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의 밤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한 작가의 명성은 하루 아침에 생기지도 무너지지도 않는다. 폴 오스터의 <신탁의 밤>은 그의 명성을 확인해 줄만한 수작이다. 우선 구성 측면에서 전통적인 방식인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는듯 보이지만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이야기의 넘나듦이 이 틀을 깨고 있다. 소설속 주인공 시드니 오어는 작가다. 그의 소설 속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 소설속에 ‘신탁의 밤’이라는 소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사건과 내용의 주된 내용은 외화(外話)나 내화(內話)라고 말할 수 없다. 현실인 외화와 소설인 내화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3중구조의 소설로 구성된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문체와 전달방식에서도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오랜 병을 앓고 퇴원한 오어는 아내 그레이스와 함께 살고 있는 작가다. 브루클린의 한 문구점에서 포르투갈제 푸른 노트를 구입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소설속에는 닉 보언이라는 작가와 아내 에바 보언 그리고 로사 라이트먼이라는 편집자와 ‘역사보존관리소’를 만든 에드 빅토리가 등장한다. 또 소설속에 등장하는 실비아 맥스웰이 쓴 ‘신탁의 밤’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정리하면 소설속의 소설속의 소설이 바로 ‘신탁의 밤’이다.

  어떤 소설이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외면하는가? 없다. 이 소설도 그런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알 수 없는 인생에 대한 또다른 통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의 구성요소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도 제각각이겠지만 정답은 없다. 폴 오스터는 이 소설에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필연과 우연 현실과 환상을 뒤섞어 놓는다. 다소 복잡하고 작위적인 구성으로 느껴질 법도 하지만 공상 과학 소설이나 기시감을 들먹이는 미스터리 소설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 지닌 불가해한 측면을 깊이있게 고민하고 있는 소설로 읽혔다.

  작가가 기울인 그만큼의 깊이와 구성에 대한 고민이 느껴진다. 현실속의 존 트로즈라는 대가의 입을 통해 글은 현실과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이것이 작가의 다른 목소리로 들린다. 말보다 더 미래에 대한 예언적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이 글이라는 얘기다. 시드가 쓴 푸른 노트 속의 이야기를 아내 그레이스가 꿈을 꾸고 소설 속 이야기와 현실이 점점 충첩되면서 시드는 결국 푸른 노트를 찢어버리지만 소설속의 소설 ‘신탁의 밤’의 얘기처럼 아내 그레이스와 존 트로즈의 관계에 대한 상상과 현실을 뒤섞어 버린다. 소설의 말미에서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같은 시간에 벌어졌던 각기 다른 장소의 이야기를 병치시킴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의미도 되새기고 있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 한 편을 통해 하나의 주제나 도덕 교과서처럼 하나의 교훈을 제시하려는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서도 폴 오스터는 그저 흘러가는 혹은 살아지는 인생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그리고 있다. 다만 영원한 숙제인 인생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 보인다. 미래는 예언될 수도 있으며 현실과 상상은 언제든 충첩될 수 있고 예기치 못한 우연이 전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당연한 전언.

  순간 순간에 대한 상황 묘사와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뛰어나고 현실과 소설의 내용이 겹치거나 영향을 주는 장면들이 전혀 어색하거나 서툴지 않다는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이다. 그래서 읽을 만하다. 호흡이 짧고 간결하지 않다. 다소 길고 느린 문장으로 생각의 속도를 지루하게 끌고가는 면이 있으나 내용과 어울리고 있으므로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특별히 새롭고 환상적인 소설이 없다면 다양성 측면에서 이런 소설도 괜찮았다.

  ‘신탁의 밤’은 사실 미리 예정된 운명 안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의 밤’에 대한 아이러니로 읽을 수도 있겠다. 어쩌겠는가 인간의 삶에 대한 한계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흥미진진한 영화의 장면들이 계속되는 것을 지켜볼 밖에. 그것이 모순된 생의 부조리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


2005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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