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말을 기사거리로 만들어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는 말은 거짓이다. 립서비스다. 실제로 점점 늙어가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노인들이 제 역할을 해내는 뉴스를 보면 기운이 난다. 그래, 죽기 전까지는 그래도 쓸모가 있구나. 차기 국정원장 예정자인 박지원씨도 그 중 한명이다. 간간이 토론회에서 발언하는 그를 보면 재치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일단 그는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다. 그리곤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린다. 그 펀치는 대게 자신이 가동한 이른바 휴민트에서 뽑아낸 따끈따끈한 정보에 기반하고 있다. 인맥이 두터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아니냐, 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물론 네트웍을 쌓는 일도 보통은 아니다)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적재적소에 써먹을 줄 아는 이는 매우 드물다. 게다가 그는 고령이다.


최근 관심을 갖고 보는 분은 김종인씨다. 이 당 저당 옮겨 다니며 책사노릇을 했는데 이번엔 통합당이다. 이런저런 비난도 많지만 뭔가 필요하니까 자꾸 불러내는 것 아니겠는가? 여하튼 그의 장기는 말솜씨다. 세련되었다는 게 아니라 대중들이 듣고 싶어할만한 말을 짧지만 분명하게 전달하는 능력이 있다. 한마디로 자신의 말을 기사거리로 만드는 재주가 탁월하다. 


예를 들어 차기 대선 주자로 백종원 같은 분을 언급한 것은 대히트였다. 속내는 백씨처럼 친화적이며 전문성을 갖춘 후보를 키우자는 것이었지만 그건 아무 상관이 없다. 반응이 크면 그만이다. 메타포(은유)를 제대로 활용한 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와 김현미 국토부 장관을 향해 능력 없으면 그만두라고 발언한 것을 듣고도 속이 뻥 뚫렸다. 무수한 대책이 결국 졸속이었고 그 이유는 인사권자의 무능력 때문임을 다이렉트로 폭로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현 대통령을 겨냥한 선전포고다. 이밖에 박원순 서울시장 장례 기간 중 차기 보궐선거를 말한 것도 신의 한수였다. 당의 결집도를 높이고 대중의 관심을 확 끌어당기는 묘수였다. 비록 장중에 그런 말을 한 것이 다소 논란은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더욱 주목을 끌었다. 


물론 이 모든 발언은 당을 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발판이다. 곧 본인의 위상을 높이고 키우기 위해 견제구를 던지고 상대의 사인을 훔치고 오더를 계속 변경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어찌 보면 더러운 정치비지니스지만 핵심은 여든이 넘은 분이 주도한다는 데 있다. 적어도 이 두 분에게 나이는 정녕 숫자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상한 궁금증 


때로는 사진 한 장이 논문 수백 편을 능가하는 진실을 보여줄 때가 있다. 박원순 전 시장의 장례식장에서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한 기자의 질문에 화가 났다. 당 차원의 성추행 대응방안을 물었기 때문이다. 그는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역정을 낸 후 한참이나 쏘아보았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후레자식”


진영논리에 따라 받아드리는 감정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이상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도 있다. 과연 기자는 대표가 쏘는 레이저에 눈을 내리깔았을까? 아니면 끝까지 녹음기를 손에 쥔 채 당당하게(?) 마주 쳐다보았을까? 다행히 내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결과물을 발견했다. 나는 기자의 손을 들어주겠다. 그는 자신의 할 일을 했다. 반면 이해찬 대표는 자살골을 넣고 말았다. 정치인은 자신이 대중에게 어떻게 비쳐지는지 늘 신경을 써야 한다. 


사진 출처 : 민중의 소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대학을 졸업하고 이른바 이름 있는 학교 순으로 대기업에 들어가고 고시출신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여 오래오래 잘 막고 잘 사는 시대는 끝이 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지금은 즉시전력을 요구하는 시대다. 곧 사람을 키워 그 인맥을 이용하여 적당히 구워삶아 부를 축적하는 대신 당장 써먹을 능력이 없으면 도태된다. 그나마 정치계나 검찰이나 법원 정도가 여전히 구태에 빠져있기는 하지만. 군도 상황은 비슷하지만 나름의 특수성이 있으니 예외로 치자.


에스비에스 <집사부 일체>에 카카오 프랜즈 사장이 나온 에피소드를 얼핏 보았다. 그는 사원을 뽑을 때 테크 트리Tech Tree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다. 어떤 기술적 경로를 거쳐 왔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2000년 이후 태어난 아이들은 휴대폰과 함께 성장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늘 곁에 있었다. 마치 일상처럼. 과거 피씨를 하며 밤을 새우던 이들은 중년이 되어 게임업체의 사장이 되었다. 이 두 세대는 과거와 달리 연대가 가능하다. 놀이에 몰두하는 게 일이 되고 돈벌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은 충격이었다. 과거와 단절하고 완벽한 새 세상을 열었다. 과연 지금의 인터넷은 또 다른 신세계를 열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건 우리에게 익숙했던 많은 것들이 사라질 것은 분명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누군가는 도태하고 또 다른 소수는 황금열쇠를 손에 쥐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누구나 선택의 순간이 있다. 자살도 그 중 하나다. 나는 그럴 일 없을 거야, 라고 다짐한들 소용없다. 한 정치인의 자살을 보며 언제나 그렇듯 몽테 크리스트 백작이 떠올랐다. 무고한 죄를 뒤집어쓰고 갖은 고생 끝에 다시 돌아온 그에게는 원수보다 은혜를 갚는 게 먼저였다. 자신을 끝까지 믿어 주고 돌봐주던 선주는 파산직전에 몰려 있었다. 빚은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도무지 갚을 방도가 없었다. 그는 권총을 들고 자살을 선택했다. 다행히 아들이 그 장면을 목격했지만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여기서 내가 죽어여만 나는 그나마 남들에게 너그러웠던 사업가로 기억된다. 살아서 목숨을 부지한들 내내 손가락질을 받고 말겠지. 그러나 내가 죽고 사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아. 너희들이 걱정이야. 내가 죽으면 아내와 아들은 가여움의 대상이 되지. 모든 잘못은 내가 안고 가는 것으로 족하지.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려는데. 


때로는 죽음이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살처럼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짓거리도 없다. 남은 사람들을 걱정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죽음, 자살을 포함하여, 에 너그럽다. 아무리 큰 잘못을 했다고 한들 목숨까지 끊었는데 모진 소리는 그만하자. 그러나 히틀러도 자살했음을 상기하자. 벌은 누가 받아야 하는가? 죽음으로 모든 죄는 청산되는가? 공소권 없음으로 그냥 끝인가? 지옥에 고발장이라도 보내야 하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일 때문이 아니라면 하루에 정해진 시간 동안 혹은 세 편 정도는 꼬박꼬박 글을 쓰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나도 마찬가지다. 물론 최소한 세 시간 정도 그리고 세 개의 글을 지어내고는 있지만. 그렇다. 내게 글쓰기는 일이다. 만약 직업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그럼에도 나는 내 안의 악마를 온전히 글로 풀어낼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매력적이다. 왜? “글을 쓰다보면 생각을 많이 하게 돼” 소설 <말 안하기 게임>을 읽다가 발견한 문장이다. 매우 공감이 간다. 글쓰기란 모든 면에서 비효율적이다. 다이렉트로 말을 하거나 그게 귀찮으면 카톡을 보내면 되지 않나? 반면 글이란 최소한의 격식을 갖춰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과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동시에 담아야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귀찮은 과정을 거치는 동안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된다. 처음엔 스스로를 돌아보고 도중엔 내 글을 읽을 사람을 떠올리고 마지막으로 기록으로 남게 될 걸 직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