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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섭이 가라사대
손홍규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소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문학의 종말을 외쳤던 가리타니 고진의 비명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문학은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도 많지만 문학의 그 다양한 장르 중에 여전히 소설이 대표선수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삶의 진정성 때문이다. 과장되고 왜곡된 모습일지라도 당대를 살아가는 혹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성찰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우리는 그런 소설을 찾아 읽어야 할 이유가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내가 아닌 ‘너’를 그리고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소설은 읽혀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를 조망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문학을 통한 방법만큼 ‘진실’에 접근하는 방법도 많지 않다. 허구적 사실을 전제로 한 소설을 통해 문학적, 사회적 진실에 다가가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혹은 객관적 진실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생각해 보자.
한 작가의 주관적 견해와 평가라 할지라도 당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과 방법은 우리의 그것과 일치할 때가 많다. ‘공감’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있고, 소설이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어떤 측면이든 좋은 소설은 가려진 눈 속의 들보를 치우거나 외면하고 싶었던 현재의 모습, 생의 부조리와 아이러니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깊은 감동과 재미가 전제되어야 한다.
최근의 소설들 이를테면, <쿨하게 한걸음>, <스타일> 등 이른바 칙릿(Chick-lit)이 주도하는 소설 시장에서 과연 손홍규의 <봉섭이 가라사대>와 같은 책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가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문학적 주제가 항상 진지하고 사회적 관심을 반영해야 한다는 당위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와 사회적 관심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을 토대로 하지 않은 소설이 과연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과 남성의 문제도 아니다. 소설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문제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즐길만한 문화적 도구는 도처에 널려있다. 굳이 소설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봉섭이 처럼 우리 사회의 주류 바깥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만을 다룬다고 해서 좋은 소설인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나는 손홍규의 <봉섭이 가라사대>를 재미없게 읽었다. 작가의 의도와 소설의 주제들이 적절하게 표현되었고 고민의 흔적들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분명하게 전달받았으나 말할 수 없는 미진함이 남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이거나 문학적 감수성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이 소설집에는 열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상식적인 시절’이 책의 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소설적 흡인력으로 독자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의도라는 것이 쉽게 감지된다. 가볍고 경쾌한 유머, 재치 있는 표현들이 작가의 언어적 감수성을 잘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과연 ‘상식’이 있기는 한 것인지 되묻고 있는 반어적 제목도 독자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다. ‘매혹적인 결말’은 소설가가 되기 위한 두 사람의 눈물 나는 일상사가 코믹하게 그려진다. 생존의 문제 너머에서 항상 삶의 의미를 묻고 있는 인간의 존재 양상을 보여준다. 과연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인간에게 ‘인생’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무기 사냥꾼’과 ‘봉섭이 가라사대’, ‘뱀이 눈을 뜬다’, ‘도플 갱어’, ‘푸른 괄호’를 하나의 의미망으로 묶을 수는 없다. 공통점을 찾아내기도 힘들다. ‘붉게 타는 푸른 노을, 달 밝은 비오는 밤도 있지. 노란 적포도주 한잔은 어때. 행복한 가난뱅이, 배고픈 사장님, 모두가 일등이 될 수 있는 나라, 만인을 위한 민주주의, 아름다운 자본주의……’(도플갱어, P. 179)라는 모순된 말장난처럼 세상은 상식과 질서에 의해 모두가 노력한 만큼 댓가를 받고 착하고 바른 사람들이 잘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만 아프게 확인된다. 그것은 특별히 배후 조정자가 있거나 몇몇 나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러한 생의 아이러니와 부조리에 대해 작가는 아직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보다 많은 이야기를 토해내야 할 것 같다.
마지막의 단 편 세 개는 연작으로 읽힌다. ‘최후의 테러리스트’, ‘최초의 테러리스트’, ‘테러리스트들’이 그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세대라고 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소설가에겐 상상력이라고 하는 무소불위의 칼이 쥐어져 있다. 그것을 어떻게 휘두를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한 결과물들을 우리는 책으로 만난다. 손홍규의 소설이 그런 의미에서는 충분히 읽을 만하고 매력적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다만 깊은 울림이 조금 아쉽다. 개인적인 취향일 수 있으나 지나간 시간에 대한 고통과 좌절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는 오롯이 작가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 역사의 트라우마로 남게 된 ‘광주’를 통해 사람들은 참 많은 말들을 해 왔고, 앞으로도 남은 이야기도 많을 것이다. 그것은 언젠가 사라지고 기억의 저편에서 조금씩 밀려나가겠지만 기억하고 보여주고 살아있는 현재와 연결시키는 작업에 나는 개인적으로 갈채를 보낸다. 잊혀져 가는 과거가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고 껴안아야 할 미래이기 때문이다. 손홍규의 소설들은 그렇게 현재의 고통들이나 과거의 기억들을 걸러내고 쓰다듬고 오래도록 생각나게 한다. 그만큼의 노력과 힘겨움은 문장의 곳곳에 배어 있다.
조금 아쉬운 것은 앞서 말했듯이 문장들 사이의 긴장감과 전체를 아우르는 탄력이다. 깊이와 넓이를 요구하는 무뢰한 독자가 많을수록 작가에게 더 큰 고통과 더 나은 차기작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소설의 미덕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은 그러나 여전히 독자에게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소설을 열심히 읽을 수밖에 없다.
“왜 그랬어?”
“지겨워서.”
“그게 전부야?”
“우리 모두 서로를 지겨워하면서 이 세상을 견디고 있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보다 나은 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으면서. ……사실은 나 자신이 치욕스러웠어. 내게 재능이 없다는 사실도 싫었고 그런 내게 헛된 열망을 품게 한 세상도 싫었어. 모든 게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어.” - 최초의 테러리스트, 본문 27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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