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즘 - 철학.정치 편 - 인간이 남긴 모든 생각
박민영 지음 / 청년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도대체 네 정체가 뭐냐?”라고 물어볼 때조차 우리는 무의식에 내재된 플라톤의 현상과 본질의 문제를 끄집어 내는 것이다. 이원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세상을 해석하고자 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고민은 여전히 유효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까지 전개된 모든 서양 철학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차지하더라도 우리에게 직면한 삶의 문제는 시대의 변화 속도와 눈부신 발전에 발맞춰 해결됐다고 보기 어렵다.

  지금까지 인간이 해왔던 모든 생각의 흔적을 우리는 이즘ism이라 부른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은 앞선 시대를 정리하고 그 시대정신zeitgeist을 한마디로 명명하고 싶어하는 범주와 구별의 본능을 발휘한다. 우리는 그것을 이즘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인간의 체계적 사유의 산물이 바로 우리가 사용하는 이즘이다.

  박민영의 <이즘>은 곁에 두고 오래 참고할 만한 책이다. ‘인간이 남긴 모든 생각’이라는 부제에 어울리는 책이다. 철학과 정치편으로 나온 이 책의 다음도 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면 이 책은 성공적이다. 저자는 저술가로서 갖추어야할 꼼꼼함과 부지런함 그리고 자기 판단과 신념까지 갖추고 있다고 감히 평가할 수 있겠다. 세상에 객관적인 생각이 불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나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해 자신의 방식으로 정리해할 필요성을 느낀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성격을 반영하고 사회적 성격은 사회경제적 조건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에리히 프롬의 말은 이즘의 사회적 역할을 잘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역도 성립한다. 사회경제적 조건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즘은 하나의 문화현상이나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조건을 규정하는 말이고 이 말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이 달라지며 사회가 변화 발전하기도 한다.

  그것을 알지 못한 몽매한 현실 정치인들, 관료들, 언론들의 작태는 2008년 ‘촛불집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계층의 견해차에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이렇게 쏟아지는 장대비가 대한민국의 이즘을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현실에 복무하지 못하는 모든 이즘은 가라. 저자의 말대로 이즘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세계를 보는 나를 보는 일’이기도 하다.

  경제학자 하이예크는 이런 말을 했다. “이론화되지 않은 사실은 침묵한다.” 이 말을 이즘과 연관시켜 이해하면, 어떤 사물이나 사건은 ‘이즘’이라는 ‘체계화된 이론’ 속에서만 그 존재와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다는 말이 된다. 이즘은 그 자체로 체계를 갖춘 하나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다.

  머리말에서 인용한 하이예크의 말이 이 책의 의미를 함축한다. 또한 저자는 이즘을 ‘관계의 산물’이라고 표현했다. 당대 사회적 조건과의 관계, 이전 역사와의 관계, 다른 이즘과의 관계 속에서 탄생한 이즘을 이해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조건과 인류의 역사, 사회, 문화, 경제적 조건을 이해하는 고도의 정신 작용이다. 단순하지 않은 작업을 시도한 박민영의 노고에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남는 의문과 미진함은 무궁무진하다. 부록에 정리되어 있는 이즘 일람과 이즘 연표, 그리고 참고문헌을 뒤적이며 평생을 보내고 싶은 욕망! 한 개인의 생각이 반영된 이즘은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고 할 수 없지만 인류의 사상사를 일괄할 수 있다는 무임승차의 특권이 주어진다. 많이 팔릴 수 없는 책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책은 이런 책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철학편에서 경험론을 시작으로 계몽주의, 공리주의, 구조주의, 니힐리즘, 데카르트주의, 마르크스주의를 거쳐 칸트주의, 플라톤주의, 합리론, 해체주의, 헤겔주의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정치편에서는 공동체주의와 공화주의를 시작으로 관료주의 군국주의, 나치즘, 마오주의, 마키아벨리즘, 매카시즘을 거쳐 아나키즘, 유토피아주의, 자유주의, 파시즘, 페이비어니즘에 이르는 이즘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생각하고 표현하고 지향하는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전망은 늘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 개인과 사회가 조화와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이다. 역사는 발전한다는 진화론적 관점은 아니어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보다 다른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기준점을 설정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 이즘에 대한 성찰은 필요하다. 관계의 산물이라고 하는 것도 사회와 사회와의 관계라기보다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떠오르게 한다. 새로운 사상과 가치를 내세우고 있지 않고 과거의 이즘에 대해 정리하는 데 충실하지만 그 자체로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정리된 생각들은 현재를 돌아보고 과거를 성찰하며 미래를 지향할 수 있는 이즘의 새로운 발견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우리 눈앞에 펼쳐진, 전개되고 있는 이즘에 대해 다시 고민해 볼 시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어떤 이즘으로 평가 받을 수 있을까, 먼 미래에.


080705-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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