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기억,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 - 어린 시절의 체벌과 학대가 이후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보고서
앨리스 밀러 지음, 신홍민 옮김 / 양철북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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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지나가도 몸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는다. 그것이 가장 큰 슬픔이다.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마음보다 먼저 몸이 아프다. 앨리스 밀러의 새 책 <폭력의 기억>은 어린 시절의 체벌과 학대가 이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보고서이다.

20세기 프로이트 이후 인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변화했고 그 영향과 파장은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는 무의식에 대한 상식 수준의 지식으로도 충분히 상대를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까지 가지게 된다. 꿈을 해석하면 그 사람의 억눌린 자아와 억압된 욕망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이 곧 인간의 해방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다. 프로이트라는 거목 때문에 생긴 그늘이다. 정신과 의사인 앨리스 밀러는 철학과 심리학 사회학까지 공부했다. 이런 배경이 <폭력의 기억>을 읽는데 영향을 미친다. 그만큼 이 책은 폭넓은 측면에서 ‘폭력’에 대한 잔인한 기억을 되새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폭력은 단순한 물리적 폭력을 말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지속적이고 충격적인 모든 체벌은 물론 언어 폭력과 정신적 학대에 이르기까지 개인에게 가해진 모든 억압을 띤 형태를 일컬어 ‘폭력’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문제는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는 시기의 문제이다. 유년기라는 시기는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의 시기를 말한다. 사회화의 과정을 거쳐 그 사회의 역사적 문화적 기호들을 받아들이고 사회적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은 고통스럽다. 개인보다 사회의 가치가 주입되며 선악, 오호의 가치 판단을 넘어 개인의 선택과 판단은 억압된다. 어린 시절은 백지상태와 같다. 흰 종이에 악몽을 그려 넣는 어른들의 이야기는 잔혹극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시기에 벌어지는 체벌과 학대는 일방적인 폭력이다.

둘째는 부모와의 관계이다. 타인과의 관계가 형성되기 전에 부모와의 관계는 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우리가 만나는 모든 부모가 완벽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윤리와 도덕에서 종교에 이르기까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절대 가치를 주입한다.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부모에 대한 공경은 논리와 이성이 개입될 여지가 없으며 세상의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더욱 심각하다. 종적 인간관계의 전형으로 부모 자식 관계를 들 수 있다. 군사부일체라는 봉건적 인식태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이러한 가치가 빚어내는 폐해에 대해 모두가 침묵한다. 침묵의 카르텔은 세대를 뛰어넘어 전수된다.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부모가 된 상처받은 어린아이는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것이 폭력인줄도 모른 채.

저자가 말하는 문제의 핵심은 어린 시절 ‘폭력의 기억’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특히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태도는 세습된다는 데 가장 큰 문제가 있다. 모든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 돌려지기 때문에 원인을 알지도 모른 채 심각한 분열증상과 육체적 고통, 거식증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고통을 수반한다. 그 고통은 개인 차원의 문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확대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해결책을 쉽게 말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네 부모를 믿지 말라’는 말의 전도 유망함에 대해 이야기했던 박홍규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이유는 분명하다. 모든 인간관계가 상하, 종적 관계를 벗어날 때 비로소 개인의 가치는 소중하게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폭력의 기억’은 그 기억을 벗어나기 위한 과정과 방법에 대해 실증적으로 이야기한다.

이 책이 흥미롭고 의미있는 것은 1부의 ‘진실을 외면한 사람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체홉, 카프카, 니체에서부터 랭보,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에 이르기까지 ‘폭력의 기억’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기 때문이다. 2부 ‘몸의 메시지’에서는 그 폭력이 어떤 식으로 우리 몸에 영향을 미치며 반응하게 하는지 확인시켜 준다. 마지막으로 3부 ‘거식증’에서는 아니타 핑크의 일기를 통해 저자의 이론을 실제로 보여준다.

정신과 의사의 임상 실험 일지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의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탐구하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인간에 대한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나 자신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폭력’이라는 거북한 단어의 뉘앙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온, 혹은 겪어온 세월을 넘어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의 자세와 행동의 변화이다.

실천과 노력이 동반되지 않는 이론은 관속의 시체 같다. 삶이 존재하기 때문에 죽음이 의미있고 소중하듯이 살아 움직이는 못하는 이론은 현실과 유리된 박제와 같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다 지나간 일이라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 책을 보라. 그리고 우리의 부모와 부모가 된 나와 우리의 아이들을 돌아보라.


0610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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