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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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에 이루어졌던 문학적 성과는 ‘노동문학’으로 대표될 만큼 문학의 저변 확대라고 말할 수 있다. 억압과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문학운동은 엘리트 문학을 벗어나 노동자, 농민을 기반으로 한 본격적인 민중 문학의 출발이었다. 박노해와 백무산으로 대표되는, 특히 시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냈다. 이후, 레닌 동상의 철거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역사적 실험이 끝나고 거대 담론이 사라진 자리에 90년대에는 여류 소설가들의 약진이 돋보였다. 남성 우월주의와 사회적 억압을 거부하는 ‘불륜’이 넘쳤났다. 한 시대를 한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분명한 특징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21세기의 화두는 ‘여성, 환경, 생명’이라고 정리한 이윤기의 말은 이제 분명한 의미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젊은 소설가 정이현은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그녀의 첫 번째 소설집은 8편의 단편이 실려있지만 분명한 특징들로 우리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모든 소설의 주제는 진부하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늘 아래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무엇이 있을까? 다만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과 표현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시간이 흐르고 삶이 진행되면서 사회가 변하고 삶의 양상은 복잡해지고 있다. 그 틈새를 예리한 눈으로 포착하는 작가의 눈을 빌어 우리는 즐겁게 들여다보면 그만이다. 그 간극을 메우지 못해 불안해하는 많은 사람들과 억지로 틈을 벌리는 사람들의 중간쯤에 정이현은 서 있다.

  우선 시선을 따라가 보자. 그녀는 전통적 소설의 문법인 시점을 일부러 거부하고 있지는 않지만 편안하지 않다. 소설과 내부와 외부에서 끊임없이 독자를 끌어들이고 타인의 시선을 전제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기 때문이다. 서양 연극의 제 4의 벽의 원리처럼 대개의 경우 소설의 인물들은 짐짓 독자의 시선을 외면하거나 침묵을 전제로 행동하고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그렇다고 작가가 판소리의 창자처럼 청자를 염두해 두거나 대화형식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독자들은 사소한 일상의 문제들은 은밀히 공유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고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 묘한 매력을 지닌다.

  이 책의 인물들은 모두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대개의 경우 현대적 의미의 여성이다. 10대 소녀에서 당당한 커리어우먼까지 지금 이 시대의 여성이 주인공이다. 물론 시대를 뛰어넘어 19세기말 당대의 현재성을 획득한 ‘김연실’을 앞세우기도 하지만. 독신이기도 하거나 동성연애자이기도 하고 거식증 환자일수도 있으며 결혼을 앞둔 지극히 평범한 미혼 여성일 수도 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한결같이 지금 이 시대를 여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묻고 있는 듯하다. 피해의식으로 가득찬 여성이나 자의식의 과잉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울부짖는 여성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모두 발랄하며 이 시대의 제도나 형식들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공통적이지만 개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을만하다. 새로운 인물형의 창조가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면 소설들은 모두 생의 단면을 통해 그녀들의 삶의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면 될 듯하다.

  또 하나 이 소설에서 주목할 만한, 그리고 가장 큰 장점은 아이러니와 냉소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전의 여성을 다룬 소설들이 개인적 상황과 사회의 억압 구조 속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면에서 이 소설의 인물들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 정이현은 그녀들에 대한 시선을 차갑고 냉정하게 거두어 들인다. 의도적인 방식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온기 없는 시선은 독자들의 동참에 호소하는 면이 있다. 그녀들에게 공감하거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낯설게 바라보거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삶의 부조리를 전하는 듯하다. 결혼에서 사랑보다 더 큰 가치를 믿는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주인공이나 지극히 일상적인 결혼의 과정을 가장 실감나게 그려낸 ‘홈드라마’에서 작가는 가볍고 발랄한 형식으로 그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다른 단편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그것도 깊은 여운과 생의 단면을 찌르는 날카로움이 없다는 치명적인 아쉬움이 남는다. 아직 시작뿐이라는 말로는 갈음하기 어려운 단조로움과 단단하지 문장 구성은 보완되리라 믿는다. 소설가를 등급 매길수 있다면 새로운 소설이 나오면 경우에 따라 선택해야겠다는 등급을 내린 소설가다. 그래도 여전히 신선하고 새로운 소재와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시선을 유지한다면 시간이 그녀의 소설을 말해 줄 것이다.


200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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