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딸의 7일간
이가라시 다카히사 지음, 이영미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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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와 명왕성만큼 닿을 수 없는 관계가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아닐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 어머니와 딸의 관계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아버지와 딸의 관계이다. 물론 성격과 상황에 따라 관계는 변화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그것은 나이라고 하는 불가항력적인 요인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어린시절 아장거리며 품에 안기던 기억, 선머슴 같던 유년시절을 거쳐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아버지와 딸은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세대가 달라지고 시간이 흘러도 그만큼의 시차가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 딸이 어머니가 되고 나이가 들면서 그 때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 둘의 관계는 또 다른 양상으로 변화하며 또 다른 관점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이와 세대 차이 그리고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가 만들어내는 복잡한 관계는 가장 친밀하고 애틋한 관계가 되기도 하지만 애증의 거리를 회복할 수 없도록 만들기도 한다.

  <아빠와 딸의 7일간>은 환상적 리얼리즘이다.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당황스럽고 놀랄만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어 환상적이다. 하지만 가장 보편적이고 공감할 만한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돌아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적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있어 서로를 이해하는 상황극이나 역할극의 성격을 보여준다. 흔히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쓰지만 실제로 그렇게 해 볼 수는 없다. 다만 공감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자신의 경험과 느낌으로 유추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것을 실제 상황으로 치환시켜 놓고 있다. 아버지가 딸이 되고 딸이 아버지가 되는 상황.

  고등학교 2학년 여고생과 마흔 일곱 살 중년의 아버지는 대화도 없고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부녀지간이다. 아버지는 딸에게 말도 건네고 친해보려고 무던히 노력하지만 세대 차이와 생각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신세대 딸과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지는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지진으로 인한 전차 사고로 인해 두 사람은 심한 충격을 받고 깨어나지만 몸이 뒤바뀌는 황당한 일을 겪게 된다.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 부분은 소설만이 가능한 상상력의 힘이다. 다른 소설이나 영화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어 신선도가 떨어지긴 하지만 아버지와 딸의 몸이 바뀐다는 상상은 끔찍하지만 재미있다.

  일본에서는 이미 드라마로 방영된다는 데 책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상황 설정이 재미있어 호기심에 읽게 되었지만 나름대로 관계에 대한 의문과 이해를 바탕에 두고 있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읽게 되었다. 문장은 가볍고 쉽게 읽힌다. 요즘 팔리는 대부분의 일본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담  이 넘어가는 책장과 코믹 터치의 문장은 흡인력있게 독자들에게 다가갈 만하다. 재미와 감동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최고는 아니지만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다.

  타인은 이해 불가능한 텍스트에 불과하다.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소모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려는 무모한 도전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며 외로움과 절망 속을 헤매기도 한다. 내가 아닌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은 어쩌면 산을 옮기는 것보다 힘들다. 주변을 보라. 사소한 언쟁에서 중요한 판단에 이르기까지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인정은 정말 어렵다. 나이가 들수록 심해지는 이 현상을 나는 보수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이 책에서 보수적인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딸이다. 어리기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으나 아버지에 대한 이해도 노력도 부족하다. 오히려 아버지가 딸에 대한 배려와 노력이 드러난다. 물론 사고 이후에는 서로의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보기 때문에 완전히 뒤바뀐 상황과 시선이 나타난다. 자신의 장점이 상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나의 생각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것인지 깨닫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기본적인 서사구조와 구성 자체는 지극히 단순하다. 7일 만에 사고로 다시 제자리를 찾으면서 소설은 막을 내린다. 그간 부녀가 겪었던 지극히 비일상적이고 황당한 순간들은 에피소드로 남겨진다. 제 자리로 돌아온 두 사람은 또 예전처럼 다정한 대화도 없고 멀고 먼 존재로 돌아간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폭과 깊이는 분명 이전과 달라진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지난 7일간의 경험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통과제의를 겪고 어른으로 성숙하는 성장소설처럼 몸이 뒤바뀐 7일간은 두 부녀에게 지독한 통과의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적당해 보인다. 다소 황당하지만 흥미 있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코믹하고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내용 또한 그러하고 여고생의 연애와 중년 남성의 일을 꼼꼼히 담고 있어 폭넓은 계층의 관심을 끌 만하다.

  가볍고 재미있는 소재로 한번쯤 서로의 관계를 살펴보고 고민해 볼 수 있다면 소설이 할 수 있는 역할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사춘기 딸을 둔 아버지들에게, 중년의 아버지를 둔 딸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멀지 않은 나의 미래는 아닌가 싶어지기도 해서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위안을 삼는다. 아니 어쩌면 소설이 현실보다 사실적일 수 있다는 불안감을 위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080627-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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