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도에 영향을 준 사상이 불교, 유교 등임을 설명하며) 지금까지 서술한 것처럼 그 연원이 어디에 있든지 무사도가 스스로 흡수하고 동화된 본질적인 원리는 단순하면서도 그 숫자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전란으로 날을 지새우던 불안정한 시대에 사람들의 삶에 확고한 불굴의 교훈을 심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본인의 선조인 무사들의 건전하면서도 순박한 성격은 고대 사상의 큰 길, 혹은 좁은 길에서 평범하지만 단편적인 교훈의 이삭들을 주워 모아 풍요로운 정신의 양식으로 삼았다. 그리고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그 교훈으로부터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인간의 길을 형성하였다.-44p쪽
일본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개항 후 일본이 단 몇 년 만에 봉건제를 폐지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무사들은 가산을 몰수당한 대가로 받은 공채를 상업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중략)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고결하고 정직한 무사였다.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상공업 분야에서 이해타산이 빠른 상인들과 경쟁하기는 했지만 부족한 장사 수완으로 인해 회복하기 힘든 큰 실패를 겪었다. (중략) 주의 깊은 독자라면 이미 부의 길과 명예의 길은 같지 않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90p쪽
그리피스(Griffis : 미국의 목사)는 "중국의 유교가 부모에 대한 복종을 인간의 첫 번째 의무로 삼고 있는데 반해, 일본의 유교는 주군에 대한 충성을 그 첫 번째 의무로 삼고 있다"는 점을 정확히 짚어냈다.-108p쪽
용(勇)의 단련은 어떤 일에도 불평하지 않는 인내의 정신을 기르는 것이며, 예(禮)의 교훈은 자신의 슬픔이나 고통을 겉으로 드러내어 타인의 쾌락이나 안정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울려 금욕적인 심성을 낳았으며, 마침내 외형적 금욕주의라고 해도 좋을 일본의 국민성을 형성시켰다.-127p쪽
무사들은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것이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쁨과 분노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을 강한 성격을 보장해주는 원칙으로 여기며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시켰다.-128p쪽
일본인이 할복을 전혀 불합리하게 느끼지 않은 것은 단지 연상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할복을 할 때 신체의 특정 부위를 골라 칼을 댄 것은 그곳에 영혼과 애정이 깃들어 있다는 고대의 해부학적 신념에서 기인했다. (중략) 이런 신경생리학의 학설이 받아들여진다면 할복의 논리는 간단히 설명될 수 있다. "저는 제 영혼이 들어있는 곳을 열어 당신에게 그 상태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제 영혼이 더러운지 깨끗한지 당신의 눈으로 확인해 주기를 바랍니다."-136-7p쪽
극동 연구가인 헨리 노먼(Henry Norman)은 일본이 동양의 다른 국가들과 유일하게 다른 점으로 "인류가 지금까지 고안해 낸 명예에 관한 규칙들 중, 가장 엄격하고, 가장 숭고하고, 가장 정확한 것이 국민들 사이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단언했다. 노먼은 현재의 일본을 건설하고 장래의 일본의 운명을 추진하는 원동력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일본의 변모는 오늘날 분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중대한 사업에 다양한 동기가 작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만약 그중에서 가장 주된 힘을 들라고 한다면 누구든 주저없이 무사도의 손을 들 것이다.-187p쪽
동양의 제도와 그 민족을 자세히 관찰한 M. Townsend는 "우리는 늘 유럽이 일본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만 들어왔을 뿐, 이 섬나라의 변화가 순전히 자발적이었음을 잊고 있다. 유럽이 일본에게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일본 스스로 유럽의 문무에 걸친 제도들을 배워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몇 년 전 터키가 유럽에서 대포를 수입한 것처럼 일본은 유럽의 기계과학을 수입했다. 그러나 그것을 정확히 말한다면 일본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다. 영국이 중국에서 차(茶)를 수입했다고 해서 영국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189p쪽
유럽과 일본의 역사적 경험을 살펴볼 때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유럽의 기사도가 봉건제도의 품에서 떨어져나와 기독교에 의해 양육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은 데 반해, 일본의 무사도는 자신을 양육해 줄 위대한 종교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신의 생모인 봉건제도가 붕괴하자 무사도는 고아로 남아 자립적으로 살아가야 했다.-197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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