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 간부들 가운데는 주석님과 함께 일하신 분들도 많고 연로한 분도 많습니다. 그래서 쉽게 바꿀 수 없습니다. 강령을 바꾸면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도 함께 물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강령을 바꾸면 내가 숙청한다고 그럴 것입니다."-90p쪽
당시 언론사 사장단은 비행기를 타고 중국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갔는데, 그들은 김 위원장에게 이제 다른 나라를 거치지 않고 직항 비행기로 바로 다니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김정일 위원장은 그 제안을 즉석해서 허락했다. 그러면서도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설명했다. "직항로 문제는 정부 내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고 군부가 문제인데, 군대문제는 내가 말해야 직항로가 열리게 돼 있습니다. 직항로를 열면 비행기에서 특수 카메라로 다 사진을 찍는다고 군부에서 반대를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미 인공위성이 다 우리 사진을 찍고 있는데 비행기 타고 찍는다는 게 문제될 게 있는가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이 말을 뜯어보면 북한 정부와 군부 간에는 노선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강경 군부의 우려와 반대는 김정일이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북한의 정책 결정 과정을 알게 된다. -93p쪽
2002년 9월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북한을 방문해 북일정상회담을 하고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북한은 일본인 납치를 시인했다. 발뺌할 줄 알았던 외부 세계는 놀랍고 과감한 '고백'을 잠시 좋게 평가했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는 반북정서가 해일처럼 일기 시작했다. 그때 북한의 한 고위인사에게 "왜 일본인 납치를 시인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일꾼들은 모두 다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장군님이 '이제는 더 이상 과거에 발목 잡혀서는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서 과거사를 모두 청산하도록 지시했습니다."-93-4p쪽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열흘 앞둔 6월 3일.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비밀리에 북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의 의제와 절차문제 등을 협의했다. 바로 그 때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 일행이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호치민 베트남 주석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금수산궁전에 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국가원수가 외국을 방문할 때 상대국의 국립묘지를 방문하는 의전을 지켜달라면서 자신도 서울에 가면 반드시 국립묘지를 참배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남쪽은 그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정일 위원장은 남측이 하지 못한 '참배 이벤트'를 북측이 먼저 보란 듯이 해냄으로써 자신의 통 큰 결단과 절대적 지위를 과시한 셈이다. 상대국의 국립묘지 방문은 아마도 '인정과 존중'을 의미할 것이다. 특히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남북에게 참배란 과거에 대한 유감 표명이자 발전적인 미래로 나가자는 조심스럼 메세지일 것이다. 남쪽에게는 시기상조였지만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2000년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했다.-110p쪽
분단 61년, 남북대화 35년 동안 남북은 참 많이 싸웠고 대화도 많이 했다. 다툼의 방식도 많이 변했다. 대결의 시대 남북의 상호 비방은 치열했다. 대화를 하면서도 서로를 '괴뢰'로 불렀고 그 지도자를 '살인마'로 칭했다. 적대적인 말은 적대적인 행동을 불러왔고 그 행동은 또다시 험한 말을 낳았다.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었고 상대방은 '박살'내거나 '각을 떠야 할' 원수였다. (중략) 이런 말싸움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당당하게 회담장을 박차고 나오며 "이후 벌어지는 모든 사태의 책임은 '귀측'에 있다"며 책임을 전가했다. 대화는 수시로 중단됐고 그럴 때면 남북은 담을 쌓았다. 대화의 통로 자체가 붕괴되기도 했다. 그러다 할 말이 생기면 멀쩡한 직통전화나 남북연락관을 놓아둔 채 관영 라디오를 통해 자기의 입장을 전파로 날려 보냈다.-138p쪽
북한의 고민은 결국 갈지자 행보가 되어 나타난다. 휴대전화를 개통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금지한다. 정보 유통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정보화시대에 컴퓨터를 알아야 한다고 그렇게 홍보하면서도 인터넷을 개방하지 못한다. 당국이 엄선해주는 정보만 받으라고 하니 전문가들은 답답해서 죽을 노릇이다. 경제는 바뀌어도 사상 교육은 더욱 강화해야 한다. 미국의 위협에 맞서서 국방력도 계속 늘려야 한다. 변화가 체제 변화를 의미한다면 그건 세상이 깨어져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변해야 하지만 변하면 안되는 것이 북한의 현실이다. 그러나 갈지 자 행보 속에서도 북한은 이미 변화하고 있다. 돈맛을 알기 시작한 주민들은 이미 화폐경제와 시장에 익숙해졌다. 변화의 핵심은 북한 경제의 체질을 개선해 세계 경제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당국은 '더 높이 더 빨리' 뛰라고 주민들을 독려하고 있다-196p쪽
2000년 8월, 평양 2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다시 만난 그는 전금진이라는 본명으로 회담에 나왔다. 그는 베이징의 4성급 호텔 일반실이 아닌 북한 최고의 고려호텔 스위트룸에 묵으며 회담을 지휘했다. 대동강 유람선상에서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1998년 회담을 진솔하게 회고했다. "내 그때 조국으로 돌아가며 피눈물을 흘렸소. 남북대화 30년에 회담 탁자를 치며 고함을 치긴 그때가 처음이었소." 무엇이 그를 그토록 슬프고 분하게 했을까? 판문점에서 국회의장들과도 자신만만하게 회담하던 그는 굶주린 주민들을 대표해 베이징에 나와 비료를 얻기 위해 10여일이나 회담에 매달렸다. 회유도 해보고 소리도 쳐봤지만 그도, 그의 조국도 힘은 없었다. 받고자 하는 것은 많았지만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패장이 돼 빈손으로 돌아가는 귀국길에서 그는 없는 자의 설움을 통감했으리라. 서글픈 회상도 잠시, 그는 웃는 낯으로 남쪽 인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 S선생이 가장 악질이었소. 그때 다 될 뻔했는데 거기서 트는 바람에 안 된 거요. 그런데 이제 다시 마주앉아 이렇게 웃으며 얘기를 하고 있지 않소."-202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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