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손에 잡혀야 새로운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모르는 게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순간이 바로 지식에의 열정이 시작되는 때이다. - P. 18

실용적인 지침 하나 : 누군가 뭘 ‘안다’고 말하면 ‘해봤어?’라고 한번쯤 물어서 그의 지행합일 정도를 측정해 보자! - P. 22

‘내가 뭘 안다’고 스스로 자부할 때에는 항상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의심을 스스로에게 제기해야 한다. 따라서 앎에 대한 참다운 자세를 가진 사람은 늘 자신이 있는 것이 무엇이고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 P. 28

책과 세상이 따로가 아니니 책 읽기와 세상 읽기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 이렇게 말하면 사실 거짓말이다. 책은 책이고 세상은 세상이라고 느껴질 때가 훨씬 많으니까 말이다. - P. 44

책이라는 게 그저 종이에 활자로 인쇄해서 나오면 끝나는 물건이라는, 책에 대한 얄팍한 생각만을 가진 사람들은 나의 이론 분노를 어이없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책은 그렇게 만만한 물건이 아니다.
책 따로 세상 따로인지, 책과 세상이 서로 엉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내 삶과 책은 서로 엉켜 있다. 난 책에서 읽은 것을 세상에서 확인하고 세상에서 겪은 것을 책에서 정리한다. - P. 52

현대사회에 지식인이 살아가는 모습은 다양하지 않다. 둘뿐이다. 체제 안으로 흡수co-고용opt되어 살아가거나, 아니면 꿋꿋이 살아가거나 뿐이다. 후자를 선택하면 훨씬 개운하다. 단 후자를 선택했으면 자의에서건 타의에서건, 남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우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 P. 76

끝으로 한국의 일상적 파시즘론자에게 두 마디.
한마디, 뭘 분석하려면 경제적 바탕 위에서 하도록.
두 마다, 남들 욕하지 말고 자기부터 파시즘적 작태를 저지르지 말도록. - P. 116

고민하라. 번뇌하라. 아무 생각 없음은 악이다. - P. 130

끊임없이 공부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독자적인 판단을 하도록 노력하라. 21세기적 인간이 되어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살기가 귀찮으면 단순한 사회로 돌아가라. - P. 130

내가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기준이 대체로 이렇다. 사람 자체보다는 그가 하는 짓을 따진다. 그가 나와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서로를 이용할 것인지 등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난 소위 ‘인간적 관계’로 얽힌 사람이 별로 없다. 담담하게 사람을 만날 뿐이다. 정이 별로 없다. 누구를 특별히 미워하지도 않으며 각별히 아끼는 사람도 없다. - P. 160

내가 특정이념을 신봉하지 않는 것은 이념이 덧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념 이전에 인간이 있었으니 이념이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의미 있는 게 못된다. 나는 사태를 객관적으로 설명해주는 이론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 P. 161

부박한 세상에서,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사회에서 믿을 건 고전뿐이다. - P. 167

세상이 아무리 뒤죽박죽되어도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는 제자리로 되돌아올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다음으로 아무리 어린 사람이어도 존중해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다. 세상은 나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능력과 인격으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 제대로 된 삶의 기초라는 걸 배울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공부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서도 기본이다. - P. 178

역사책 읽기는 철학적 주제들에게 생동성을 가져다준다. 몰역사적인 철학적 사유는 위험한 것이다. - P. 192

지금까지 어설프게나마 적어본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학대>이다. 스스로를 괴롭히면서도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매저키스트가 된다면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공부를 해서 명예를 얻지 않아도 슬프지 않으며, 공부가 돈이 되지 않는다 해도 서럽지 않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바로, 옛 사람들이 말했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인지도 모르겠다. - P.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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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첫 문학과지성 시인선 345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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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은하계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엔 들리지도 않는
비명을 내지르며 돌고 돌다가
내 가슴에 안경알 고정시키는 나사못만큼
작은 소용돌이로 붙박여올 때

저기 저 남태평양쯤에서
몰려다니던 미친 태풍이
구름을 몰고 천둥 벼락 치며 휘몰려 다니다가
내 발끝에서부터
내 새끼손가락의 보일 듯 말 듯한 지문만큼
작은 소용돌이로 북상해 올 때


  김혜순의 아홉 번째 ‘첫’을 외치는 시집의 표지 후기에 적힌 글이다.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이 그때마다 길어 올린 언어의 물은 흥건히 가슴을 적시지 않고 자아의 타자와 사물과 세계는 골고루 섞이고 융합하다가 서로를 밀어내고 고통스럽게 이별한다.

  안경알에 박힌 나사의 소용돌이와 새끼손가락 끝에 희미하게 남은 소용돌이는 서로 무관한 하지만 시인의 가슴에 파문을 남긴다. 김혜순의 시들은 늘 그렇게 충돌과 소용돌이 속에서 부딪히고 깨지며 상상의 세계와 감성의 세계를 현실 밖으로 끄집어낸다. 우주로 확장된 언어들의 울림은 독자의 공감을 얻기 힘들다. 자세히,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보일까 말까 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들의 초상이 하나씩 사라지는 서사의 시대에 김혜순은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또 다른 별에서> <우리들의 음화>를 그려다가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에서 <불쌍한 사랑 기계>가 되었다.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라고 외치다가 이제 <당신의 첫>으로 돌아왔다.

  지극히 역설적인 시집이 아닌가 싶다. 언제고 마지막일 수 있는 시의 변주들을 들고 뻔뻔스럽게 ‘첫’을 외치고 있다. 처음이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라기보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과 조우하는 경험이 만들어 낸 감각과 떨림 그리고 조용한 진동들은 모두가 처음일 수 있겠다.

지평선

누가 쪼개 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낮과 검은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가 닫혀버리지만 ‘우리 만남의 저녁’은 계속된다. 끝없는 자기 부정과 세상과의 불화 속에서도 시인은 치열하게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광활한 공간은 지평선으로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시인이 보는 사람과 세상은 보이지 않는 간격을 메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언어로 표상되는 낯선 세계에서 그녀의 시는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다른 시선으로 인식의 대상들을 풀어 놓는다. 지평선은 어디에나 있고 저녁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그건 내가 모르지.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 올 때 거기에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버리고 싶어.
나는 당신의 얼굴, 그 속의 무엇을 질투하지?
무엇이 무엇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도 당신을 만든 당신 어머니의 첫 젖 같은 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


  ‘당신’이라는 존재의 처음은 어디였을까? 그것은 나의 처음을 묻는 질문과 다름이 없다. 그 ‘첫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말은 영원을 준비하는 말은 아닐까. 존재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가 아닐지라도 현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은 우리들 모두에게 늘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당신의 첫’은 나의 마지막일 필요는 없다. 다만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들에 대해 늘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인식한다. 생명과 존재에 대한 탐구와 인식 태도는 시인의 시를 태어나게 하는 근원이 된다. 시집 곳곳에 마련된 시원의 세계는 세상만물에 대한 태도이며 방법이고 목적이다.

당신의 눈물

당신이 나를 스쳐보던 그 시선
그 시선이 멈추었던 그 순간
거기 나 영원히 있고 싶어
물끄러미

꾸러미
당신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것인
물 한 꾸러미
그 속에서 헤엄치고 싶어
잠들면 내 가슴을 헤적이던
물의 나라
그곳으로 잠겨서 가고 싶어
당신 시선의 줄에 매달려 가는
조그만 어항이어 싶어


  모든 시들은 대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그것이 증오로 때로는 자기 분열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당신’으로 호명된 대상은 나를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당신을 통해 헤엄치고 가슴을 적시고 싶은 것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은 그렇게 끝없이 확장될 것이고 새끼손가락의 소용돌이처럼 가슴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일상을 조금만 벗어나면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보인다. ‘지금-여기’가 아니라 ‘거기-당신’에 대해 작은 애정과 관심, 치열한 고민과 주관적 인식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는 시인의 내면 풍경은 그렇게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진다. 비록 그것이 오독일지라도 내가 누구인지 묻고 싶을 때 ‘그때 나’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늘 유용하다.


08052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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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보다 소중한 우리미술가 33 - 오늘의 한국미술대가와 중진작가 33인을 찾아서
임두빈 지음 / 가람기획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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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 피카소, 렘브란트, 샤갈, 마티스, 잭슨폴록, 베르메르, 마그리트, 에셔 등 생각 없이 떠오르는 수많은 서양의 화가들이 있지만 우리의 화가는 김홍도, 신윤복, 장승업, 이중섭, 김환기 등 대표적인 몇 명의 작가를 빼 놓고는 이름을 떠 올리기 힘들다. 우리는 ‘미술’하면 자연스럽게 ‘서양미술사’를 떠 올렸고 대부분의 책들은 서양의 화가들을 다루고 있으며 나 또한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관심을 가졌고 그들이 소개하는 세계를 먼저 알게 되었다. 핑계 아닌 핑계를 대자면 모든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준거 집단은 항상 유럽이다.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인류의 학문과 예술을 이끌어 왔으나 왜 우리 것에는 항상 소홀한 것일까?

  보잘것 없거나 부끄럽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깊은 이해와 연구가 부족하고 대중적으로 소개하려는 노력도 게을리 했을 것이다. 대중들도 현역 작가들에 대한 관심과 전시회를 찾기보다는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대규모 유럽 화가들의 전시회를 즐겨 찾게 된다. 한국화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우리 미술사를 이끌어 온 거장들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고 중요하다. 또한 현재 동시대를 고민하는 작가들에 대한 애정은 우리나라 미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잔디 위에 네 개의 돌이 있고 그 사이에 물이 담긴 바가지에 놓여 있는, 정갈한 황규백의 그림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고흐보다 소중한 우리 미술가 33>은 오늘의 한국 미술 대가와 중진 작가 33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차례를 보며 화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바라보다가 그래도 아는 들어 보았거나 아는 이름 몇이 등장해서 반가웠다. 자세히 알지는 모르지만 여기저기 귀동냥 눈동냥 한 작가들이겠지만 우리 미술가들에 대해서는 참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두빈은 그림을 잘 그리면서 글도 잘 쓰는 사람이다. 다양한 수상 경력과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으며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경력까지 보태고 있다. 이미 <한국미술사 101가지 장면>으로 독자들을 만났다고 하나 나는 처음 대하는 작가이다. 어쨌든 그 역사를 전공하다가 미술사를 연구한 사람과 달리 그림을 전공한 사람답게 작품을 대하는 안목과 애정이 남다르다. 그러나 그의 글은 장식적인 데가 많고 담백하고 진솔한 맛이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항상 느끼지만 글은 마음의 갈피까지도 세세하게 드러내고 낱낱의 표정과 숨결까지도 드러낸다. 그래서 두렵고 조심스럽다. 더구나 공적인 글쓰기라면 더욱 그러하다. 임두빈은 미술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차고 넘친다. 그것을 바라보는 안목이 탁월하고 작품과의 교감이 뛰어나며 개별 작가들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세련되면서도 문안한 글들이 보기 좋은 그림들과 함께 독자들을 우리 미술이 주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고 있다.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그림과 조각을 보면서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개별 작가들을 작업실을 방문하는 길부터 독자들에게 안내한다. 마치 기행문처럼 시작한다. 작업실의 위치와 분위기를 전해주고 사진으로 보여준다. 그곳에 탄생한 작품들을 소개하고 작가의 작품 세계를 안내하기도 하며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은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책이다. 가장 대중적인 화가가 되어버린 ‘고흐’와 비교해서 책 제목을 정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미술가들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나의 모래알에 온 우주가 담겨있다는 윌리엄 브레이크의 시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 명 한 명의 진정한 예술가가 탄생시킨 작품들은 그대로 영혼과 영혼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된다. 그것이 그림이든 조각이든 상관없이 깊은 내면의 울림과 공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임두빈은 이런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수많은 작가들을 직접 방문하고 인터뷰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움은 지울 수가 없다. 먼저 학력과 수상 경력 위주의 작가 소개를 눈에 걸린다. 서울대 미대 출신 몇 명을 제외하면 홍익대 미대 동문회 소개 자료 같은 느낌이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극소수를 제외하면 모두 저자의 스승, 선후배들이다. 학벌로 연결된 미술계의 풍토를 문제 삼는다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 수 있으나 작가 선정 자체에 일정한 기준이 제시되어 있지 않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기는 힘들 수도 있다. 대가와 중진이라는 전제를 이해하더라도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작업으로 예술 세계를 펼치고 있는 작가들이 골고루 소개되었다면 더욱 빛났을 것이다.

  또 하나의 아쉬움은 현 미술계나 사이비로 명명된 작가들에 대한 감정적 성토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실체가 무엇인지 독자들은 알 길이 없다. 학생보다 못한 교수 직함을 가진 사이비 예술가들이 많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저자의 진심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명확한 기준과 나름의 분류 방법이라도 제시했다면 더욱 많은 공감을 얻었을 것이다. 지나친 엘리트 의식이나 일방적인 찬사와 경외감은 아무리 좋은 그림이라도 거부감을 갖게 마련이다. 아직 활동 중인 작가들이기 때문에 남은 시간에 대한 기대와 바람을 함께 표현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지울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예술에 대한 관점이다. 철학적 문제이긴 하나 동시대의 미술가들이기 때문에 더욱 궁금해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도대체 예술이란 무엇이며 인간에게 어떤 것인가? 교외의 넓직한 작업실과 몇 백 평 혹은 몇 천 평씩이나 되는 농원이나 전시 공간을 가진 미술가 들은 당연한 대가라고 볼 수도 있으나 그들의 예술 세계는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과 비교된다. 우리와 좀 더 밀착된 혹은 동시대인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미술가가 한 사람이라도 33인 속에 뽑혔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대중 속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친숙한 예술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도 미술가들의 임무가 아닐까 싶다. 우리 미술가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보답하는 일은 물론 우리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이만한 공력과 노력이 돋보이는 책 한 권이 탄생까지 저자의 부단한 노력과 세심한 노력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서양 미술이 아니라 우리 미술가들에 대해 궁금한 사람에게는 부끄럼 없이 권할 만한 책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자, 이제 그들을 만나러 가보자.


080517-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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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과 자본주의
김영민 지음 / 늘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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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분이 지나고 나면 해가 길다. 특히 하지 부근의 저녁 어스름은 글자 그대로의 ‘산책’을 하기에 맞춤한 시간이다. 길 건너 편 중앙공원에 들어서면 산길을 절개해서 도로를 만들고 도심의 숲을 고립시킨 작위적 공원을 만날 수 있다. 공원을 중심에 두고 사방은 빽빽한 아파트 숲이다. 나무의 숲과 고층 빌딩의 숲은 서로를 원망하며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우리들의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준다. 도시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도심의 공원들은 인공의 섬이 되거나 본래의 모습을 잃고 길 잃은 아이처럼 콘크리트 숲 속을 서성인다. 그 산길 구석구석을 개미처럼 걷는 사람들, 작은 호수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 광장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인라인을 타는 꼬맹이들과 마주하는 일상은 흔히 볼 수 있는 도심의 생활이다.

  현대 사회에서 ‘산책’이라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계층은 그리 많지 않다. 일선에서 은퇴한 노인 계층이 아니라면 하루하루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어디서 걸을 것인가? 어디를 향해 누구와 걸을 것인가? 목적 없이 홀로 걷는 여유로움은 자본주의 사회를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사치이다. 붕어빵처럼 비슷한 가족의 모습으로 주말에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속에 서성이다 보면 자본주의 사회의 행복은 공식화 되어 있고 여가를 즐기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습득하게 된다. 독서 후에 목적도 방향도 없이 사색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산책과 적당한 대화가 가능한 노을 지는 저녁 어스름은 과연 사치인가?

  철학자 김영민은 산책을 ‘전일화한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배경으로 해서만 성립하는 어떤 태도와 실천’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산책’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동무와 연인>을 읽고 탄력 받아 주문한 책이 바로 <산책과 자본주의>이다. 이 책은 문화비평서이다. ‘문화비평은 역사학과 사회학이 겹치는 그 첨단의 지점에서부터 오히려 삶의 조직 속으로 가장 깊이 들어가려는 감수성’이라고 정의하는 저자의 말에 귀 기울여 본다.

  <사랑, 그 환상의 물매>(2004)라는 근사한 제목의 책도 구미가 당긴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영민의 문장들을 신문의 칼럼이나 짧은 글들로 만나왔다. 긴호흡으로 읽어가는 맛은 확실히 다르다. 내게는 사유의 물꼬를 트여줬고 한 문장을 반복해서 읽는 즐거움을 전해주었다.

  짧은 글들이 모여 하나의 주제를 드러내는 구성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짧은 글들이 모여 제각각 다른 소리를 내지만 독자는 하나의 큰 흐름을 짚어 내거나 저자의 말하기 방식을 통해 소통하게 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청계천이나 명절, 핸드폰, 비만, 전두환, 5.18, 인문학, 표절, 사랑, 혼인 등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사를 통한 문화 비평이면서 철학적 사유를 시도한다. 숱한 사상가들을 인용하고 그들의 핵심 개념들을 통해 대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은 낯설지만 통쾌하다.

  대단히 직관적인 사물과 상황에 대한 인식 태도를 보여 주기 때문에 은유적이고 감성적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직설적이고 차분한 논리로 그것들을 해체하고 분류하며 기저의 흐름을 꿰뚫어 분석을 시도한다. 대체로 통쾌하고 유쾌한 느낌의 문장들은 군더더기가 없고 지나치게 매끈하며 지나치게 관념에 기대고 있기도 하지만 논리적이다.

  가벼운 문화 비평서로 읽히지만 뒷맛은 진한 에스프레소를 닮았다. 비평의 조건에 해당되는 여건도 안되는 건 아닌가? 우리의 삶이 말이다. 산책조차 불가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불성설일지도 모르는 말들을 쏟아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철학적 인간과 일상적 인간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사유의 힘과 능력이 현실에서 발현되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분노는 긍정적인가?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과 선택의 방식들에 고뇌하는 영혼의 그림자를 밟으며 오늘도 산책하고 싶은 욕망만은 통제 불가능이다.

  하버마스의 말대로 ‘의사소토의 구조가 뒤틀린 탓에 생화세계가 식민화되었다’.  혁명이 배신당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애는 온몸으로 거부하기 힘들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 시대인 것이다. 자기 부정을 통해 긍정에 도달하지 못하는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다. 때때로 가슴 속의 쌓인 넋두리와 울분을 토해내는 일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컴퓨터 모니터 화면 뒤의 악마의 얼굴이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

  근원적인 존재론적 질문에 당면한 인간은 불안하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라면 일단 정지, 전원을 내린다. 자본주의를 산책하는 김영민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와 함께 한 번 쯤은 산책을 권하고 싶다. 그의 방식은 때때로 무념무상한 일상의 틀에 대해 작은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책장을 덮기 전에 고백하는 저자의 한마디는 ‘아, 찔레꽃’이다. 아, 봄날은 간다! 이렇게.

나는, 그렇게, 몇몇 인간들을 그리워하였고, 훈련을 통해 마침내 그리움을 끊었으며, 그 여력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찔레꽃으로 사랑하였다. - P. 255


08051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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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도 2008-05-16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처를 아는 자에게는 어떤 역사도 미학이 될 수 없다. (상처를 미학으로 처리하려는 모든 태도는, 그 근본에서 파시즘!)역사를 미학으로 꾸미는 짓은 몰락하는 특권층의 비극적 감상주의일 뿐이니, 차라리 그것은 정치학이거나 생물학!

모욕과 상처의 기억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여전한 폭력이다. 왜냐면 상처의 기억은 곧 기억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요컨데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자의적 분란의 늪을 만들지 말고, 그냥 살과 말을 더 공대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전략이다.

연인들은 '마음'을 챙기느라 '언어'를 늘 혹사한다. 그래서/그러므로 그 언어의 반란에 직면할 수밖에 없고, 결국 벼랑 끝에 떠밀리고 나서야 비로소 꿍쳐 놓았던 '마음'을 호출하지만 알고 보니 호출부호가 없었다!?(얘들아, 도대체 얼마나 얘기해야 하겠니? '마음'을 저리 밀쳐 두고 '피부'와 '언어'로써 연애하라지 않든!? 그 연하고 순한 것이 불쌍하지도 않든!?)

-사랑, 그 환상의 물매 중

=====================

잘모르는 철학용어들이나 한자어들이 많이 쓰였네요.
사실 어려운 글은 별로 안좋아하는데
문장 하나 하나의 밀도가 높고 사유가 빛나고 있어서
님의 말처럼 반복해서 음미하게 됩니다.

귀엽기도 해요.^^

sceptic 2008-05-21 20:56   좋아요 0 | URL
그냥 살과 말을 더 공대하는 것이 현명하다...그렇죠? 피부와 언어로 연애해야죠...공허한 마음에 기대지 말고...^^
 

‘국가는 가족을 통해 여성을 지배’(K. 밀레트)하고, ‘사회는 억압과 지배의 임무를 소그룹에 떠맡긴다’(H. 르페브르)는 지적은 이제 새삼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 P. 66

‘의사소통의 구조가 뒤틀린 탓에 생활세계가 식민화되었다’(하버마스)는 식의 지적은 우선 각종 매체의 주변에서 쉽게 확인된다. - P. 109

문화의 이상은 전달(관념)과 표현(몸)이 일치되는 어느 소실점에 놓일 것이다. 마르크스적 기획 속의 이것은 계몽주의적 이상과 표현적 낭만주의가 결합하는 문화를 향한 노력이다. - P. 114

생각을 조금 멀리 이끌어 나가면, 기억에 터 잡지 못한 화해를 강하게 불신했던 까뮈, “적을 기억하면 힘이 더 난다”는 몽양, 그리고 “적들이여 나를 계속 미워하라 나도 나의 적들을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랬던 루신을 생산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 - P. 120

까뮈의 말처럼 오직 역사에 대한 올바른 기억과 대접만이 화해를 불러올 수 있으며, 아렌트의 말처럼 시대의 어두움은 기억의 빛이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 P. 126

나는, 그렇게, 몇몇 인간들을 그리워하였고, 훈련을 통해 마침내 그리움을 끊었으며, 그 여력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찔레꽃으로 사랑하였다. - P.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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