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한 물리, 의학서를 회독하는데 있어서도 해석을 해주거나 소리 내어 읽어줄 사람은 없었다. 몰래 가르치는 것도 묻는 것도 서생 사이에서는 수치로 여겼기에 절대로 이것을 어긴 자는 없었다. 오로지 자기 혼자서 독파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문법을 토대로 사전에 의지하는 길밖에 없다.-104p쪽
회독 날이 가까워지면 한 달에 여섯 번 있는 시험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열심히 공부했다. 책을 잘 읽느냐 못 읽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재능에 달려있기도 했다. 어쨌든 주위를 속이면서 적당히 몇 년 지내고 나면 승급이 된다거나 졸업을 하게 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진정한 실력을 기르는 수업을 했으므로 숙생들은 원서를 잘 읽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106p쪽
(영국 패러데이 전기학설에 대한 원서를 빌려보고) "이 책을 그냥 보고만 있어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보는 건 중단하고, 자 베끼자." (중략) 오가타의 서생들은 사본 제작의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기에, 한 사람이 원서를 읽으면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듣고 받아쓸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은 읽고 한 사람은 쓰기 시작했다. 쓰는 사람이 다소 지쳐 붓놀림이 둔해지면 즉시 다른 사람이 교대하고, 지친 사람은 아침이건 낮이건 즉시 잠을 자는 방식으로 밤낮 없이 밥 먹는 시간도 담배 피우는 시간도 쉬지 않고 계속했다. 그 결과 대략 2박3일에 걸쳐 전기에 관한 부분은 물론 그림도 베끼고 교정까지 보았다.-111-2p쪽
무엇 때문에 고학을 하느냐고 물어도 대답할 말이 없다. 명예를 추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난학 서생이라고 세상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할 뿐인지라 이미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있었다. 오로지 밤낮으로 고생하며 어려운 원서를 읽고 좋아할 뿐 정말로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당시 서생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었다. 그 즐거움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런 것이다. 서양의 새로운 문명이 기록된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일본 전국에서 우리밖에 없다. 우리 동료들만 가능한 일이다 하면서, 가난하고 고생스럽게 조의조식, 언뜻 보기에는 볼품없이 초라한 서생이지만, 왕성한 지식과 고고한 사상만큼은 왕족귀인을 눈 아래로 내려다볼 정도였다.-113p쪽
어쨌든 당시 오가타 서생들은 십중팔구 목적도 없이 고학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목적이 없는 덕분에 오히려 에도의 서생들보다 공부를 잘 할 수 있었던 듯하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서생들 역시 학문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지나치게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면 오히려 학업에 지장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중략) 면학하는 중에는 그저 조용히 지내는 것이 최상일 것이라는게 나의 결론이다.-115p쪽
배를 타고 외국으로 나가보자는 결정이 내려진 건 안세이 6년(1859년) 겨울이었다. 즉 (미국 페리 제독의) 증기선을 눈으로 본 뒤로 7년, (네덜란드인으로부터) 항해술을 전수받기 시작한 지 5년째 되는 해에 결정을 내려, 드디어 이듬해인 만엔 원년(1860년) 정월에 출항하게 된 것이다. (중략) 지금의 조선인, 중국인, 혹은 동양 전체를 살펴보아도 불과 5년 동안 항해술을 배워서 태평양을 횡단하겠다는 계획과 용기를 보인 경우는 결코 없을 것이다.-136p쪽
당시는 물가가 싸서 그렇게 많은 돈은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 남은 돈을 모두 갖고 가서, 런던 체류 중에 다른 것은 제쳐놓고 오로지 영서만 사 갖고 왔다. 이것이 일본에 영서를 수입한 최초의 일로, 그로 인해 일본에서도 영서를 자유로이 사용하게 되었다.-151p쪽
런던에 있을 때, 어느 교회의 사람이 교회이름으로 의원에게 건의했다면서 그 초고를 일본사절에게 보내왔다. 내용인즉슨 재일본 영국공사 올콕이 신흥국가인 일본에서 극심한 횡포를 부린다, 마치 무력으로 정복한 국민을 대하듯 한다 운운하며 각종 증거를 들어 공사의 죄를 비난하고 있었다. (중략) 나는 이 건의서를 보고 가슴이 아주 후련하였다. 이제까지 외국 정부의 태도를 보면 일본의 약점을 파고들어 일본인의 불문살벌을 틈타 갖가지 무리한 시비를 걸어오는 바람에 몹시 난처하였다. 그런데 그 본국에 와보니 사람들이 무척 공명정대하고 온순하다는 생각이 들어, 내 평생의 소신인 개국일편의 설을 견고히 한 적이 있다.-154-5p쪽
도쿠가와 정부의 완고함을 보여주는 일례를 들면 이런 일이 있었다. 체임버스의 경제론을 한 권 갖고 있던 나는 무슨 이야기 끝에 대장성의 요직에 있는 사람에게 그 경제서 이야기를 했고, 그는 무척 기뻐하며 부디 목차만이라도 좋으니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그 목차를 서둘러 번역하던 중, 'competition'이란 단어에 부딪쳐 이리저리 궁리 끝에 '경쟁(競爭)'이라는 번역어를 만들어내 처리했다. 그는 무척 감명을 받은 듯했다. "아니, 여기 '다투다'(爭)라는 글자가 있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무슨 뜻인가?" "무슨 뜻이냐니? 이건 별다른 게 아니다. 일본의 상인들이 하는 것처럼 옆에서 물건을 싸게 팔면 이쪽 가게에서는 그보다 더 싸게 팔아야 하고 (중략) 서로 경쟁을 벌여 그 결과 물가를 제대로 정해질 뿐 아니라 금리도 정해진다. 이것을 이름하여 경쟁이라고 한다." "음, 그런가. 서양의 방식은 엄격하군." (중략) "과연 그렇게 말하니 이해가 되기는 하나, 아직 아무래도 '다투다'라는 글자가 마음에 걸린다. 이래서는 로주님께 보여드릴 수가 없다." 이렇게 이상한 소리를 하길래 낌새를 살펴보니, 경제서 안에서 사람들끼리 양보하는 내용을 보고 싶어하는 듯했다. 예컨데 장사를 하면서도 충군애국, 국가를 위해서는 공짜로도 판다는 식의 내용이 적혀 있다면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215p쪽
(게이오주쿠 숙생들에게) "오래전 나폴레옹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침략을 받은 네덜란드는 본국은 물론이고 인도지역까지 모두 점령당해 국기를 게양할 곳이 없어졌지만, 전세계에 단 한 곳만 남아 있었다. 바로 일본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이다. 데지마는 예전부터 네덜란드인의 거류지로, 유럽 전쟁의 영향도 일본에는 미치지 않아 데지마의 국기는 항상 하늘 높이 휘날리고 있었다. 따라서 네덜란드 왕국은 단 한 번도 멸망한 적이 없다며, 지금도 네덜란드인들은 자랑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 게이오주쿠는 일본의 양학을 위해 네덜란드의 데지마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온갖 소동이나 난리에도 불구하고 양학의 명맥을 굳게 지켜왔다. 게이오주쿠는 단 하루도 문을 닫은 적이 없다. 이 주쿠가 건재하는 한 대일본은 세계 속의 문명국이라 할 수 있다. 긍지를 가져라."-236p쪽
원래 나의 교육방침은 자연의 원칙에 무게를 두고 수(數)와 이(理) 두가지를 근본으로 하여, 세상만사 모든 일의 처리를 이로부터 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 도덕론에 있어서는 인간을 만물 중 가장 고귀한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 절대로 비열한 짓이나 방정치 못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며, 불인·불의·불충·불효 같은 못된 짓은 누가 부탁하건 아무리 긴급한 상황에서건 하지 않겠노라고, 항상 몸을 고귀하게 간직하며 이른바 독립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일단 목표를 정했다. 이 목표에만 전념한 이유는 동양과 서양의 역사를 비교해보면 그 진보의 속도에 정말로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도덕의 가르침이 있고 경제에 관한 지식도 있고 문무에 제각기 장단점이 있으면서도, 일단 그 국세를 살펴보면 부국강병이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면에서 동양은 서양의 밑에 놓이게 된다. 국세의 정도는 국민의 교육수준에서 나온다고 본다면, 분명히 쌍방의 교육법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동양의 유교주의와 서양의 문명주의를 비교해보니, 동양에는 유형의 것으로는 수리학, 무형의 것으로는 독립심, 이 두가지가 없었다. -239p쪽
무슨 이유에서 예전에는 번에 대해 그토록 비열하던 사내(후쿠자와 본인)가 훗날에는 모처럼 주겠다는 후치마이조차 완강히 사양하게 된 것일까? 사양하지 않더라도 비웃을 사람은 없는데, 전혀 딴 사람이 된 듯, 얼마 전까지 마치 조선인 같았던 녀석이 주겠다는 물건을 기세등등하게 마다하고 백이숙제 같은 고결한 선비로 변모한 것은 정말로 대단한 변화였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 자신이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필경 봉건제도의 중앙정부를 타도하자, 그와 더불어 개인의 노예근성도 일소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303p쪽
나라 전체의 대세는 오로지 개진과 진보로 기울어 차츰 그 결실을 맺게 되고, 수년 후에는 그 성과가 청일전쟁에서 관민일치의 승리로 나타났으니, 유쾌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살아있다보니 이렇게 좋은 구경도 하는구나. 먼저 죽은 친구들은 불행하다. 아, 보여주고 싶구나'하며 나는 몇 번이고 눈물을 흘렸다. 사실 청일전쟁은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그것은 일본외교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니 그렇게 기뻐할 것도 못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면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들의 원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신일본의 문명부강은 모두 선인유전의 공덕에서 유래하며, 우리는 마침 좋은 시절에 태어나 조상님 덕분에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니, 나에게는 두 번째 큰 소원성취라 할 수 있겠다.-364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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