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후두둑 씨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61
이용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어차피 사는 게 사건의 연속이지만,
모든 포유류의 결말은 고독하다
죽어서 말이 없거나 말없이 죽었거나
아가리 닥쳐, 라는 한마디가
후두둑 씨의 지나간 인생을 후려친다                          - ‘맙소사, 후두둑 씨’ 중에서

시인의 생각은, 아니 모든 작가의 글들은 그의 생을 넘어 설 수 없다. 이것은 한계가 아니라 작가의 개성이며 분명한 자기 색깔이다. 자신이 살아온 삶과 사유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글이다. 시나 소설이나 생에 대한 통찰과 연민, 애정과 비판이 감각적이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문학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 나름의 방식은 독자들에게 선명하게 각인될 것이며 공감을 이끌어 낼 것이다. 모호한 대상과 추상적 관념들을 선명한 이미지로 표현하거나 감정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일반적인 시선으로도 이용한의 <안녕, 후두둑 씨>는 읽을만한 시집이다. 삶의 진정성이 짙게 배어나오는 그의 시들은 독자의 정신을 ‘후려친다’

네가 말하는 추억이란,
그저 입술에 남은 바퀴 자국 같은 거
온몸이 불충분했고, 사랑했다는 증거는 없어
침대 밖에서까지 노력할 필요는 없지                          - ‘목요일은 아프다’ 중에서

아침에 나간 추억이 돌아오지 않는다
70년대 라디오 잡음처럼 비가 내리는 밤,
버려진 남자의 폐허 위로
몇 그루의 나무가 시간을 펄럭이며 서 있다
내가 키운 나무들은 아무래도 그리움이 지나쳤다
조금만 비가 와도 와락 눈물에 젖는다                          - ‘고장난 것들’ 중에서

나는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나이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68년생 이용한이 바라보는 세상과 인생은 어떤 것일까 궁금하기 때문이다. 추억이란 구두 밑창에 들러 붙어있는 완전히 떼어낼 수 없는 껌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증거도 없는 추억을 아직까지 지나친 그리움 속에 잠긴 시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장석주의 표현대로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를 기억하게 된다. 공감은 동일시에서 출발하는 감정이다. 하나가 된 듯한 일종의 착각이다.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동일한 존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결국 시는 보편적 정서의 재생산이거나 유일무이한 사건과 감정에 대한 기록이다. 물론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초월과 한계를 함께 지닌다.

네가 외출한 사이에,
방바닥에 엎어진 술병들
술병처럼 누운 나
사실 내 기다림은 습관이야
굳이 네가 아니었어도 난 기다렸을 거야
낙엽 지던 입술들
내 삶의 푸른 이파리를 흔들어 다오                              - ‘비 오는 춘화’ 중에서

시간은 나무처럼 잘도 자란다
창문 밖으로 청춘이 지나가는 소리
나는 마음속의 검을 숨기고 술잔을 기울인다
이미 강 건너간 사랑은 건너간 사랑이야                        - ‘무악재에서 공무도하가를’ 중에서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산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 이성과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파토스의 영역은 영원히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기다림이 습관인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바라본다고 해서 일상이 변하지는 않는다. 내밀한 감정을 과대 포장하거나 비극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습관이자 현실에서 분출하는 욕망의 대리 배설이다. 그러나 이용한이 말하는 사랑과 그리움은 현실에서 누더기가 된다.

안녕, 후두둑 씨

후두둑 씨에게 늦은 소포가 온다
나는 잘 있다고 포장된 외로운 책이다
갈피마다 부엌에서 침대까지 걸어간
발자국이 적혀 있다
후두둑 씨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외투를 걸치고 식탁에 앉는다
지난봄에 들여놓은 아들 녀석이 잠깐
불가사의한 안녕을 묻는다
낡은 커피라도 드릴까요?
후두둑 씨에게 인생은 앉아 있는 것이다
뒤꿈치가 닳아서 무표정한 의자가
매일같이 삐걱이는 후두둑 씨를 기다린다
사뿐히- 갈라진 여백을 중얼거리며
아들아 거의 다 왔다,
문이 닫힌 아내가
지붕 위에서 성큼성큼 쏟아져 내린다.

표제작인 위의 작품은 10년만에 시집을 묶어 낸 시인의 30대가 보인다. ‘뒤꿈치가 닳아서 무표정한 의자’는 시인의 얼굴을 연상시킨다. ‘후두둑’ 떨어지는 마른 하늘의 빗방울처럼 불현듯 생의 불가해함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예정된 길을 걷는 사람들이 부러운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우리들의 삶은 그렇게 별안간 쏟아지는 소나기와 같다. 상상력이 시의 출발이라면 생활과 삶에 대한 통찰은 시인의 종착역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것은 모두 사람과 사물, 인생과 세계에 대한 반성과 아이러니이다. 그래서 이용記?지나가는 시간을, 사라지는 생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체통

자고 나면 생이
슬퍼진다
쓸데없는 편지를 부치고
우체통처럼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세월은 우편배달부처럼 지나간다.


060816-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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