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섭이 가라사대
손홍규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소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문학의 종말을 외쳤던 가리타니 고진의 비명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문학은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도 많지만 문학의 그 다양한 장르 중에 여전히 소설이 대표선수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삶의 진정성 때문이다. 과장되고 왜곡된 모습일지라도 당대를 살아가는 혹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성찰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우리는 그런 소설을 찾아 읽어야 할 이유가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내가 아닌 ‘너’를 그리고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소설은 읽혀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를 조망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문학을 통한 방법만큼 ‘진실’에 접근하는 방법도 많지 않다. 허구적 사실을 전제로 한 소설을 통해 문학적, 사회적 진실에 다가가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혹은 객관적 진실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생각해 보자.

  한 작가의 주관적 견해와 평가라 할지라도 당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과 방법은 우리의 그것과 일치할 때가 많다. ‘공감’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있고, 소설이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어떤 측면이든 좋은 소설은 가려진 눈 속의 들보를 치우거나 외면하고 싶었던 현재의 모습, 생의 부조리와 아이러니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깊은 감동과 재미가 전제되어야 한다.

  최근의 소설들 이를테면, <쿨하게 한걸음>, <스타일> 등 이른바 칙릿(Chick-lit)이 주도하는 소설 시장에서 과연 손홍규의 <봉섭이 가라사대>와 같은 책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가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문학적 주제가 항상 진지하고 사회적 관심을 반영해야 한다는 당위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와 사회적 관심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을 토대로 하지 않은 소설이 과연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과 남성의 문제도 아니다. 소설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문제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즐길만한 문화적 도구는 도처에 널려있다. 굳이 소설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봉섭이 처럼 우리 사회의 주류 바깥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만을 다룬다고 해서 좋은 소설인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나는 손홍규의 <봉섭이 가라사대>를 재미없게 읽었다. 작가의 의도와 소설의 주제들이 적절하게 표현되었고 고민의 흔적들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분명하게 전달받았으나 말할 수 없는 미진함이 남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이거나 문학적 감수성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이 소설집에는 열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상식적인 시절’이 책의 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소설적 흡인력으로 독자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의도라는 것이 쉽게 감지된다. 가볍고 경쾌한 유머, 재치 있는 표현들이 작가의 언어적 감수성을 잘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과연 ‘상식’이 있기는 한 것인지 되묻고 있는 반어적 제목도 독자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다. ‘매혹적인 결말’은 소설가가 되기 위한 두 사람의 눈물 나는 일상사가 코믹하게 그려진다. 생존의 문제 너머에서 항상 삶의 의미를 묻고 있는 인간의 존재 양상을 보여준다. 과연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인간에게 ‘인생’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무기 사냥꾼’과 ‘봉섭이 가라사대’, ‘뱀이 눈을 뜬다’, ‘도플 갱어’, ‘푸른 괄호’를 하나의 의미망으로 묶을 수는 없다. 공통점을 찾아내기도 힘들다. ‘붉게 타는 푸른 노을, 달 밝은 비오는 밤도 있지. 노란 적포도주 한잔은 어때. 행복한 가난뱅이, 배고픈 사장님, 모두가 일등이 될 수 있는 나라, 만인을 위한 민주주의, 아름다운 자본주의……’(도플갱어, P. 179)라는 모순된 말장난처럼 세상은 상식과 질서에 의해 모두가 노력한 만큼 댓가를 받고 착하고 바른 사람들이 잘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만 아프게 확인된다. 그것은 특별히 배후 조정자가 있거나 몇몇 나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러한 생의 아이러니와 부조리에 대해 작가는 아직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보다 많은 이야기를 토해내야 할 것 같다.

  마지막의 단 편 세 개는 연작으로 읽힌다. ‘최후의 테러리스트’, ‘최초의 테러리스트’, ‘테러리스트들’이 그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세대라고 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소설가에겐 상상력이라고 하는 무소불위의 칼이 쥐어져 있다. 그것을 어떻게 휘두를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한 결과물들을 우리는 책으로 만난다. 손홍규의 소설이 그런 의미에서는 충분히 읽을 만하고 매력적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다만 깊은 울림이 조금 아쉽다. 개인적인 취향일 수 있으나 지나간 시간에 대한 고통과 좌절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는 오롯이 작가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 역사의 트라우마로 남게 된 ‘광주’를 통해 사람들은 참 많은 말들을 해 왔고, 앞으로도 남은 이야기도 많을 것이다. 그것은 언젠가 사라지고 기억의 저편에서 조금씩 밀려나가겠지만 기억하고 보여주고 살아있는 현재와 연결시키는 작업에 나는 개인적으로 갈채를 보낸다. 잊혀져 가는 과거가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고 껴안아야 할 미래이기 때문이다. 손홍규의 소설들은 그렇게 현재의 고통들이나 과거의 기억들을 걸러내고 쓰다듬고 오래도록 생각나게 한다. 그만큼의 노력과 힘겨움은 문장의 곳곳에 배어 있다.

  조금 아쉬운 것은 앞서 말했듯이 문장들 사이의 긴장감과 전체를 아우르는 탄력이다. 깊이와 넓이를 요구하는 무뢰한 독자가 많을수록 작가에게 더 큰 고통과 더 나은 차기작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소설의 미덕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은 그러나 여전히 독자에게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소설을 열심히 읽을 수밖에 없다.

“왜 그랬어?”
“지겨워서.”
“그게 전부야?”
“우리 모두 서로를 지겨워하면서 이 세상을 견디고 있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보다 나은 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으면서. ……사실은 나 자신이 치욕스러웠어. 내게 재능이 없다는 사실도 싫었고 그런 내게 헛된 열망을 품게 한 세상도 싫었어. 모든 게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어.”   - 최초의 테러리스트, 본문 271페이지.


080504-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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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하이쿠 선집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34
마쓰오 바쇼 외 지음, 오석륜 옮김 / 책세상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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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보.고.싶.다. 이렇게 말해놓고 나면 세상의 모든 말이 아득하게 숨어 버린다. 도대체 더 이상 무슨 긴 말이 필요한가. 유행가의 제목으로도 쓰였듯이 가장 단순하고 명료한 감정 표현만큼 솔직하고 좋은 것은 없다. 구차한 설명과 필요 이상의 말들이 오히려 군더더기가 될 때가 있다. 일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감정들이 당혹스러울 때가 있듯이 내 안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변화나 눈에 보이는 대상을 표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말한다고 해서 내 안의 감정과 생각들이 전달되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서 요설적으로 늘어놓는다고 해서 완전하게 표현되지도 않는다. 정작 길이는 중요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대하소설보다 때때로 전해지는 한 줄의 시가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다. 촌철살인은 문학뿐만 아니라 생활의 곳곳에서 드러나는 자명한 이치를 말해준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짧은 시 하이쿠는 5․7․5의 17자로 만들어진다. 일본어 원문을 읽을 수 없어 번역된 시를 읽어야 하는 아쉬움이 있다. 시는 소리와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소리내어 읽지 못하고 운율을 확인할 수 없어 반쪽짜리 감상밖에 될 수 없어 안타까움이 사라지지 않지만 하이쿠의 맛을 음미해보고 싶은 욕심까지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일본 하이쿠 선집>에는 대표적인 시인 다섯 명의 작품들을 가려 뽑았다. 가쓰오 우동이 생각난다는 아이의 농담에 웃어버렸던 마쓰오 바쇼(1644~1694)의 시 중 몇 편이 마음에 와 닿는다.

산길에 와서
어쩐지 마음 끌리는
제비꽃이네


  사물에 대한 색다른 시선은 시간과 장소의 변화만으로도 가능하다. 산길에 와서 제비꽃에 마음이 끌리는 마음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고요함을 시각과 청각의 절묘한 조화로 이루어낸 하이쿠도 있다.

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소리


  자연에게 마음을 가탁하는 방법은 흔하다. 우리 시인에게도 자주 확인할 수 있는 우울과 쓸쓸함을 뻐꾸기가 대신 전하기도 한다.

우울한 나를
더 쓸쓸하게 하라
뻐꾸기여

  요사 부손(1716~1783)의 하이쿠는 참신하고 색다른 느낌이 전해진다. 익숙한 것에서 느껴지는 놀라운 발견이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겨울나무 숲에서 살아 숨쉬는 나무의 향기는 놀라움이 아니라 생에 대한 작은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도끼질하다
향기에 놀랐다네
겨울나무 숲

죽음 앞에 겸손해지는 모습, 어린 시절에 헤어진 어머니의 대한 그리움을 나타낸 하이쿠가 돋보이는 고바야시 잇사(1763~1827)의 하이쿠는 순간 눈물이 글썽이게 한다.

죽은 엄마여
바다를 볼 때마다
볼 때마다

  이 짧은 형식 안에서도 시구의 반복은 가능하고 그 반복은 어떤 다른 말보다 진한 그리움을 전해준다. 바다를 볼 때마다 죽은 엄마를 그리워하는 시인이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저녁의 벚꽃
오늘도 또 옛날이
되어버렸네


  아쉬움이나 미련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만으로 말할 수 없지만 오늘 떨어진 벚꽃은 완전하게 과거가 되어버린다. 오늘은 어제의 미래였지만 내일의 과거가 된다.

  가와히가시 헤키고토(1873~1937)의 하이쿠 한 편을 더 읽어보자. 순서를 바꿔버리는 표현이 기막히다. 떨어지는 은행잎을 바라보며 젊은 시절 벗을 떠올렸을 텐데 젊을 때 벗을 생각하면 은행잎이 떨어진다고 능청을 떤다. 우연을 필연으로 혹은 익숙한 순서를 뒤집어 버리는 발상의 전환은 누구나 갖고 있는 감각은 아닐 것이다.

젊을 때의 벗
생각하면 은행잎
떨어지누나


  우리나라 시인들의 한 두 줄 짜리 시도 많이 있다. 짧은 길이 때문에 더욱 강렬했고 오래 기억되는 시들도 많았다. 하지만 일본의 하이쿠는 형식적 틀이 고정되었고 그것을 시인이나 독자들이 정제된 미적 가치를 통해 음미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여러 번 읽어가며 하이쿠 밖의 사건들을 짐작하고 상황과 맥락을 상상하는 즐거움은 순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하이쿠 한 편 감상하는 주말도 괜찮을 것 같다.


080426-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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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 문학과지성 시인선 342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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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연휴 특판을 위한 백화점 ㄷ참치 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매장에서는 백화점 직원들이 판매를 하고 나는 지하 2층 창고에서 매장까지 물건을 옮겨 놓는 일이었다. 때때로 선물용으로 배달되는 참치를 들고 배달을 나가기도 했다. 보름간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남는 시간은 지하 창고 불빛 아래 참치 박스들 틈에 작은 공간을 마련하고 책을 보았다. 그 때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었던 책이 바로 오규원의 <현대시작법>이다.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와 시선집 <사랑의 기교>를 보면서 나는 정호승이나 신경림, 황지우와 또 다른 세계를 들여다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규원은 내게 그렇게 특별한 시인이었다. 이후 발간된 시집들은 모두 사 보았지만 이론서들은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그런 시인이 작고 한 지 벌써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시집 <두두>가 나왔다.

그대와 산
― 서시

그대 몸이 열리면 거기 산이 있어 해가 솟아오르리라, 계곡의 물이 계곡을 더 깊게 하리라, 밤이 오고 별이 몸을 태워 아침을 맞이하리라


  시집을 왜 사서 읽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문법전공 국문과 교수처럼 시는 늘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서 있다. 오규원의 시는 더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시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 무색한 오규원의 짧은 시들은 인식 이전의 차원을 보여준다. 언어가 보여줄 수 있는 한계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인의 마지막 목소리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맑고 깨끗한 이슬과 같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물과 자연의 변화는 시인에게 단순히 경외와 감탄을 자아내지 않는다. 지금 거기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를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언어가 보여주는 장면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점에 따라 선택된 장면이고 선택된 언어에 따라 다르게 보여질 뿐이다. 객관적 거리와 표현은 불가능하다. 그것에 도전하는 무모함을 보여주는 시들은 절대 아니다. 시인은 그저 자신의 눈에 비친 풍경들을 간결한 언어의 세계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읽어내는 독자의 마음에 그려지는 하나의 이미지는 이미 시인의 그것과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4월과 아침

나무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잎들이
와르르 태어나
잠시 서로 어리둥절해하네
4월 하고도 맑은 햇빛 쏟아지는 아침


  시간은 정지해 버린 듯 멈춰 있지만 4월과 아침은 교묘한 눈빛을 교환하며 4월의 아침이 빚어내는 장면을 고스란히 정지시킨다. 사진조차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오규원의 시들은 단순한 정지화면만을 보여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산과 길

여러 곳이 끊겼어도
길은 길이어서
나무는 비켜서고
바위는 물러앉고
굴러 내린 돌은 그러나
길이 버리지 못하고
들고 있다


  시집의 제목인 ‘두두(頭頭)’와 물물(物物)은 두두시도(頭頭是道), 물물전진(物物全眞)이라는 선가(禪家)의 말에서 시인이 빌려온 것으로,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도이며,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라는 의미라고 한다.

식빵과 소리

식빵을 얇게 썰어
살짝 굽는다
한 조각 위에
버터를 바르고
한 조각을 덧씌워
종이 냅킨으로 감싸 쥔 뒤
아, 하고
입 가득 넣고 깨문다

바싹!

오후
그리고
4시

  동작과 행위들까지 정지해 버리는 시간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미지의 적막을 깨는 소리가 들린다. 바싹! 긴 여운이 남는 소리는 아지만 오후 4시에 들려오는 ‘소리’는 순간 또다시 적막 속으로 사라진다. 이 시집은 크게 ‘두두’와 ‘물물’로 나뉘어져 있다. 유고시집의 특성상 끊임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인의 목소리를 연상하자니 죽음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존재의 무(無)로 돌아간 시인과 유작으로 남은 시들이 던지는 화두는 무겁거나 진지하지는 않다. 시인의 의도였는지 알 수 없으나 의미를 넘어서 존재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깨닫거나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자는 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명징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지극히 단순하고 깨끗하게!

고요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
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 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고요의 위와 아래를 생각하다가 장미 한 송이가 지고 있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고요하지 않은 세계의 이편에서 고요한 세계의 저편으로 건너 간 버린 시인이 남긴 고요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소란스런 삶의 세계와 대비되는 적막한 죽음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구멍 속으로 사라진 시인이 그립다. 그 구멍은 물론 바닥이 보이지 않을 것이고, 모든 것들은 사라지는 구멍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그의 목소리를, 그의 시를 볼 수 없다는 아쉬움보다 그가 남겨 놓은 시들을 다시 꼼꼼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가 남겨놓은 빈 자리는 작은 구멍 하나만큼 비워 놓고 싶다.

구멍 하나

구멍이 하나 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지나가는 새의 그림자가 들어왔다가

급히 나와 새와 함께 사라지는 구멍이 하나 있다

때로 바람이 와서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둘이 모두 자취를 감추는 구멍이 하나 있다



080327-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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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8-03-28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에게 마침 필요한 시들! 보관함 냉큼 들어갑니다.
그런데 대단하세요, 그 힘든 알바 중에 짬을 내어 시집 읽으셨다니. :)
 
완득이 - 제1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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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의 본질은 소통과 전파에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사람들에 의해 가감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쳐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집단 전체의 지혜가 고스란히 다음 세대로 전해지기도 한다. 구전문학은 그렇게 제 기능과 역할을 다하며 공동체의 무의식을 반영하기도 했고 교육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구전 문학이 기록 문학으로 정착되고 집단 창작에서 개인 창작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야기는 글을 통해서 즉 책을 통해서만 유통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의 기능과 역할이 축소 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사회 시스템 전체가 자본의 논리에 의해 가동된다는 사실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창조적이고 흥미 있는 이야기는 문화산업의 이름으로 소설로 창작되거나 영화, 게임의 스토리가 되기도 하며 거대한 부를 창출한다. 그러니 현대 사회에서 이야기는 돈이라는 명제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사라져 가는 시대에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일까? 그들을 위한 사색과 고민은 넘쳐나는 듯 하지만 정말 알맹이는 없다. ‘고교생이 읽어야할~’로 시작되는 시리즈나 ‘논술대비를 위한~’로 시작하는 수험생들의 불안감을 조장하는 자극적인 문구들은 일제강점기 근대 단편 소설이거나 유명 작가들의 대표작들 모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소년들 스스로 주체가 되어 고민하고 선택하고 방황하며 정체성을 찾아야하지만 그것을 다루고 있는 책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대입제도에는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관심이 많지만 어떤 길을 가야할 것인지, 그들의 고민과 꿈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은 아주 적다. 네모난 빵틀에 구워진 빵들처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시간에 등교해서 똑같은 책을 펴고 똑같은 공부를 하고 똑같은 꿈을 꾼다. 자본주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썰매를 끄는 개처럼 헐떡이며 무한질주의 고통스런 생활이 오늘도 이어진다.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편견 같지만 큰 틀은 손대지 않고 그 안에서 그들은 사소한 즐거움과 어이없는 고민들을 할 때가 많다.

  아니 어쩌면 제도권 안에서 움직여지고 경쟁의 대열에 서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김려령이 그려낸 <완득이>처럼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점점 남의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제1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다운 이 소설은 청소년들에게 읽힐 만하다. 고민의 폭이 깊고 진지하며 대상이 뚜렷하고 폭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장이 아버지와 외국인 어머니를 둔 완득이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 어머니조차 얼굴도 모른 채 살아왔다. 고등학생으로 설정된 완득이는 말하자면 사회의 소수자다. 어른의 몸과 아이의 지능을 가진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삼촌과 아버지는 춤을 추며 생계를 꾸려가기도 하고 장터에서 물건을 팔기도 하며 지하철에서 구두 깔창을 팔다가 쫓겨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완득이가 살고 있는 옥탑방 건너편엔 담임 똥주가 산다. 소설의 첫 장면은 교회에서 완득이가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일주일 안에 담임을 죽여달라는 기도이다.

  시종일관 담임 똥주와 완득이의 관계는 유쾌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똥주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교사의 말투와 행동은 아니다. 욕도 잘하고 지독한 반어와 역설로 학생들을 비꼬기도 하며 끊임없이 완득이를 괴롭게 한다. 그 괴롭힘은 물론 완득이의 입장에서다. 두 옥탑방을 중심으로 완득이와 똥주가 만들어내는 인간적인 관계가 이 소설의 중심 축이다.

  완득이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삼촌은 완득이의 배경이다. 같은 반 여학생 정윤하는 완득이와 다른 모범생이며 공부도 일등이다. 윤하를 완득이 옆에 세우는 작가의 의도가 눈에 띠게 노골적이고 담임 똥주에게 부자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가난은 장식에 불과하다는 설정이 다소 작위적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고민의 폭은 완득이의 불우한 환경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인 거시적 관점으로 확대된다. 이주 노동자 문제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 입시를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학교 교육의 현실, 기성세대의 편견 등 다양한 관점들이 서로 얽혀 있지만 청소년들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도록 경쾌하고 발랄한 문장과 표현이 유지된다는 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다.

  킥복싱을 배우게 되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는 완득이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이기지 못한다. 싸움이라면 자신 있는 완득이에게 사각의 링은 또 다른 하나의 세계이다. 정해진 규칙과 룰이 엄존하는 현실의 축소판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극복해내는 과정이 완득이가 성장하는 과정일 것이고 이 사회에 편입되는 통과의례일 것이다.

  이 소설은 청소년 성장 소설이라는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일상에서 벗어나 있는 청소년에 대한 관심과 어쩌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느 학교에나 오늘도 맨 뒷자리에서 엎어져 자고 있는, 학교를 그만두고 담장 밖에서 길을 잃어버린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있는 소설이다. 다양한 관심과 그들의 고민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만만하거나 단순한 고민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지 않다. 성적과 대학만이 지상 과제일 때도 있겠지만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당연히 갖게 되는 성장통을 앓고 있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민으로 밤을 새우기도 한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그리움이나 사랑, 이별과 죽음, 삶의 이유와 방향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벌써 그 시절을 잊어버린 어른만의 생각일 뿐이다. <완득이>는 불과 얼마 전에 겪었던 우리들 유년의 기억을 되새기며 청소년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책이며 무엇보다도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위해 청소년들이 꼭 읽을 만한 소설이다.


080325-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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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게 한걸음 -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서유미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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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작가는 비평가를 여름날 소 잔등에 달라붙는 파리에 비유했다. 소의 입장에서 보면 귀찮고 짜증나는 무익한 존재라는 뜻이다.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는 적당한 긴장과 거리가 필요하다.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독려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 비평이다.

  한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공론의 장에 펼쳐진다. 어떤 의도로 왜 쓰였는지 오로지 작품으로만 말하는 것이 작가의 숙명이다. 평론가가 아닌 일반 독자의 평가는 그래서 더 두려운 법이다. 물론 전문적인 식견이 없거나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작가와 작품을 평가할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독자의 평가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믿을만한 출판사 중 하나인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이란 타이틀을 단 서유미의 소설 <쿨하게 한걸음>을 단숨에 읽었다. 이 작가는 작년에 ‘제5회 문학수첩 작가상’까지 받으며 주목받는 신인으로 떠올랐다.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소설은 고급한 장르가 아니다. 탄생부터 지금까지 그래왔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 애정과 관심을 갖게 되는 장르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당황스러웠다. 믿을만한 출판사의 책이기도 하거니와 거창한 타이틀까지 붙었으니 지나치게 기대를 한 것은 순전히 내 탓이다. 하지만 읽어나가면서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은 없습니다’라고 하면 안되나?

  서른 셋이라는 나이를 모티브로 출발한 이 소설은 계속해서 서른 셋인 주인공과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서른 셋으로 끝을 낸다. 사실 소설이 특정 나이나 주인공, 혹은 소재나 이야기 측면에서 진부할 수도 있고 더듬거릴 수도 있다. 문제는 감동이다. 가슴으로 전해지는 느낌이 없다면 지적 호기심이나 자만감을 부풀릴 수 있을만큼 포만감을 안겨줘야하는 것은 아닐까?

  나른한 일요일 오후에 할 일 없어 켜놓은 TV의 재방송 단막극 드라마같은 느낌이었다면 작가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것일까? 신산스런 고통의 산물인 작가의 작품을 무참하게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소설을 읽고 나면 입맛이 쓴게 아니라 화가 난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애인과 헤어진 주인공 연수는 인수합병 절차를 거치는 회사에 사표를 던진다. 삼심대 싱글의 특권은 그것으로 끝이다. 다니던 대학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다가 공립도서관에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대학 동기를 만난다. 오랜 친구들은 조연의 역할을 한다. 네버랜드의 피터 팬에서 웬디가 되어버린 선영과 뒤늦게 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민경과 공부는 못했지만 빼어난 미모로 부자와 결혼한 사촌 연재 등 서른이 아니라 서른 셋이라는 확실한 삼십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설이다.

  이십대 청춘의 저쪽에서 환멸스런 현실을 피할 수 없는 나이로 진입하는 서른 셋 친구들의 다양한 모습들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사춘기는 아련한 추억이지만 생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주인공은 삶은 현실이다. 생에 대한 따뜻한 애정보다 답답한 현실을 견뎌야만 하는 친구들의 모습은 다분히 현실적이다. 영화에 관한 공부를 다시 시작하며 늙어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돌아보고 친구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작가는 일정부분 성공을 거둔 듯하다.

  무언가 기다리는 독자에게 작가는 끝까지 현재 상황과 여러 친구들의 삶을 통한 현실의 지겨움과 밥벌이의 고달픔과 뒤늦은 성장통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래서? 도대체 소설에서 무엇을 기대하느냐고? 그것은 가슴 시린 통증과 울림이거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슬픔이거나 미친듯이 킥킥거릴 수 있는 재미이거나 철학적 깨달음을 주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적어도 이 소설에 대한 나만의 느낌이라면 다행이겠다.

  이제 문학상도 출판사도 믿을 수 없는 카라타니 고진의 말을 패러디 하자면 ‘소설의 종언’에 대해 이야기할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극단적인 비유겠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인간은 ‘이야기’ 없이 살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 고민하는 수많은 작가들을 바라보는 독자들의 기다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작가들이여 힘내시라. 여기 언제든 소설에 환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자가 있으니 말이다. 이기적이지만 그래서 난 될 수 없는 작가보다 언제든 가능한 독자를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08031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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