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황당한 영화를 마주할 때가 있다. 호기심에 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눈길 끌기용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 마련이다. 프랭크도 그럴 줄 알았다. 우연히 한 방송에서 이 영화를 소개하는 장면을 보았다. 큰 인형 탈을 뒤집어쓰고 노래 부르는 인간. 요즘 유행하는 부케인가? 음악이 취미인 직장인 존. 그렇다고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어 꾸역꾸역 일터를 향하지만 마음은 늘 딴 곳에 가있다. 우여곡절 끝에 황당한 사건으로 한 밴드에 키보디스트로 합류하게 되고, 그곳에서 운명처럼 프랭크를 만난다. 다행히 자신과 음악적 지향이 맞아 일까지 팽개치고 음악에 몰두하지만 그렇다고 순조롭게만 진행된다면 어떤 관객이 보겠는가? 적당한 고난과 역경을 양념처럼 곁들여야지? 그러나 감독은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고 구렁텅이로 계속 몰아붙이는데. 끝내 정체를 밝히지 않을 것 같았던 프랭크도 탈을 벗지만 찜찜한 기분은 감추기가 어렵다. 음악은 더 나아가 예술은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인가? 단순한 자기만족인가? 아니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관객이 있어야 하는가? 이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 젊은 생을 마감한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스포삼아 알려드리자면 기괴한 노래가 난무하는 이 영화에 단 한 곡의 정상적이며 감미로운 곡이 숨겨져 있다. 이걸 찾는 재미만으로도 볼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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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우유는 왜 지금까지 아이스크림을 만들지 않았을까? 


서울우유의 오래된 팬이다. 체질상 우유가 맞지 않아 먹으면 설사를 하곤 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서울우유를 마시고 나서는 이 증상이 사라졌다. 혹시 모든 우유에 면역이 생겼나 싶어 다른 제품을 섭취하면 역시나. 서울우유에서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순간 무릎을 딱 쳤다. 어머 이건 꼭 사 먹어봐야 해. 바닐라. 딸기, 바나나, 초콜릿 네 종류가 나왔는데 나는 무조건 바닐라. 같은 아이스크림으로 무려 세 개를 주문했다. 재미있는 건 흰 우유라고 표기한 점이다. 오히려 더 정감 있고 좋았다. 우유하면 서울이니까. 


맛은 기대이상이었다. 다른 바닐라 아이스크림에서 느껴지는 텁텁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우유를 그대로 농축해 놓은 듯 한 맛이랄까?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우유의 함량이 높으니까. 그래서 이름도 흰 우유인가? 더불어 쫀득쫀득함이 매력적이다. 젤라또 같다고나 할까? 한 팩에 8천 원정도하니까(소매가는 다를 수 있다) 다소 비싸지만 어차피 아이스크림은 주식이 아니니까. 양보다 질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서울우유 아이스크림을 선택하겠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서울우유는 왜 지금까지 아이스크림을 만들지 않았을까? 우유를 만드는 회사니 한번쯤 생각해보았을 법 한데. 무려 1937년부터. 여하튼 뒤늦게나마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열심히 먹을테니 지금 이 맛 변치말고 계속 생산부탁드려요.


사진 출처 : https://blog.naver.com/galled/222082400274


* 이 글은 해당 업체를 포함한 어떠한 단체나 기관의 후원 없이 썼습니다. 직접 사서 먹어보고 정보차원에서 올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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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AC와 직류DC


테슬라 보기 전 예습용으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대게 과학자들 덕이 크다. 실제로 산업혁명 이전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예 상태로 지냈다. 극히 소수만이 권력자 내지 지배세력이 되어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만약 동력장치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혹은 막았다면 문명사회는 영 열리지 못했을 것이다. 기차가 등장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이동이 가능해지면서 비로소 평등에 대한 열망은 실현가능해졌다. 전기는 또 다른 세상을 열었다. 밤을 없애고 세상을 언제나 대낮처럼 밝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새로운 에너지원이 되어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냉난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흥미로운 사실은 이미 전기의 탄생은 예견되어 있었다. 수많은 과학자와 사업가들이 달라붙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대표주자는 바로 에디슨과 웨스트하우스였다. 두 사람은 자시의 이름을 딴 기업대표로 명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여론은 에디슨 편이었다. 이미 발명왕으로 널리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웨스팅하우스의 교류방식이 위험하다고 계속 경고를 날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류 전기를 이용하여 말을 죽이고 다 나아가 교수형에 처해진 살인자를 죽이기 위한 살인의자까지 만들었다. 역사는 에디슨의 손을 들어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때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가 테슬라다. 에디슨 회사에 있다 의견이 맞지 않아 나온 테슬라는 교류방식의 문제를 해결하며 웨스팅하우스와 합작을 하게 된다. 위험이 사라지고  효율적인데다가 값도 저렴한 교류방식을 마다할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영화는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에 초점을 맞추어 전기 공급 표준방식을 둘러싼 논쟁을 다룬다. 상대적으로 테슬라의 비중이 적어 매우 아쉽다. 사실 웨스팅하우스는 과학자는 아니었다. 돈 많은 사업가에 불과했다. 에디슨과 테슬라의 대결에 집중했다면 훨씬 박진감이 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주인공을 연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다. 아무리 빼어난 명연을 펼쳐도 소용없는 이유는 그가 영국인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형적인. 죽었다 깨나도 미국의 영웅이 될 수는 없다. 대체 제작자는 무슨 생각으로 그를 캐스팅한 것인가? 주제가 워낙 흥미로워 끝까지 보기는 했지만 내내 찜찜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리뷰를 올리는 까닭은 곧 개봉하는 <테슬라(2020년 10월 21일)>를 관람하기 전에 예습삼아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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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명하고 잘 알려진 작가인데 어디서 감히 어린놈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크게 충격을 받은 소설은 <태백산맥>이다. 여름밤 식은땀을 흘리며 읽었다. 단지 감동을 받아서라기보다는 특정 내용이 당시 내가 겪었던 상황과 흡사해서다. 좋은 글은 독자들의 공감을 극대화시켜야 하는데 이 소설이 그랬다.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이 글에서 벗어나 살아서 꿈틀대며 펄떡거렸다.


조정래가 구설수에 올랐다. 자신의 발언에 비판을 가한 진중권에게 사과요구를 한 것이다. 법적 책임까지 묻겠다고 했다. 자세한 내용은 관련 기사들을 참고하시면 된다. 가만있을 진 씨가 아니다. 기다렸다는 듯 재반격에 나섰다.


“ 진 전 교수는 이날 오후 페이스 북에 올린 글에서 “한 가지 당혹스러운 것은 자신을 ‘대선배’라 칭하고 '사회적 지위를 내세우며 ‘무례와 불경’을 말한다는 것”이라며 “자신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여기는 이 권위의식이 저를 매우 불편하게 한다”고 했다.


그는 “법에 호소하는 것은 그의 권리이니 존중해 드린다”며 “저는 이 진흙탕에 빠지지 않고, 이 문제를 역사철학에 관한 학문적 논쟁으로 승화하는 길을 택하겠다. 독일에서 있었던 ‘역사학자 논쟁’(Historikerstreit)이 좋은 모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출처 : 조선일보 2020. 10. 15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진중권은 소설을 안 읽기로 유명하다. 꾸며낸 이야기에 흥미가 없기 때문이란다. 개인의 자유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조정래와의 논쟁이 마치 소설가의 패배로 비쳐질까 두렵다. 그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기 때문이다. 조정래의 시비 거는 방식은 너무도 졸렬했다. 내가 이렇게 유명하고 잘 알려진 작가인데 어디서 감히 어린놈이라는 의식이 짙게 깔려 있다. 어차피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지만 못내 씁쓸하다. 무례와 불경이라니그게 작가가 할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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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서 안되는 게 아니라 능력이 없어서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음악이면 일단 반은 눈감아준다.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음악은 남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래 하나로 기억되는 경우도 꽤 된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음악에 비해서는 형편없이 비중이 적지만 야구를 짧게 다루기만 해도 평가를 달리한다. 허무맹랑한 <내추럴>을 보면서도 쾌감을 느꼈을 정도니까. 참고로 이 영화의 야구 장면은 최악이다. 홈런을 친 볼이 조명에 맞으며 불꽃놀이가 벌어진다. 어렸을 적 극장에서 관람하면서도 허무맹랑했던 기억이 난다.


<야구소녀>를 보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여자가 야구를 하는 영화다. 소재 자체가 특이한 건 아니다. 여자도 야구를 하고 있으며 심지어 국제대회까지 있다. 그러나 프로야구에서 여자가 야구를 하는 사례는 단 한건도 없다.보다 역사가 긴 미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이런 편견(?)에 맞서 싸운다. 실제로 여자가 프로에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다. 1996년 규정이 바뀌어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왜? 안타깝지만 실력이 달리기 때문이다. 동일한 잣대를 기준으로 선발했을 때 남자선수의 능력을 뛰어넘는 여자는 나오지 않았다. 곧 여자라서 안되는 게 아니라 능력이 없어서다.


감독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강박적인 패미의 서사를 거부하고 그렇다고 어설픈 감동도 짜내지 않는다. 극히 사실적으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동병상련을 앓았던 코치와의 만남을 계기로 목표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성장스토리로 몰아간다. 이 부분이 크게 와 닿았다. 주인공 주수인 역을 맡은 이주영은 당차면서도 섬세하게 스스로를 잘 표현하고 있다. 동시에 갈등의 축이었던 엄마 염혜인도 인생 연기를 선보인다. 다만 비시즌 기간에 촬영하여 야구 자체의 극적인 재미는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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