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학의 탄생 - 철학, 종교와 충돌하다
미셀 옹프레 지음, 강주헌 옮김 / 모티브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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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 여부를 아직까지도 논쟁의 중심에 두고 있는 바보 같은 사람이 있다면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끝난 이야기로 믿었으나 아직까지도 열심히 외치고 있는 사람이 있다. 프랑스의 철학교사 미셀 옹프레는 <무신학의 탄생>이라는 책을 통해 ‘신학’에 대한 전방위적이고 저돌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신들이 그의 표적이 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주된 목표물이다. 여기서 기독교는 프로테스탄트인 개신교를 포함하고 있으나 주로 카톨릭이 논의의 중심이다. 역자는 이것을 넓은 의미에서 기독교로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지구상의 가장 많은 신자를 확보하고 있다는 공통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 종교의 대상이 모두 신이 아니라 인간의 형상을 닮았다는 데 있다. 그게 왜 중요하냐고? 이 책에서 주장하는 미셀 옹프레의 주장은 신의 허구성과 종교의 불합리성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그 비판들은 학술 논문과는 다른 방식이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예수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와 역사성을 검토해 왔던 모든 논의들을 아우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철학과 과학의 입장에서 바라본 종교와 신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철학과 역사 그리고 고고학과 해석학,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신화를 바탕으로 종교가 신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 만들어 왔는지 밝히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호기심 차원의 논의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종교가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신의 존재에서부터 그들이 손에 들고 다니는 경전에 이르기까지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성과 과학, 논리와 철학의 눈으로 신과 종교의 문제를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최근 ‘행복’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관적이고 모호한 개념의 ‘행복’은 에피큐러스 학파의 ‘쾌락’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행복과 쾌락의 지속성 여부가 물론 중요하다. 또한 물질적 쾌락인지 정신적 쾌락인지 육체적 쾌락인지 그 대상과 범위,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만큼 다양하다. 이런 시대에 신과 종교는 오히려 현실적인 행복과 즐거움들을 억압한 대표적인 수단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무신론이다.

무신론은 역사 속에서 큰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고 체계적으로 연구된 적도 없으며 드러내 놓고 논의의 중심에 세워 진 적도 없다. 인류가 이룩해 온 수많은 진화 과정 속에서도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중 하나가 종교와 신의 존재이다. 미셀 옹프레는 ‘무신론’이라 명명한 이야기들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개의 축을 통해 그 진위를 드러내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신의 존재를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는 제쳐두고 작가의 논의를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 생활의 중심에서 그리고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발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나 패러다임의 대 전환을 이루기 위해 한 권이 책을 읽으라는 말이 아니라 또 하나의 고정관념이나 맹목적인 믿음과 신념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이야기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물론자이며 무신론자이고 급진주의자이며 냉소주의자’인 나같은 사람에겐 더위를 잊을 수 있는 아주 유쾌하고 즐거운 책이었다. 종교를 가진 사람에겐 큰 거부감이나 육두문자를 입에 달고 읽다가 팽개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종교의 유무에 따라서가 아니라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일 수 있으니 그저 무심히 읽어보는 정도가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동아일보사에서 출판된 <예수는 신화다>는 책을 독실한 크리스찬들에게 적극 권장하던 때가 있었다. 물론 그 책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읽은 사람들은 책을 쓴 사람이 아니라 나를 욕했다. 그따위 책을 권해 줬냐고. 감리교와 가톨릭의 수장들이 ‘믿음’을 통해서냐 ‘선행’을 통해서냐 하는 논쟁을 끝내고 신의 구원에 대한 합의에 대한 선언문을 우리나라에서 발표할 예정이라 시점에서 <무신학의 탄생>이라는 책이 갖는 의미는 신선하게 느껴진다.

신과 종교도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 논의할 수는 없을까? 과연 인간에게 절대자가 필요한 것인지 궁금하다. 가까운 사람과 종교와 정치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충고는 이 책에도 적용될지 모르겠다.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는 추천하기가 머뭇거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킬킬거리며 속시원하게 읽은 책이다.


060724-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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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철학 살림지식총서 73
이정은 지음 / 살림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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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의 <섬>이라는 시 전문이다. 단 두 줄로 표현된 인간관계에 대한 가장 뛰어난 통찰로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 속에는 부모와 형제는 물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성도 포함된다.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순간 영원히 분리될 원초적 ‘외로움’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는 법이다. 어떤 타인과도 영원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한다는 ‘사랑’에 관한 논의는 좀 더 쉬워 보인다.

모든 인간이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정은은 <사랑의 철학>에서 그 이유를 결핍과 불완전성에서 찾는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결핍과 불완전성을 숙명처럼 안고 태어난 인간에게 ‘사랑’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그들의 반쪽을 찾아 나선다. 그것이 운명이다.

사랑의 원동력은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결핍에 대한 자각이다. 왜냐하면 결핍을 자각할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결핍을 보완해 줄 대상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나의 결핍을 상쇄할 만한 풍족함과 장점을 지닌 대상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정이 에로스이므로, 에로스에는 기본적으로 나와 타인 간의 ''차이''가 전제된다. - P. 63

물론 정신적 결핍과 불완전성은 육체적 욕망과 결합되어 아름다운 이성에 대한 환상으로 발전한다. 그것은 ‘미’에 대한 본능적인 몰입으로 볼 수 있다. 내게 부족한 아름다움을 이성에게 찾는 노력은 가장 손쉬운 충족을 의미한다. ‘사랑’의 종류와 의미를 묻기 이전에 인간이 추구하는 ‘사랑’ 자체에 대한 이해와 분석을 시도하는 노력은 재미있다. 철학적 의미의 ‘사랑’이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철학>은 ‘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어 흥미롭다.

사랑에서 ‘차이와 동등성’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많은 사회적 현상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된다. 가정 폭력과 성폭력이 등장하는 가장 큰 원인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시작된다. ‘동등성’을 무시하는 사랑은 곧바로 폭력이 된다. 무조건적인 ‘희생적 사랑’도 마찬가지 범주에서 파악될 수 있다. 서로를 인정하고 차이를 확인하며 동등한 입장에서 나누는 사랑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사랑에는 이렇게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원리들이 숨어있다.

그러나 현실이 철학을 반영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듯이 철학은 모든 ‘사랑’을 설명할 수 없다. 통상적으로 플라토닉한 사랑과 에로틱한 사랑으로 나누어 이야기하는 인간들의 사랑에 전제나 규칙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모든 상황과 개별성에 기초한 감정들을 일관된 틀 속에 집어 넣을 수는 없다. 이 책에서 이러한 틀과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사랑의 분열과 공존을 위해서 작가는 인륜성과 상호 인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극히 당연한 보편적 사랑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다만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의 일반적 과정과 지루한 반복 과정에 대해 관심을 가질 독자 또한 많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작가는 책의 말미에서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사랑은 생명체의 감정이며 생명체의 활동이다. 사랑은 감성과 이성 모두와 연관되어 있는 활동이며, 유한한 인간을 무한으로 고양시키는 원동력이며, 인간을 고귀하게 만들고 인간의 고귀성을 드러내는 통일 작용이다. 인간이 사랑의 힘으로 모든 고통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 담고 있는 생명성과 고귀성 때문이다. 사랑 속에서 인간은 결핍을 극복하고 무한성과 만나는 고귀한 존재가 된다. - P. 94

‘사랑’에 대해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궁금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확인과 인정을 원한다.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만드는 사랑에 대한 탐구와 관심은 평생 지속되는 관심의 대상이며 삶의 목표가 될 수도 있다. 다만 그 사랑의 의미는 모두의 가슴속에 각기 다른 형태와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적 잣대로 재단할 수도 없고 철학과 이성과 논리로 규정지을 수는 더더욱 없다. 다만, 흔히 우리들이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부딪히는 ‘사랑이 뭘까?’하는 질문에 대한 가벼운 사색을 위한 지침서로 여겨질 만한 책이 바로 <사랑의 철학>이다. 물론,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사랑’이 뭔지 ?수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060727-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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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 -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 e시대의 절대사상 004 e시대의 절대사상 4
이기상 지음 / 살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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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학이 무언지 모른다. 그것이 모든 학문의 근원이든 아니든 중요하지도 않다. 지난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와 과학의 틈바구니에서 어떤 역할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도 큰 관심이 없고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게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동경의 대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과거에 명멸했던 수많은 철학자들의 논리와 주장은 화석처럼 굳어져 박물관에 버려져도 아쉬운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지금, 여기에’ 문제를 생각해보고 미래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작은 기회를 제공한다면 대장장이의 생각이라도 존경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다. 철학은 그저 사유의 방식이며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나와 세상 사이의 창문과 같다고 생각한다.

거창한 담론과 인식의 틀을 제공했던 많은 철학자들의 이론과 주장도 결국엔 인간과 사회의 문제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사람이 산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의미를 물을 수밖에 없다.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된 생존뿐만 아니라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와 삶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 현실에 충실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만 살아온 시간과 쌓여온 세월들이 현재를 만들었고 미래를 위한 준비에 골몰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어떤 형태로든 모두들 내일과 태양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입버릇처럼 말하는 우리들의 ‘존재’란 무엇일까? 철학이 종교의 시녀 역할을 도맡았던 중세를 거쳐 과학적 실증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철학의 역할과 위상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철학의 문제를 ‘언어’에서 출발시킨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나 단 한번도 의심의 대상이 된 적이 없는 ‘존재’ 자체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하이데거의 노력도 이러한 철학적 탐구의 과정일 뿐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존재’는 과연 ‘실존’보다 앞서는 것일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음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얻기에는 내 머리가 너무 짧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그러한 물음에 대한 길찾기이다. 길은 쉽게 찾아지지 않겠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길을 걸어가며 부딪히는 나무와 풀잎들,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멀리 바라 보이는 푸른 하늘이 삶이 과정일지도 모른다. 답은 없고 결론도 없다. 모든 것은 과정이 말해 줄 뿐이다. 결과보다 과정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라 그 모든 궁극은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하이데거는 그 과정에서 작은 불빛을 제공한다. 저자 이기상의 말을 빌리자면 ‘존재는 시간 속에서 주어진다’는 한 문장이다. 아리스토 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말의 ‘이성적’이란 말은 ‘언어적 능력이 있음’을 뜻한다고 한다. 결국 모든 사유의 과정과 길찾기는 ‘언어’를 통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사유와 탐구도 ‘언어’에 의한 틈새 찾기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하이데거가 '실존'이라는 주제 아래 이야기하려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들' 혹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면서 자기 자신이기를 포기하는가 하는 것이다. 대개 인간은 '그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 하며 살고 있다. 스스로 결단내리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는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를 '비본래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본래적인가, 비본래적인가 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실존개념에서 나오는 두 가지 존재함의 양태이다. 이 둘의 양태는 끊임없이 맞물려 있다. - P. 186

다시 말해 과거도 떠맡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가능을 미래로 던지지도 않으면서 '그들'이 살듯이 그저 그렇게 일상의 삶의 문법을 따르면서 거기에서 통용되는 인식의 틀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 P. 192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 중의 하나다.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비본래적 자아를 가지고 일상의 삶의 문법을 따르는 것이나 그러한 인식의 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옳지 못한 방법인가하는 문제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남는다. 물론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거나 사유의 방식조차 갖고 있지 못하는 나같은 우매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난감한 문제일 수도 있다.

철학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시장과 거리로 쏟아져 나와 우리들 삶의 모습을 일깨우고 일상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카데미즘에 갇힌 모든 논의들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 유용성만이 최고의 선이라는 말도 아니다.철학의 흐름과 학문적 대상으로서만 이야기되는 방식은 옳지 않다고 본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통해 유럽철학에서는 의심하지 않았던 ‘존재’의 문제를 깊이 사유하게 되었고 하이데거 개인의 뛰어난 능력과 사유 방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이 현재적 유용성으로 되살아나길 바랄 뿐이다. 한 평생을 하이데거 연구에 골몰하는 이기상과 같은 대부분의 학자에게 개인적으로 경의를 표한다. 얼마만한 애정과 관심과 노력이 있어야 그것이 가능할까 싶다. 대부분의 경우, 논의의 중심에서 동양은 제외되어 있다. 철학자 하이데거 몰두했던 ‘존재’의 개념과 ‘시간’과의 관계가 보편성을 획득하고 인류의 사상사에 보다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후대 철학자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대가의 사상에 감탄하는 개인의 관심이 아니라 사유 방식과 인식의 틀을 변화시키려는 노력들이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언어’에 관한 철학적 관심들을 읽어봐야겠다. 유리벽 안에 갇힌 철학적 주제들과의 적절한 거리두기가 힘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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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지식총서 182
홍명희 지음 / 살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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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흔히 암흑기라 부른다. 이 명명법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지만 우리가 중세를 암울한 시기로 여기는 까닭은 인간 이성의 암흑기였기 때문이다. 종교와 신학의 가치가 모든 것에 앞섰고,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정신은 존중받지 못했다. 철학과 과학은 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범위 내에서 추구될 수 있는 가치였다. 그러다가 계몽과 이성중심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객관적 지식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시기를 맞이한다. 근대로의 이행기에 인류는 과학과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객관적 지식이라는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없다. 다만 한 부분을 강조하다보면 분명히 소홀해지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의 이성을 객관화 시킨다는 것도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부정될 수 있는 말이다. 객관성이라니? 모두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사는 대부분의 사실들이 그러하듯이 주관적 판단과 가치가 개입된 문제일 경우가 많다. 어쨌든 인간을 이루고 있는 부분은 바람직하지 않더라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이성과 감성이 그것이다. logos와 pathos로 구분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본다. 어느 한 쪽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20세기를 전후해서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감성의 역할과 위상이 축소된 것은 사실이다. 바로 이때 ‘상상력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 가스통 바슐라르이다.

바슐라르의 힘겨웠던 삶의 과정으로 시작되는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는 한 인간의 삶의 역경이 그의 학문과 사유 방식을 지배할 수 없다는 숭고함까지 느끼게 한다. 자신의 삶과 그의 업적은 분명히 깊은 관련을 맺고 있지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바슐라르를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그는 인간의 상상력과 주관적 가치를 극대화시킨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객관성을 추구하면서도 사실은 주관적인 가치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P. 30)"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바슐라르는 우리들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주관적 가치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규명해내는 데 일생을 바쳤다. 인간에게 상상력은 크게 두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꿈과 몽상이 그것이다.

인간은 몽상 속에서 꿈을 꾸고, 그 꿈속에서 상상력이 활동한다. 이 몽상은 완전한 의식의 상태도, 완전한 무의식의 상태도 아니라는 점에서 인간의 독특한 정신활동이다. 밤에 꾸는 꿈이 완전한 무의식의 상태에서 무의식 속의 에너지가 활동하고, 사색은 명료한 의식의 집중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데 비해서 몽상은 이 두 활동의 중간지대에서 이루어진다. - P. 43

밤에 꾸는 꿈이 현실적 자아를 벗어난 주체에 의해 실현되는 상상력이라면, 몽상은 낮에 꾸는 꿈이라고 볼 수 있다. 바슐라는 이 독특한 인간의 상상력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이 상상력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밝히고 있다. 모든 예술 활동의 근간이 되며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확실한 차이이지만 눈으로 확인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하고 많은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의 주장들을 살펴보면 이미지의 역할들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이미지와 상상력을 이성과 합리보다 낮은 것으로 바라본다. 활자의 보조수단으로서 이미지의 역할에 관심을 보이는 정도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혁명적인 변화를 보였던 이미지의 힘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컴퓨터의 도스환경에서 윈도우의 출현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컴퓨터를 대하는 사람들의 기본 자세와 습득, 활용 속도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확산되었다. 단순히 쉽고 빠른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 이미지와 상상력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독특한 능력을 적용시킨 예라고 볼 수 있다. 엉뚱한 예로 여겨질 수 있으나 우리가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미지와 상상력은 이성과 논리를 넘어선 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감각적 이미지와 정신적 이미지와 같은 다양한 부분들은 홍명희 말대로 미래에 대한 전망을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바로미터가 된다. 미래는 이미지와 상상력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 미래가 어떤 미래일지라도 바슐라르의 탁월한 직관적 눈을 빌려야 한다. 그의 이미지와 상상력이 지니는 현대적 의미에 대한 저자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현대 사회에서 갈수록 감성적인 부이 사라져 가고, 개인들은 분별없이 육체적 자극에만 중독되어 가는 - 그럼으로써 갈수록 타율적 인간이 되어가는 - 지금의 현상은 결국 활발한 상상력의 퇴와 창조적 이미지의 화석화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현대의 이미지 사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갖추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들은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 P. 81

결국 문제는 이미지들의 어떠한 양과 질이 우리의 지배적인 문화를 생산해 내는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가 이미지를 과연 진정한 창조적 상상력의 발현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 P. 91


스무살 무렵 <촛불의 미학>으로 처음 만났던 그를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재회는 즐거웠고 몽상은 달콤했다. 공상과 망상이라도 좋다. 백일몽이라고 불러도 좋다. 끝없는 상상력과 감각적, 정신적 이미지의 확산은 우리의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척도가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꿈을 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앞날에 축복 있기를. 꿈은 이루어진다니까.


060731-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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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기원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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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단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기나긴 논증’이라는 저자의 서문은 르네 지라르의 가장 중요한 이해의 척도다. 내용보다 서문의 제목이 눈에 선명하다. 각 장에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인용한 것은 저자의 다윈에 대한 존경심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학에서 비롯된 지라르의 지루한 여정은 인류학을 넘어 문화의 기원으로까지 확산된다. 그가 말하는 <문화의 기원>은 물론 그가 지금까지 주장해온 희생양과 모방적 욕망에 대한 정리 작업에 해당된다.

그러나, 머나먼 옛 이야기를 경청하듯 그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문화의 기원’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대담집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을 읽다보면 무수한 의문들과 부딪치게 된다. 케임브리지 대학 이탈리아어과 교수인 피에라올로 안토넬로와 리우데자네이루 대학 비교문학 교수인 조앙 세자르 데 카스트로 로크는 르네 지라르와의 대담을 통해 그가 지금까지 이룩한 학문적 성과를 정리하기 위한 질문들을 던진다. 물론 논쟁적 질문과 그에게 반기를 들었던 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하기도 한다. 지라르는 첫 저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을 비롯해서 <폭력과 성스러움>등을 통해 보여주었던 일관된 주장을 하나의 흐름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희생양과 모방적 욕망에 대한 끈질기고도 집요한 탐구의 결과물들이다.

기독교를 통해 본 예수의 모습은 지라르에게 집단의 폭력과 무책임한 모방에 대한 희생양으로 인식된다. 그가 말하는 예수의 모습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다양한 문화적 풍토와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들을 확인하는 작업은 어쩌면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류가 쌓아온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인간의 행동들을 토대로 그가 읽어내고 싶었던 것은 당연히 인간과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본 ‘폭력’이다. 그것을 읽어내는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특히 에피큐러스 학파를 제외한 무신론에 대한 언급과 이슬람 문화권에 내재한 폭력적 성향을 최근의 9.11테러와의 관련성 측면에서 해석하는 이야기들은 논란이 많을 수 있다. 종교와 폭력을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정답이 있을 수 없다. 논의의 주변부에서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나같은 얼치기에게도 많은 문제점이 보인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스스로 확인할 일이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모방한 제목 <문화의 기원>은 폭력과 희생양에 대한 모방이론을 토대로 지속되고 있는 르네 지라르의 작업에 대한 총결산에 해당된다. 인문학적 관심의 정점에는 항상 현실이 자리잡아야 한다고 믿는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불멸의 40인’에 선정됐다는 옮긴이의 친절한 해설은 그의 주장과 이야기에 권위를 부여할 수는 있겠지만 그의 주장에 대한 논쟁점들을 제공하지는 못하고 있다. 특히 한국어판을 위해 뒤에 덧붙혔다는 레지 드브레에 대한 반론은 ‘레지 드브레’의 글을 읽지 않은 상태의 나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지라르가 반박하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레지 드브레의 글에 흥미가 생겼다. 지나친 반골 기질 때문일까?

흔히 우리들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실의 문제들을 ‘세상의 기원’을 탐구하기 위한 지라르의 견해와 연구를 통해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기원은 인간의 기원으로 바꾸어 이해해도 상관없다. 아니,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대한 기원을 탐구해온 저자의 목소리로 이해해야 좋을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속성과 지나온 시간들과의 싸움은 언제나 지루하고 공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 권의 책과 한 명의 천재적인 인간이 통찰해낸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줄 수 있을 것인가. 학문의 의무와 역할에 대한 새삼스런 의문이 쏟아진다.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모든 개인들에게 ‘객관’과 ‘주관’의 기준이 있기는 한 것인가. 숭산 스님의 말대로 오직 모를뿐!인가.

세상의 기원이든 문화의 기원이든 지금도 여전히 우리들 주변에 널려 있는 희생양들과 모방적 욕망에 대한 그의 견해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을 논증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는 그들의 몫이다.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욕망의 부피와 크기를 확인하는 일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그 고통이 타인의 고통을 통해서라면 더욱 암담하다. 발딛고 서 있는 현실의 모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특별한 처방이 아니라 그 모순들을 확인하는 1차적 과정 자체에 목적과 의미를 둔다는 측면에서만 이 책은 나에게 의미가 있다.


060802-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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