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후두둑 씨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61
이용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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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사는 게 사건의 연속이지만,
모든 포유류의 결말은 고독하다
죽어서 말이 없거나 말없이 죽었거나
아가리 닥쳐, 라는 한마디가
후두둑 씨의 지나간 인생을 후려친다                          - ‘맙소사, 후두둑 씨’ 중에서

시인의 생각은, 아니 모든 작가의 글들은 그의 생을 넘어 설 수 없다. 이것은 한계가 아니라 작가의 개성이며 분명한 자기 색깔이다. 자신이 살아온 삶과 사유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글이다. 시나 소설이나 생에 대한 통찰과 연민, 애정과 비판이 감각적이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문학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 나름의 방식은 독자들에게 선명하게 각인될 것이며 공감을 이끌어 낼 것이다. 모호한 대상과 추상적 관념들을 선명한 이미지로 표현하거나 감정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일반적인 시선으로도 이용한의 <안녕, 후두둑 씨>는 읽을만한 시집이다. 삶의 진정성이 짙게 배어나오는 그의 시들은 독자의 정신을 ‘후려친다’

네가 말하는 추억이란,
그저 입술에 남은 바퀴 자국 같은 거
온몸이 불충분했고, 사랑했다는 증거는 없어
침대 밖에서까지 노력할 필요는 없지                          - ‘목요일은 아프다’ 중에서

아침에 나간 추억이 돌아오지 않는다
70년대 라디오 잡음처럼 비가 내리는 밤,
버려진 남자의 폐허 위로
몇 그루의 나무가 시간을 펄럭이며 서 있다
내가 키운 나무들은 아무래도 그리움이 지나쳤다
조금만 비가 와도 와락 눈물에 젖는다                          - ‘고장난 것들’ 중에서

나는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나이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68년생 이용한이 바라보는 세상과 인생은 어떤 것일까 궁금하기 때문이다. 추억이란 구두 밑창에 들러 붙어있는 완전히 떼어낼 수 없는 껌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증거도 없는 추억을 아직까지 지나친 그리움 속에 잠긴 시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장석주의 표현대로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를 기억하게 된다. 공감은 동일시에서 출발하는 감정이다. 하나가 된 듯한 일종의 착각이다.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동일한 존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결국 시는 보편적 정서의 재생산이거나 유일무이한 사건과 감정에 대한 기록이다. 물론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초월과 한계를 함께 지닌다.

네가 외출한 사이에,
방바닥에 엎어진 술병들
술병처럼 누운 나
사실 내 기다림은 습관이야
굳이 네가 아니었어도 난 기다렸을 거야
낙엽 지던 입술들
내 삶의 푸른 이파리를 흔들어 다오                              - ‘비 오는 춘화’ 중에서

시간은 나무처럼 잘도 자란다
창문 밖으로 청춘이 지나가는 소리
나는 마음속의 검을 숨기고 술잔을 기울인다
이미 강 건너간 사랑은 건너간 사랑이야                        - ‘무악재에서 공무도하가를’ 중에서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산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 이성과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파토스의 영역은 영원히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기다림이 습관인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바라본다고 해서 일상이 변하지는 않는다. 내밀한 감정을 과대 포장하거나 비극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습관이자 현실에서 분출하는 욕망의 대리 배설이다. 그러나 이용한이 말하는 사랑과 그리움은 현실에서 누더기가 된다.

안녕, 후두둑 씨

후두둑 씨에게 늦은 소포가 온다
나는 잘 있다고 포장된 외로운 책이다
갈피마다 부엌에서 침대까지 걸어간
발자국이 적혀 있다
후두둑 씨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외투를 걸치고 식탁에 앉는다
지난봄에 들여놓은 아들 녀석이 잠깐
불가사의한 안녕을 묻는다
낡은 커피라도 드릴까요?
후두둑 씨에게 인생은 앉아 있는 것이다
뒤꿈치가 닳아서 무표정한 의자가
매일같이 삐걱이는 후두둑 씨를 기다린다
사뿐히- 갈라진 여백을 중얼거리며
아들아 거의 다 왔다,
문이 닫힌 아내가
지붕 위에서 성큼성큼 쏟아져 내린다.

표제작인 위의 작품은 10년만에 시집을 묶어 낸 시인의 30대가 보인다. ‘뒤꿈치가 닳아서 무표정한 의자’는 시인의 얼굴을 연상시킨다. ‘후두둑’ 떨어지는 마른 하늘의 빗방울처럼 불현듯 생의 불가해함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예정된 길을 걷는 사람들이 부러운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우리들의 삶은 그렇게 별안간 쏟아지는 소나기와 같다. 상상력이 시의 출발이라면 생활과 삶에 대한 통찰은 시인의 종착역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것은 모두 사람과 사물, 인생과 세계에 대한 반성과 아이러니이다. 그래서 이용記?지나가는 시간을, 사라지는 생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체통

자고 나면 생이
슬퍼진다
쓸데없는 편지를 부치고
우체통처럼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세월은 우편배달부처럼 지나간다.


060816-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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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과 철학 강의 1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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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폭력의 역사와 다름없다. 전쟁과 평화라는 상반된 가치는 인류에게 방학 중 일기숙제처럼 영원히 미뤄진 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전쟁과 폭력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50여년간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은 한반도의 평화가 한민족에게는 가장 긴 평화(?)의 시기일지도 모른다. 지구상에서 단 하루도 전쟁이 벌어지지 않은 날은 없다고 단언해도 좋을만큼 인류의 역사는 폭력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그 폭력의 판단 기준을 선과 악으로 들이대거나 원인을 규명하는 일 자체가 부질없다. 인간은 싸운다. 고로 존재한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론의 1차적 욕구는 생리적 욕구다. 식욕과 성욕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렇다면 전쟁과 폭력은 이러한 1차적 욕구를 성취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가라는 물음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아니면, 마지막 5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를 위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폭력을 행사해야 하는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폭력의 문제는 국가의 존립을 위한 몸부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중세의 봉건적 가치를 고집하는 수구세력의 목숨을 건 저항은 결국 나라를 말아 먹었다. 근대화의 기로에 선 조선은 대한민국이라는 제국주의를 선택했으나 일본에 의해 끝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이후 벌어지는 독립 운동과 일본의 패망에 의한 광복은 초유의 이념대립에 의해 한국전쟁으로 이어진다. 결국 친일 잔재 청산은 21세기에도 요원한 숙제가 되어버렸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박정희로 이어지는 현대사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고통이다.

이 폭력의 시대를 넘어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까? 푸른 하늘에 짙게 드리운 먹구름은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게 한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인류의 미래는 과거의 역사에서 비롯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답변일 뿐인가?

도올이 말하는 폭력의 세기와 논술의 세기에 동의할 수는 없다. 조선시대 <책문>으로부터 논술의 역사를 찾고 있는 도올의 논술에 대한 거대 담론은 시대와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거시적 안목으로 비쳐지지만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온몸으로 부대끼는 삶의 현장에 적용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EBS에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논술 강의를 하고 있는 도올은 <논술과 철학강의>라는 책을 통해 강의의 면면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두 권의 책 중 1권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폭력’의 문제와 관련시켜 살펴보는 1부와 철학의 제문제들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들을 짚어보는 2부는 가독성이 탁월하다. 고등학생들에게 강의하듯 막힘없이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소 어려울 수 있다는 서문의 내용이 무색하다. 3부는 문장론이다. 수많은 책을 쓰면서 대표적인 저술가답게, 개인 출판사를 운영할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 도올의 문장론은 수준 이하이다.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의 이야기를 중언부언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래도 1, 2에서 보여준 도올 특유의 입담과 일관성 있는 시선은 한국 현대사와 철학의 제문제에 대한 명쾌한 설명으로 읽을만하다. 특히 맨땅에 헤딩하는 논술 세대를 위해서는 반드시 권해줄 만한 책이다. 바야흐로 ‘논술의 시대’가 도래했다. 세계 문학이나 한국 문학을 출판하는 모든 출판사와 글쓰기와 관련된 모든 책들의 앞, 뒤에 ‘논술’이라는 수식어는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다. 맹목적이고 무분별한 논술에 대한 집착은 그 결과가 뻔하지 않은가. 초등학생부터, 아니 취학 전 아동부터 시작되는 논술에 대한 광풍이 염려스럽다. 학교교육의 방법과 틀이 바뀌지 않은 채 논술에 대한 관심과 열의만 증폭되는 현실에 대한 대책은 시급하기만 하다.

도올은 책 말미에서 2006년을 시대의 물음에 답할 수 없는 침묵의 시기로 규정하면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논술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책 두 권으로 논술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본적인 사유의 틀과 세상에 대한 이해 방식을 바로 잡는 데는 도움이 될 만하다. 도올 특유의 자뻑멘트가 눈에 거슬리기도 하고 우리말 문장과 한글 전용에 대한 주관적 아집이 보이기도 하지만 귀엽게 봐준다면 후한 점수를 줄 수 있겠다.

대학 입시와 직결된 각론으로 들어가서 이 책이 대입 논술을 위해 도움이 될만한가라는 질문에는 절대로 아니라고 대답해야 한다. 2008학년도 대입부터 시행되는 통합 논술의 예시들은 도올의 지적대로 프랑스의 바칼로레아가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빼앗기거나 잘못된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실전과 훈련을 일치 시켜야하는 현실에서 본다면 부적당한 교재다. 하지만 넓고 깊은 의미에서 궁극적인 논술의 목적을 실현해야 한다면 어느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수는 없다. 잡다한 지식의 암기가 아니라 논리적이고 창조적인 사유 방식들을 다듬어 나가기 위한 방편이라면 잠시 시간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060817-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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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의 문화사 살림지식총서 224
박철수 지음 / 살림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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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 줍니다’

엽기적인 건설 회사의 광고 카피다. 아파트라고 하는 공통 주택의 형태는 엽기다. 차단된 공간 속에서 한 줄로 앉아 볼일을 보고 한 줄로 누워 잠을 잔다. 아파트 밖에서 위 아래로 훑어보며 생각해 보면 닭장 속의 닭처럼, 성냥갑 속의 성냥들처럼 동일한 공간과 환경 속에서 생활하는 박제된 사람들의 생활이 재밌고 우습다. 이것이 내가 처음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느낀 점이다. 80년대 후반 처음 아파트로 이사가게 되었을 때 생활의 편리보다는 아파트라는 폐쇄적인 공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족들이 대부분 반대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머니의 주장대로 이사를 감행했고, 또 그런대로 아파트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갔다. 이후 한 번도 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의 삶의 형태도 비슷할 것이다. 이제 아파트는 가장 보편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 잡았다.

우연히 박철수의 <아파트의 문화사>라는 책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한다. 한국의 아파트는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진화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했다. 짧은 책이지만 현대사의 산 증인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아파트는 개발 독재 시대의 유산으로 출발해서 양극화의 첨병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중 소설을 통해 아파트의 이미지를 소개하는 부분은 신선했고, 우리의 아파트가 지닌 문제점을 건축가의 입장에서 지적하는 대목들은 공감할 수 있었다. 원래 아파트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들이 개선해야 할 많은 문제점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에 공감하게 되었다. 현재의 아파트를 ‘자폐증과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비유한 대목을 이해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오래 전부터 하늘과 산과 강을 그리워하며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그리워했던 이유들도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다. 피상적인 꿈으로서 전원 생활이 아니라 콘크리트 숲이 주는 건조함과 사막함의 원인은 공간적 이기주의와 폐쇄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엇인가 숨 막히는 공간을 벗어나고 싶다는 본능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는지도 모른다. 아파트의 편리함과 환금성을 대체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대안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은 아닐 것이다. 아파트도 기본적으로는 우리들 삶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며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단지식 아파트로 현재와 같은 형태로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는 1962년에 완공된 마포 아파트다. 이후 아파트의 높은 담장과 철저한 보안 시스템은 첨단을 달리고 있다. 결국 아파트의 진화는 단지별 위화감의 조성과 단지 밖에서 아파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동경과 선망으로 바뀌었다. 평수와 가격으로 수량화, 박제화 되어 버리고 있는 우리들 아파트의 현주소는 설명하기 힘든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결국 대한민국 자본주의 총아는 아파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평생 집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삶을 저당 잡히고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토지와 주택에 대한 개념이 변함없이 유지된다면 우리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원시시대에도 모두가 함께 지혜를 모아 해결했던 의식주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생존 환경들을 위해 살아야 하는걸까?

박철수의 말처럼 ‘자폐증과 우울증’이라는 병리현상으로 밖에 파악할 수 없는 아파트의 현주소는 바뀌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이기적 욕망들을 버리고 모두 함께 잘살자는 이상주의를 펼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동과 동사이 개별 호와 호 사이에 최소한 소통의 공간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경쟁과 비교 우위의 강박 속에서는 불가능한 삶의 모습들이다. 물론 모두가 살벌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닐 테지만 집단 이기주의의 속성은 첨예한 대립양상으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단지와 단지 사이의 통행 제한이나 학군 조정 문제 도로 개통 문제에 이르기까지 언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들만으로도 아파트의 우울한 현주소는 쉽게 확인된다.

각종 외국어를 이용한 아파트 브랜드의 차별화 전략은 명품에 환장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전형을 이용하고 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대한민국의 각 가정에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는 광고가 흘러 나온다. 내가 사는 곳과 내가 사는 아파트가 나를 말해 준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라면 할 말은 없다. 아파트의 ‘오만과 편견’은 우리들 삶의 모습까지 일그러지게 한다.

효율성과 집적 능력의 결정판으로 주거 형태에 혁명을 가져온 아파트에 대한 새로운 시각고 접근 방법은 개별 거주자들의 노력은 물론이겠지만, 주택과 토지에 대한 국가적 개념 설정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대다수 국민들?삶의 질을 향상 시키기 위해 아파트라는 주택 형태는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다. 매년 새로 지어지는 주택의 80%가 아파트라면 아파트의 기능과 공간의 개념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시급하다. 그래야 아파트의 ‘자폐증과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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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 이반 일리히 전집 3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 미토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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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행복을 말하는 것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어려운 문제다. 그만큼 다양한 제 나름의 목적과 기준과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 유치환은 ‘행복’이라는 시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 말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행복이다. 행복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시키면 ‘행복’은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는 이상론으로 발전한다. 벤덤의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역설했지만 실천적 한계와 약점을 지니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도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이반 일리히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단순한 문명 비판 서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책이다. 짧은 발표문으로 적은 분량으로 심층적인 이해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일리히가 주장하는 에너지에 대한 과학적 사고는 귀담아 들을만하다. 특히 발전과 속도의 맹목에 목숨건 사람들에게 필요한 처방전이다.

우리는 빨라진 속도만큼 행복해졌는가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KTX를 타고 부산에 당일로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것이 가능해진 시대에 행복도 그만큼 늘어났을까? 인간의 행복을 어떤 기준으로 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쉽게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도대체 자전거와 행복 사이의 상관관계에 말하는 이야기는 무언가. 그것은 에너지와 속도의 문제로 모아진다. 이 책의 원제는 ‘Energy and equity’이다. 화석 원료로 매장량이 제한되어 있는 석유에 대한 인류의 에너지 의존도는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석유 먹는 하마가 되어 버린 중국의 석유 사용량의 증가는 미국과 함께 미래의 에너지에 대한 대책이 코 앞에 닥쳤음을 예고한다. 평등하지 못한 에너지의 사용과 주로 교통 수단에 사용되는 에너지의 사용에 대해 일리히는 과학적으로 증명한다. 인간의 잠재된 상상력과 자연 속에서 누려야할 행복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읽는 사람을 한참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할 만하다. 우리가 잃어 버린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인간의 자율적 이동이 아닌 타율적 수송은 인간의 삶의 형태를 바꿔버린 것은 물론이고 인간 사이의 불평등을 파생시켰다. 이동 속도의 증가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자율적 시간을 빼앗아 버렸다. 점점 더 바쁘고 시간이 없어진 사람들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외침과는 거리가 먼 실천적 행동을 요구하는 일리히의 목소리는 새겨 들을만하다. 자전거는 인간의 신진대사의 한계만큼 활발하게 신속한 이동을 가져왔으며 에너지에 대한 공포와 환경 문제에 대한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린다. 간접적인 방식으로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과 결론을 이끌어 내는 논리적인 말하기는 부드러움의 힘을 보여준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21세기와 자전거라니? 빛의 속도를 흉내내는 인간의 이동 수단의 발달에 딴지를 거는 무모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자전거가 훨씬 더 효율적이고 빠른 교통 수단이 되어 버린 대도시의 교통난과 에너지 문제는 단순하게 치부할 만한 주장은 아니다. 실제 생활에서 실천 가능한 대안들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얼마나 진지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적용해 보느냐하는 용기의 문제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이다. 쉽지 않겠지만 필요한 일이라면 신중해 질 필요가 있다.

단순하게 건강을 위해 자전거를 타고 달려보자는 주장과는 거리를 두고 일리히의 주장에 귀 기울여 본다면 미래의 대체 에너지 개발에 열올리는 대신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쉽고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출퇴시간에 소요되는 시간의 효율성과 우리들 삶의 질을 비교한다면 발상의 전환은 가능하다. 일거에 자동차를 모두 없애자는 원천 봉쇄의 오류를 범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전거를 이용하겠다는 생각의 시작이 중요하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도로와 교통 상황을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오겠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생각과 방법들이 있다. 노력하고 실천하고 힘을 모으는 일이 중요하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환경은 중요하다는 식의 단순 분류의 오류를 범할지도 모르는 이 책의 의미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의 생각할 문제를 던져준다.

자전거를 타고 맑은 하늘과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자율적으로 이동하는 것과 퍼스트 클래스 1등석의 안락함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일리히가 말하는 에너지 위기와 속도에 마비된 상상력을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가속도의 무익성이나 파악하기 어려운 속도의 한계, 인력이동의 효율성에 대한 논의들은 놀랄만한 과학 기술의 과학과 더불어 고민해 보아야 할 핵심적 사안들이 아닐까 싶다.


060821-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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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경 2015-04-14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 봐야겠습니다
정성이 담긴 리뷰 고맙습니다

sceptic 2018-03-16 23:41   좋아요 0 | URL
넵...
 
학계의 금기를 찾아서 살림지식총서 136
강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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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면 동생이 먼 나라로 떠난다. 내가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선택이지만 마음이 착잡하다. 본인은 새로운 기회와 도전에 고무되어 있지만 갑갑해 보인다. 그 갑갑함의 원인은 물론 복합적이다. 뉴욕대 박사 과정을 위해 떠나는 동생에게 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영어를 미국에서 공부하겠다는데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돌아오지 말라는 조언을 했다. 미국에 비전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교육환경과 풍토를 감안한다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 교육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른다. 비관적인 현실 인식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지만 개인들의 노력과 뜻있는 사람들의 점진적인 의지가 모아진다고 해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모순은 고개를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중등 교육은 물론이려니와 대학에서 벌어지는 교수 임용문제와 전공과 관련된 밥그릇 문제, 학문 자체 내의 건전한 비판과 질적인 발전 측면은 거론 자체가 금기시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부 고발자나 비판자는 이 땅에서 학문과 생활을 접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명원이다. 최근 서울디지털 대학에서 교수 재임용에 탈락한 이명원 교수는 비판적 지성인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대학은 비판적 지성의 무덤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에 솔선수범해서 나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외부인이 적합하다. 아니 어쩌면 외부인은 용기가 없어도 그것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실험과 결과에서도 황우석 사태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데, 인문학 분야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교수 신문사의 강성민이 쓴 <학계의 금기를 찾아서>는 내용과 분량면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다. 살림지식총서로 발간되기에는 내용의 깊이와 범위의 한계가 느껴진다. 굵직한 단행본으로 본격적이고 심층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내용들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하나하나의 주제를 걸핥기 식으로 소개에만 그치고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논의들이 진행되지 못해 아쉬움이 많다.

스승을 비판과 전공 불가침의 법칙, 논문 형식의 실험에 이르기까지 대학 내에서 관습화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소개된 것은 저자의 말처럼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확인 작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그것들에 대한 현상을 밝히는 일은 현실에 대한 반성적 태도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알고 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사실들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다. 단순하게 대학의 교수와 제자들 사이의 문제 뿐만 아니라 학계의 오랜 관습과 형식의 틀이 제공하는 고집들을 짚어 보는 일은 미래를 위해 당연히 거쳐야 할 비판이다.

생존 인물에 대한 탐구와 진보와 보수의 문제, 김우창의 학제성, 문화와 비평에 대한 비판에 관한 글들은 새롭다기보다 지루하지만 ‘금기’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로 묶어보는데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최근들어 글쓰기에 대한 관심은 지나칠 정도로 고조되어 있다. 그만큼 글쓰기는 대중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이것에 대한 허구성을 지적하는 저자의 지적 또한 적절하지만 지식 대중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글 정도로 끝나 버려 아쉬움이 남는다. 마지막으로 근대성 콤플렉스에 관한 글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근대를 넘어 탈근대도 여전히 논의되고 있는 있다.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다양성과 폭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우리 사회의 ‘금기’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제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닌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들만의 리그와 침묵의 카르텔이 유지되는 사회는 결코 발전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기회와 합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공론의 장이라는 열린 공간만이 대학을 대학답게 만들어 줄 것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 이론적 틀과 미래의 아젠다를 제공해야 하는 학문의 전당에서 경직된 사고와 봉건적 인습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들을 눈감고 모른척 하고 있다면 미래는 암울하다. 서울대 미대 김민수 교수의 6년간의 복직 투쟁 과정은 눈물겨웠다. 서울대에 미대를 설치한 장발 박사의 친일 행적을 비판했다는 학자적 양심이 그가 대학 교수로서 결격 사유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도 국립대에서 말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다 아는 거짓말과 모두가 인정하는 모순을 어떻게 할 것인가? 현실적 대안과 기본적인 틀거리에 대한 고민들은 대안이 쉽지 않지만 반드시 풀어나가야 할 문제이다. 이 책이 지적하는 학계에 대한 금기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숨어 있는 ‘금기’에 대한 모든 ‘해금’이 이루어져야 한다.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는 저절로 우리들 손에 쥐어 진 적이 없다. 피와 땀과 눈물들의 결과물이다. 무임승차는 역사에 대한 반역이다. 스스로 모두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기득권과 이기적 욕망의 노예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060822-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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