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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환상의 물매
김영민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무릇 연인은 늘,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 한다”는 결여에 시달리는 법이다. 그 시달리는 방식은 은밀하고 집요하다. 수동과 능동의 정서가 변덕스럽게 교차하면서 양철판을 긁듯이 간지럽힌다. - P. 21
결핍과 잉여는 연애의 영원한 딜레마이다. 항상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동반한 열병처럼 찾아오는 연애의 시작은 찬란하기보다 깊은 고통이다. 견딜 수 없을만큼 지독한 불면과 울렁증으로 연인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스스로 만들어 낸 열정 속에 함몰하게 된다. 대개의 경우 그 지속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이후 벌어지는 상황과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관계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되지만 식어버린 감정은 참담하기까지 하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철학자 김영민은 ‘환상의 물매’라는 말로 ‘사랑’에 대한 정의와 분석을 시작한다. 은밀하고 집요한 방식으로 인간의 영혼을 잠식하는 그 모호한 감정에 대해 정의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김영민은 특유의 사색적이고 분석적인 방식으로 하나하나 사랑의 모호한 안개를 걷어낸다.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표현과 문장들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언어의 사유의 힘이며 개념은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김영민의 문장들은 대상의 분석에 천착하고 있다. 언어와 개념들 간의 관계는 일시적이고 우연적일 수 없다. 사랑이라는 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아포리즘들은 짧은 문장들의 긴밀한 긴장감을 통해 더욱 견고하고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글들이 이어진다. 때로는 한 문장으로 명징한 상상의 세계로 이끌고 때로는 탄탄한 구조의 문장들이 하나의 관계망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사유하고 공감하며 돌아본다. 김영민의 글들을 계속 읽게 되는 이 묘한 매력에 대해 뭔가 분명하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젊은 시절 2000여편의 시와 6편의 소설을 불태웠던 지난한 과정으로 길어낸 사색과 문장의 힘일까?
모욕과 상처의 기억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여전한 폭력이다. 왜냐하면 상처의 기억은 곧 기억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 P. 46
예를 들어 이와 같은 문장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언어를 뒤집어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전복시킨다. 상처의 기억이 기억의 상처가 된다는 동어반복적이고 역설적인 표현은 순간 멈칫거리게 한다. 내 기억의 상처는 무엇일까? 그것은 상처의 기억일까?
사랑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주제를 다양한 콘서트처럼 아포리즘 형식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김영민의 힘은 놀랍기만 하다. 단순하고 가벼운 놀이로서의 감정이 아니고, 일상에서 마주하는 욕망과 생활의 대체물로서 사랑도 아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관계 속에서 풀어내고 있는 이 놀라운 감정을 김영민은 차분하게 사유하고 있다.
필연이고 숙명이라 굳게 믿고 싶었던 환상에서 벗어나는 순간 비로소 사랑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열정과 자기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사랑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보다 객관적인 거리와 시선으로 사물과 상황을 바라본다. 우리는 그것을 상처의 기억이라 부른다.
철저하게 남녀 간의 연애 감정을 전제로 한 이 죽일놈의 사랑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사랑의 실체가 아니라 타인의 관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변주되는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은 지나가버린 시간들에 대한 경의로움보다는 아쉬움과 기억의 상처 때문이리라.
여전히, 사랑은 환상이며 환각이고 환유이며 환멸이고 환락이며 환영이다. 누구나 한 번쯤 정의내리는 사랑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이고 사적인 세계를 넘어 사랑의 진경은 어디쯤에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만 철학작 김영민이 말하는 사랑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면 감성과 파토스의 세계가 아니라 이성과 로고스의 세계로 수평 이동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그 안에서 답을 구할 수는 없겠지만 그저 한가롭게 거닐다 어떤 순간을 조우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의 모호한 경계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계에 가장 정확하게 적용되는 말일 수도 있겠다. 김영민은 이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한다. 자신의 마음조차 모른다는 사실 속에 ‘사랑의 진실’이 맥동한다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독자들은 공감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사랑은 도대체 무어냐? 책장을 덮고서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알 수 있다면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일까?
“달은 기울어 밤이 삼경인데, 두 사람의 마음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경이든 오경이든, 두 사람의 마음을 두 사람조차 모른다는 사실 속에 사랑의 진실이 맥동脈動하는 법. 그 마음은 어느 먼 미래의 것이었고, 매번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속하였다. - P. 255
0806025-0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