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의 구조 까치글방 170
토머스 S.쿤 지음, 김명자 옮김 / 까치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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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 [paradigm]
[명사]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


네이버 백과사전의 설명이다. 그리스어에 어원을 두고 있는 이 말의 뜻이 궁금해서 책을 들었다. 간접적으로만 접했던 개념의 원전을 찾아 읽는 일은 쉽지 않다. 얼마간의 지루함과 고단함을 견뎌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의외로 감탄할만한 책을 만나기도 하지만 지루한 고역이 될 때도 있다. 간단한 백과사전식 설명으로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 책을 통해 명확하게 전달될 때 느끼는 기쁨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다. 책읽는 재미와 즐거움은 다양한 형태로 나에게 전해진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긴 설명이 필요없는 현대적 의미의 고전이다. 침작하게 정신을 집중하고 읽을 만큼 어려운 내용의 책은 아니다. 다만 과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이해가 필요한 책이라서 1969년에 ‘추가’한 부분의 내용 중 일부 해독불가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에세이’다. 그래서 일단 일반인의 입장에서도 개론서를 대하는 태도를 갖출 필요는 없다. 과학과 철학의 만남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책의 의미는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야 할 것 같다.

‘패러다임’의 개념은 그 자체로도 논쟁거리였지만, 이 책에게 쏟아진 숱한 찬사와 비판은 그만큼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초판이 1962년에 이후 과학사학자들이나 과학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인접 학문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이 책은 글자 그대로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코페르니쿠스나 라브와지에를 비롯해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과학의 혁명 전사들의 이름은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그들은 기존 과학의 연구방법과 태도, 이론들을 점진적으로 개선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전체 틀을 바꿔 놓았다. 저자는 기존의 과학 방법론을 ‘정상과학normal science’라 명명하고 이것이 점차 도전받고 오류를 감지하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폐기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과학의 혁명으로 보았다. 저자의 이러한 생각들이 ‘패러다임’이라고 하는 용어를 통해 개념화되면서 뚜렷하게 설명되고 독자들에게 인식시키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결국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패러다임의 명확한 범위와 한계가 보이질 않는다. 저자 스스로도 이것이 ‘패러다임’이다라고 규정할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간단한 이론처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과 철학이 만난 자리에는 사유의 연장만이 남는다. 명쾌한 결론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책은 ‘과학’이라는 학문 분야에만 적용될 수 있는 특수한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쉽게 밝혀진다. 사회과학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과 성찰로부터 비롯된 토마스 쿤의 사유는 결국 과학을 넘어선 자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책이 출판된지 40여년이 흐른 지금은 오늘 아침 뉴스에서도 ‘패러다임’을 들먹이는 기자의 목소리를 들을만큼 일반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다. 세계 최초로 우리나라의 부부과학자가 ‘면역체계 원리’를 규명했다고 한다. 이것은 과학의 패러다임을 전환한 것이라는 평가를 하는 기자의 말이 새삼스럽다.

문제는 이런 원리와 관점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유를 통해서만 완성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학문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와 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 과학혁명의 구조를 들여다 보는 것은 당연히 역사적인 통시적 관점에서만 의미가 있다. 과거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수많은 지혜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한 사유의 틀을 제공하고 새로운 용어를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 낸 것이 저자의 가장 큰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에 매몰된 근시안적인 시선으로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폭넓은 시야와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이야말로 저자와 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전체 13장으로 되어 있는 짧은 분량의 책이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당연히 큰 반향을 불러왔을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질서들 속에서 무언가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쿤이 과학혁명을 주도했다는 말이 아니라 거대 담론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깊이와 넓이는 다양한 학문 영역에 대한 독서와 토론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최근에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새삼스럽지도 않은 이야기들이 오고간다.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것과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좁은 시선을 1mm쯤 확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끊임없는 성찰과 모색만이 상을 바꿀 수 있다는 긴 안목을 머리로가 아니라 발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우리는 지금 내 삶의 패러다임을 뒤흔들만한 혁명을 준비하고 있는지?


0610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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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기억,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 - 어린 시절의 체벌과 학대가 이후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보고서
앨리스 밀러 지음, 신홍민 옮김 / 양철북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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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지나가도 몸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는다. 그것이 가장 큰 슬픔이다.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마음보다 먼저 몸이 아프다. 앨리스 밀러의 새 책 <폭력의 기억>은 어린 시절의 체벌과 학대가 이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보고서이다.

20세기 프로이트 이후 인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변화했고 그 영향과 파장은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는 무의식에 대한 상식 수준의 지식으로도 충분히 상대를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까지 가지게 된다. 꿈을 해석하면 그 사람의 억눌린 자아와 억압된 욕망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이 곧 인간의 해방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다. 프로이트라는 거목 때문에 생긴 그늘이다. 정신과 의사인 앨리스 밀러는 철학과 심리학 사회학까지 공부했다. 이런 배경이 <폭력의 기억>을 읽는데 영향을 미친다. 그만큼 이 책은 폭넓은 측면에서 ‘폭력’에 대한 잔인한 기억을 되새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폭력은 단순한 물리적 폭력을 말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지속적이고 충격적인 모든 체벌은 물론 언어 폭력과 정신적 학대에 이르기까지 개인에게 가해진 모든 억압을 띤 형태를 일컬어 ‘폭력’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문제는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는 시기의 문제이다. 유년기라는 시기는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의 시기를 말한다. 사회화의 과정을 거쳐 그 사회의 역사적 문화적 기호들을 받아들이고 사회적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은 고통스럽다. 개인보다 사회의 가치가 주입되며 선악, 오호의 가치 판단을 넘어 개인의 선택과 판단은 억압된다. 어린 시절은 백지상태와 같다. 흰 종이에 악몽을 그려 넣는 어른들의 이야기는 잔혹극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시기에 벌어지는 체벌과 학대는 일방적인 폭력이다.

둘째는 부모와의 관계이다. 타인과의 관계가 형성되기 전에 부모와의 관계는 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우리가 만나는 모든 부모가 완벽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윤리와 도덕에서 종교에 이르기까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절대 가치를 주입한다.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부모에 대한 공경은 논리와 이성이 개입될 여지가 없으며 세상의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더욱 심각하다. 종적 인간관계의 전형으로 부모 자식 관계를 들 수 있다. 군사부일체라는 봉건적 인식태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이러한 가치가 빚어내는 폐해에 대해 모두가 침묵한다. 침묵의 카르텔은 세대를 뛰어넘어 전수된다.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부모가 된 상처받은 어린아이는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것이 폭력인줄도 모른 채.

저자가 말하는 문제의 핵심은 어린 시절 ‘폭력의 기억’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특히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태도는 세습된다는 데 가장 큰 문제가 있다. 모든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 돌려지기 때문에 원인을 알지도 모른 채 심각한 분열증상과 육체적 고통, 거식증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고통을 수반한다. 그 고통은 개인 차원의 문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확대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해결책을 쉽게 말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네 부모를 믿지 말라’는 말의 전도 유망함에 대해 이야기했던 박홍규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이유는 분명하다. 모든 인간관계가 상하, 종적 관계를 벗어날 때 비로소 개인의 가치는 소중하게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폭력의 기억’은 그 기억을 벗어나기 위한 과정과 방법에 대해 실증적으로 이야기한다.

이 책이 흥미롭고 의미있는 것은 1부의 ‘진실을 외면한 사람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체홉, 카프카, 니체에서부터 랭보,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에 이르기까지 ‘폭력의 기억’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기 때문이다. 2부 ‘몸의 메시지’에서는 그 폭력이 어떤 식으로 우리 몸에 영향을 미치며 반응하게 하는지 확인시켜 준다. 마지막으로 3부 ‘거식증’에서는 아니타 핑크의 일기를 통해 저자의 이론을 실제로 보여준다.

정신과 의사의 임상 실험 일지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의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탐구하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인간에 대한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나 자신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폭력’이라는 거북한 단어의 뉘앙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온, 혹은 겪어온 세월을 넘어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의 자세와 행동의 변화이다.

실천과 노력이 동반되지 않는 이론은 관속의 시체 같다. 삶이 존재하기 때문에 죽음이 의미있고 소중하듯이 살아 움직이는 못하는 이론은 현실과 유리된 박제와 같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다 지나간 일이라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 책을 보라. 그리고 우리의 부모와 부모가 된 나와 우리의 아이들을 돌아보라.


0610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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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화하는 神의 나라 - 일본 지배세력의 정신세계
노 다니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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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경기에 대한 강렬한 기억 두 가지. 먼저 1982년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 결승전을 기억한다. 흑백 TV였고 김재박의 번트에 이어 한대화의 쓰리런 홈런이 터질 때 내 심장도 터지는 줄 알았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한일전이었기 때문이었는지 결승전이었기 때문인지 단순한 야구에 대한 관심이었는지는 아직도 애매하지만 그 순간의 짜릿한 기억만큼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이 열렸던 97년 9월 일본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경기에서 이민성 센터 써클 좌측에서 그야말로 미사일같은 왼발슛을 날린다. 일본의 골대 좌측이 출렁하는 순간 내 심장도 출렁거리며 높지 않은 아파트 천정을 뚫고 올라갈 뻔했다. 그 경기가 한일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아주 단순한 수식어가 어울린다. 지리적으로 어느 나라 보다도 가깝지만 역사적으로 정서적으로 지구라는 행성에서 공존하기 어려울 것 같은 나라가 또한 일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잘 모른다. 대부분 일제 식민지 시절에 대한 감상적 반감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보다 ‘민족의 죄인’으로 손가락질하는 친일 한국인을 더 싫어하는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일본은 우리와 멀다. 그렇다면 일본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노 다니엘의 <우경화하는 신의 나라>에서 우리는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읽어낼 수 있다. ‘일본 지배세력의 정신세계’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설문조사에 의한 자료도 아니고 일본인 대다수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일본의 지배세력이라 할 만한 정치인과 대학교수 등 우익인사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발언 내용과 인터뷰 내용 우익 잡지에 실린 글에 대한 분석과 연설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과 일본인데 대한 수많은 책들 속에서 이 책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나름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완전히 주관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최대한 우익 세력에 대한 정보와 자료들을 정리하고 제시하는 것에 1차적인 목적을 두고 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을 통한 그들의 정신세계를 읽어내는 것은 독자들이 몫이다. 그러나 어렵지 않게 저자의 의도도 읽어낼 수 있다.

‘우경화’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 변화를 말한다. 흔히 보수 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의 우익인사들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활동은 ‘새역모’를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단순한 역사 왜곡 집단이 아니라 정치와 재계는 물론 학계 인사들이 총망라된 일본 우익의 총본산에 해당하는 ‘일본회의’의 중추 회원들이 구성원으로 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독도와 위안부 문제를 포함해서 일본과의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들 뒤에는 이들의 숨은 노력(?)과 일치된 힘이 조직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책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아베 신조는 예상대로 고이즈미에 이어 일본의 새로운 수상이 되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실 정치권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헌법 개정 움직임이다. 과거 역사에 대한 패배주의를 걷어내고 교육을 통해 후세들에게 일본 정신 즉 천황을 중심으로 ‘좋은 나라 깨끗한 나라 세계에 하나 뿐인 신의 나라(전전 일본 국민학교 수신교과서)’라는 의식을 부활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민족주의와 선민의식을 단순한 자국민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세계인식 때문이다. 동아시아에 대한 패권의식과 과거 영광에 대한 부활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우월감과 미국을 등에 업은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는 세계 평화의 가장 위협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쿠바와 북한 이란과 이라크가 아니라 일본과 미국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축이다.

‘지일知日이 극일克日’이라는 가장 단순한 논리가 통용되는 책이라서 추천할만하다. 감정적이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일본을 비난하거나 우리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단편적인 논리가 아니라 일본이 치밀하게 준비하는 그들의 미래가 우익 세력의 말대로 실현될지는 알 수 없으나 정치권을 중심으로 국민의 상당수와 정치인의 대다수가 우경화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일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앞서 지적한대로 그들의 주장과 지향점은 수많은 역사적 왜곡과 과장된 몸짓 그리고 허위의식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현실을 올바로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본의 우익세력이 범하고 있는 우가 반면교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태도와 대응방법은 일본의 현재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동북공정에 의한 고구려 역사 왜곡?착수한 중국도 마찬가지지만 이대로 남의 나라 일로만 여길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튀어나오는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개인의 실수와 자질 부족이 아니라 수많은 우익들의 사상을 기초로 한 돌출행동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일본 수상 고이즈미는 나까소네에 이어 개인자격이 아닌 수상의 자격으로 8월 15일에 신사를 참배했다. 일본 국민들의 표정은 미묘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A급 전범이 합사된 신사에 천황이 참배하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데 있다.

북한의 핵실험은 일본 우익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기로 작용할 것이다. 주변국과의 관계와 일본의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특히 미국이나 중국, 한국과 북한의 정치 상황과 대응전략에 따라 일본의 미래는, 아니 아시아와 세계의 미래는 심각한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는 아놀도 토인비의 말은 일본의 우경화는 물론 우리의 자화상을 비춰보는 가장 좋은 거울이 될 것이다.


06101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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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 프런티어21 3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서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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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에게 있어 ‘혁명’은 어떤 의미였을까?

철지난 유행가를 부르듯 어쩌자고 슬라보이 지젝은 레닌을 들고 나왔나. 궁금하고 의아스럽다. 전위적(?) 철학자 슬라보이 지젝이 분석하는 레닌이 궁금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레닌도 궁금했고 지젝의 분석도 구미가 당겼다. 이 책은 재밌고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지만 지젝다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지젝답다는 말은 대중 문화 특히 영화에 관한 깊은 이해와 분석으로 독자의 이해를 도와가며 스스로의 논리에 동조를 구한다.

충분히 매력적인 글이고 다면적인 측면의 시각과 분석이 드러나는 책이다.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문제가 되지만 지젝은 유럽의 변방 철학자로 분류된다.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에 빚지고 있는 지젝의 글들은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철학적 개념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하다면 그의 논리와 체계를 따라가기 힘들다. 라캉의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에 대한 이해 없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역사적 사건들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그러나 지젝의 매력은 풍부한 상상력과 다양하고 폭넓은 문화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이 책에서도 많은 영화를 인용해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적절하고 그럴듯한 분석과 인용은 내용과 개념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현실 상회에서 벌어졌던 역사에 대한 분석이 이 책의 전제이기 때문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철학자가 바라보는 역사 깊이 읽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역사적 사건과 상황을 분석하는 일과 이 책은 무관해 보인다.

그렇다고해서 레닌이라고 하는 한 개인을 바라보는 철학적 관점이 역사, 사회적 상황과 무관할 수는 없다. 독일에서 벌어졌던 홀로코스트를 비롯해서 911 테러에 이르기까지 현실 상황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바라보는 지젝 특유의 관점이 나타난 이 책은 ‘레닌에 관한 13가지 연구’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레닌을 통한 현실 읽기로 보아도 무방하다.

당연하게도 지젝의 관심은 과거 역사 속의 레닌에게 있지 않다. 이 책의 제목 <혁명이 다가온다>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90여 년 전의 붉은 혁명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레닌이 성공시켰던 1917년의 10월 혁명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조명 작업을 지젝이 할 리가 없다. 혁명의 핵인 레닌에 관한 다양한 분석과 해석을 통해 오늘을 바라보는 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과연 혁명은 다가오는가? 지젝은 분명하게 결론을 말하는 대신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반문하는 형식을 취한다. 하나의 개념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통해 독자들의 상상력과 이성의 힘을 이끌어 내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좌파인 지젝의 말에 귀기울이는 많은 사람들과 변죽을 울리는 철학과 문학의 짬뽕을 떠올리는 독자 사이에 간극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독자의 몫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존재에 대한 욕망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무척 ''폭력적''이라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열정이란 정의상 대상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심지어는 수신인이 기꺼이 승인할지라도, 그 혹은 그녀는 항상 두려움을 갖거나 놀라면서 이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 P. 111

완전한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에 대해 전적으로 무차별적이다. - P. 116

사랑이란 종교적 믿음과 같다. 나는 당신의 긍정적인 특징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의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당신의 긍정적인 특징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P. 122

‘레닌은 이웃을 사랑했는가’에서 지젝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근본적으로 ‘사랑’이라는는 것도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것같다.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보여주었던 대상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논리적 접근은 일반적 견해에서 벗어나 신선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어떤면으로든 그의 글들은 독특한 매력이 있다.

철학에 관한 깊이 있는 논의가 아카데미즘에 갇힌 박제된 논리라면 지젝의 글들은 다시 야생으로 돌아온 사자와 같다. 좌파의 길에 언급하는 그의 확언들은 그것이 비록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에 불과하더라도 새롭게 여겨진다. 그가 말하는 ‘좌파의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이 책 <혁명이 다가온다>의 궁극적인 목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파의 제3의 길이라는 꿈은 악과의 협정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오케이, 혁명 없이, 우리는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성공한 방식인 것을 받아들이지만 최소한 우는 복지사회의 성과를 구해내고 거기에 더해 성적, 종교적, 인종적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관용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 P. 207


06101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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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10-22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파의 제3의 길은 지젝이 빈정거리며 비판하는 노선입니다. '혁명 없이' 자본주의(악)와 타협하겠다는 태도를 그는 탈정치시대의 문화적 다원주의라고 규정하면서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습니다. 그러한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일지도 모른다고 하신 건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sceptic 2006-10-23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을 단순한 근본주의자로 보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좌파의 제 3의 길에 대한 비판을 이 책에서 다시 언급한 부분을 눈여겨 보면 지젝을 '혁명가'로 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 일기 쓰기부터 소설 쓰기까지 단어에서 문체까지
안정효 지음 / 모멘토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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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인식의 한계를 드러낸다. 말은 곧 사람됨을 규정하고, 글은 곧 그 사람 자체를 나타낸다. 말과 글은 다르다. 발화 의도와 글을 쓰는 목적이 같더라도 전달 방식과 매체가 다르기 때문에 전달 효과도 다르고 결과도 다르다. 물론, 글은 말보다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글보다 말을 좋아한다. 그래도 쓰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점점 줄어든다. 그래서 글은 말보다 점점 진해진다.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글쓰기에 답이 있다는 말이 된다. 일차적인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글쓰기는 가르쳐야 하겠지만 문학적인 글쓰기는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를 배우려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꾸준히 써라. 한 마디 말로 끝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글쓰기에 대해 오랫동안 소설을 써온 작가의 말에 귀 기울여 본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는 정말 만보다. 만보는 한가롭게 거닐다는 뜻이다. 글쓰기를 배우기 위해서는 속보가 불가능하다. 오랜 시간이 투자되어야 하며 꾸준한 훈련이 뒷받침 되어야 하고 지속적인 노력과 열정이 보태져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에 대한 가르침이 이미 제목에 숨어 있다. 단권의 책으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로또 복권보다 어려운 확률에 도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만한 문학적 재능과 역량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종류의 책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문학에 대한 작은 관심과 소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소일거리 삼아 읽어볼 책이다.

한 작가의 창작론은 사실 지루하기 짝이 없다. 한 사람의 연애 이야기처럼 자신에겐 목숨처럼 소중했지만 남들에겐 따분하고 재미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특별하다고 해서 모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시중에는 글쓰기에 대한 책이 넘쳐나는 이유는 배움의 열망이 그만큼 뜨겁다고 볼 수 있다.

520여 페이지로 구성된 이 책은 일단 분량 초과다.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나중에 보태진 넷째, 다섯째 마당은 사족이다. 알면서 보탠 이유는 무언가? 유명 작가된 이후의 몸가짐과 태도까지 충고하고 있는 부분은 애써 눈감으려 해도 지루한 잔소리에 불과하다. 실질적인 글쓰기에 관한 셋째 마당까지는 소설가로서 150여권의 책을 번역한 번역가로서, 그간의 노하우를 나름의 방식대로 자연스럽고 알아듣기 쉬운 말로 풀어낸다. 학생을 지도하듯 편안하고 직설적인 어법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돌려 말하거나 어려운 어휘, 전문 용어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정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된다. 초보자들이 겪게 되는 실수와 놓치기 쉬운 부분들을 짚어 주고 반드시 지켜야할 수칙들을 꼼꼼이 일러준다. 자상하고 친절한 안내자의 역할을 하고 있어 소설을 써보고 싶은데 딱딱하고 이론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은 책들을 보며 한숨지었던 독자들에게 제격이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와 가장 닮은 책이다. 제목이 ‘글쓰기 만보’지만 사실은 ‘소설쓰기 만보’이다. 문학적인 글쓰기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산문에 국한된 특히 소설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실전 비법에 해당된다. 정규 코스를 거쳐 형식과 틀을 갖추어 나가는 방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세와 방법이야 어찌됐든 경기에 이기는 훈련만을 요구하는 거리의 허슬러처럼 여겨진다. 재밌고 유쾌한, 감동적이며 치밀한 소설 쓰기는 문학에 대한 이론과 문법보다도 실전에 관한 수많은 조언과 지침들이 피부에 와 닿는다. 그래서 이 책은 야전교범이라기보다 선임병들의 직접적인 조언처럼 훨씬 실감나게 다가온다.

대부분 외국 작가들의 낯선 소설들을 예문으로 들어 실제 적용 문제에 있어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고 지나치게 긴 예문과 동어 반복에 해당되는 설명들이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흠으로 볼 수 있다. ‘만보’라는 제목으로 그 모든 단점들이 다 가려질 수는 없다. 스스로 독자들에게 말했듯이 좀 더 탄탄하고 치밀한 내용의 구성이 아쉽다. 소설이든 아니든 독자들은 그렇게 한가하거나 여유있게 즐길만한 여유가 없을 수도 있다.

데릭 젠슨의 <네 멋대로 써라>나 나탈리 골드버그의 <뼈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보다 후한 점수를 주기는 힘든 책이다. 이태준의 <문장강화>와 같은 이론적 체계적 글쓰기 책이 아니라면 좀 더 간결하고 인상적인 몇 가지 패턴이나 기법들을 전수해줬으면 하는 것은 개인적인 바람일까?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소설가를 꿈꾸는 것은 아니다. 작가들의 힘겨움과 노력, 열정과 한숨을 배우는 것도 이 책을 얻게 되는 덤이다. 한 권의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뿐만 아니라 작가의 땀과 눈물까지도 읽어 낼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한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접근한다면 읽을 만한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0609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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