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선택의 순간이 있다. 자살도 그 중 하나다. 나는 그럴 일 없을 거야, 라고 다짐한들 소용없다. 한 정치인의 자살을 보며 언제나 그렇듯 몽테 크리스트 백작이 떠올랐다. 무고한 죄를 뒤집어쓰고 갖은 고생 끝에 다시 돌아온 그에게는 원수보다 은혜를 갚는 게 먼저였다. 자신을 끝까지 믿어 주고 돌봐주던 선주는 파산직전에 몰려 있었다. 빚은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도무지 갚을 방도가 없었다. 그는 권총을 들고 자살을 선택했다. 다행히 아들이 그 장면을 목격했지만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여기서 내가 죽어여만 나는 그나마 남들에게 너그러웠던 사업가로 기억된다. 살아서 목숨을 부지한들 내내 손가락질을 받고 말겠지. 그러나 내가 죽고 사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아. 너희들이 걱정이야. 내가 죽으면 아내와 아들은 가여움의 대상이 되지. 모든 잘못은 내가 안고 가는 것으로 족하지.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려는데.
때로는 죽음이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살처럼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짓거리도 없다. 남은 사람들을 걱정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죽음, 자살을 포함하여, 에 너그럽다. 아무리 큰 잘못을 했다고 한들 목숨까지 끊었는데 모진 소리는 그만하자. 그러나 히틀러도 자살했음을 상기하자. 벌은 누가 받아야 하는가? 죽음으로 모든 죄는 청산되는가? 공소권 없음으로 그냥 끝인가? 지옥에 고발장이라도 보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