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에 가족들과 함께 가고, 그렇게 해서 특히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이 동물에 대한 사랑을 배운다는 그럴 듯한 말은, 또 다른 생명에 대한 인간의 오만이며, 폭력이며, 죄악을 감추고 싶은 인간이 만든 속임말일 뿐이다.
갇힌 동물에게 먹이를 주고 쓰다듬어 주는 것이 동물에 대한 사랑일까 ? 그게 동물에 대한 사랑을 배우는 것일까 ? 동물원 대신 자기가 살던 곳에서 뛰노는 동물을 볼 수 있고, 그 동물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이 되기를 바라고 노력하는 아이...그런 아이.....그런 아이를 위해서라도 동물원을 없애자.
아래 글은, 박노자가 쓴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한겨레 신문사)에서 발췌했다.
동물원, 무죄의 종신형
(생략)
이국적 동물포획과 식민지 지배
(생략) 어른들의 눈요기나 신기한 동물에다 손가락질하는 아이들의 쾌락을 위해서 아프리카·아시아·남미의 다습하고 따스한 고향 오지에서 춥고 건조한 유럽으로 강제로 옮겨진 동물들의 불편함과 고통을, 새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밀림·초원에서 몇십 제곱킬로미터를 활동공간으로 삼는 코끼리나 사자가 몇십 미터도 안 되는 우리 안에서 평생 지내야 하고, 온갖 화학 약물이 다 들어 있는 먹이를 먹고, 어른들과 끝없이 귀찮게 하는 어린이들의 무리를 대하는 것은, 과연 작은 스트레스일까?
기린이나 사자, 고릴라의 피곤하고 생기없는 행동에서,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기후·음식에의 적응 실패 등으로 말미암은 일종의 신경병마저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가장 놀라웠던 것은, 독일 청소년들의 견학 모습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고릴라나 침팬지에게 주먹질하거나 위협하고 놀라게 하는 행동을 하며 즐거워했다. 주위의 어른들도 무관심한 동물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자녀들과 함께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데 거기다 괴롭히기까지 하는 그들이 차라리 며칠이라도 ‘바꿔서’ 그 우리 생활을 해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부모들이 아이를 거의 의무적이다시피 데려가는 동물원의 기원과 문화사적 배경은 과연 무엇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해서 군주·귀족들이 언제나 신기하고 이국적인 동물들을 일종의 ‘위신재’(위신을 나타내는 물품)로 삼아 과시적으로 기르곤 했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인 19세기에 유럽 열강과 일본이 앞을 다투어 설치한 현대적 동물원들은, 과거 왕실들의 이국 동물 ‘컬렉션’과 질적으로 달랐다. 첫째, 전세계와 무역을 해서 자본 축적을 이루어낸, 그리고 세계의 ‘주변부’로 전락한 비(非)구미 지역을 식민지 통치하는 ‘열강’들은, 무엇보다 전 지구의 일체 주요 종류들을 체계적으로 수집·전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유럽 제국주의가 ‘세계성’을 과시했듯이, 그 상징인 동물원도 빠짐없이 ‘일체의 주요 종류’를 만천하에 보여주어야 했다. 세계 침략자다운 그 허영심의 대가는, 말할 것도 없이 낯선 유럽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가 외롭게 일찍 숨진 무수한 열대·아열대 동물들의 목숨이었다.
둘째, 동물원은 ‘과학적인’ 동물학의 중심지가 되어야 되며, 동물학 ‘교육’을 책임져야 한다. 과학적인 현대 무기로 지구를 정복한 제국주의자들은, 무소불위의 ‘과학적 지식’이 자신들의 전유물이자 뒷받침이라는 것을 과시하기에 바빴다. 셋째, 현대식 동물원의 대중성은, 일반인 관람객들이 이국적 동물들의 포획·운송·사육을 가능케 한 제국주의적 국가와 그 ‘과학’의 위력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일반인 관람객으로 하여금 이국적인 동물의 포획의 배경인 세계 ‘주변부’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당연시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했다. ‘주변부’ 민족들의 문화에 대한 ‘과학적인’ 파악을 통해서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상징했던 ‘민속학’/‘세계 민족’ 박물관과 함께, ‘주변부’ 동물에 대한 ‘과학적 파악’을 의미했던 동물원은 제국주의 시대의 핵심 기관이었다. 동물원이 ‘국위 선양’을 의미했던 제국주의 황금시대, 19세기보다 덜하지만, 베를린 동물원을 찾은 독일 학생들과 아이들이 아프리카·아시아 동물들을 독일의 하늘 아래로 운송시킨 독일 국가의 위력이 어느 정도 큰지를 알게 모르게 배우게 되는 것이다.
노르웨이 동물원, 감옥형 탈피했지만…
사진/ 동물원제도의 폐지를 요구하는 한 단체의 포스터(위)와 동물원을 비판·감시하는 단체의 홈페이지(아래)
‘생물학 교육의 기능’을 존재의 이유로 내거는 동물원은, 사실상 제국주의의 전통대로 의식·무의식적으로 ‘민족적/국가적 긍지’를 습득시키는 기관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숨겨진 기능’이 없었다면, 요즘과 같은 환경의식 고조의 시대, 녹색당이 집권여당이 된 독일에서 동물원이라는 제국주의 시대식의 ‘동물 감옥’이 국고 보조금을 과연 계속 받을 수 있었을까?
‘생물학 교육의 기능’을 존재의 이유로 내거는 동물원은, 사실상 제국주의의 전통대로 의식·무의식적으로 ‘민족적/국가적 긍지’를 습득시키는 기관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숨겨진 기능’이 없었다면, 요즘과 같은 환경의식 고조의 시대, 녹색당이 집권여당이 된 독일에서 동물원이라는 제국주의 시대식의 ‘동물 감옥’이 국고 보조금을 과연 계속 받을 수 있었을까?
독일을 위시한 유럽의 ‘주요 국가’(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들은, ‘국위의 상징’인 대형 동물원을 이미 18∼19세기에 설치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변두리’에 위치한, 그리고 1905년이 되어야 독립을 얻은 노르웨이는, 1960년대까지 대형 동물원 설치를 꿈도 꾸지 않았다. 내세울 만한 ‘국위’, 제국주의적 대국 의식’이 없었다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생기기 시작한 노르웨이 동물원들은, 공교롭게도 노르웨이가 석유 산유국이 되어 ‘오일달러’의 유입이 본격화된 1970년대부터 상당히 대형화됐다. 그중에서도 관람객이 가장 많은 노르웨이 남부 크리스티안산(Kristiansand)시의 동물원은 그 면적이 매우 넓고 동물의 종류도 아주 다양하다.
1970∼80년대의 ‘동물원의 붐’은, 기본적으로 부유해지고 여유가 많아진 노르웨이 도심사회의 휴식/오락 욕구와 관련된 현상이었다. 게다가 노르웨이의 동물원들은 환경운동가들의 비판을 의식하여, 기존의 ‘감옥형’ 동물원들을 모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크리스티안산 동물원은 비판자들의 의견을 부분적으로 수렴해, 동물 우리를 아예 짓지 않고 반대로 관람객이 다니는 오솔길만을 담 등의 시설물로 보호했을 뿐이다. 잡혀와 고통받는 동물에게 자연 그대로의 활동공간을 주지는 못해도 적어도 가능한 한 고통을 줄이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발상이다.
최근에 단순한 동물원이라기보다는 종합오락공원의 면모를 띤 크리스티안산 동물원에서 아이들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동물 그 자체라기보다는 갖가지 연극과 게임, 실내 수영장과 디즈니랜드를 방불케 하는 최첨단 오락시설 등이다. 텔레비전·비디오·인터넷 등으로 희귀한 열대동물을 원할 때 매일같이 볼 수 있는 세상에서, 동물 전시의 오락적인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은 커다란 다행이 아닌가 싶다. 미래에 언젠가 동물원들이 동물들의 고통을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날이 올 것을 믿고 싶다.
인간의 야만성에 관한 불멸의 증거
그러나 크리스티안산 동물원과 같은 선진형 동물원에서도 무죄의 종신형 죄수, 동물들의 고통은 마찬가지이다. 잡혀온 동물 대부분은 각자가 한 동물 가족의 소중한 구성원이다.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동물 가족을 지켜보며 흐뭇해하면서도, 동물 포획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는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크리스티안산 동물원으로 운송될 때에도 동물들은 약물주사를 맞곤 한다고 한다. 활동면적이 아무리 넓다 해도, 밀림이나 초원의 정신적, 활동적 자유와 비교될 수 없다는 뜻이다.
기업체(주식회사)인 크리스티안산 동물원은, 원숭이와 낙타 등이 낳은 2세들을 외국 동물원에 팔아 이윤을 좀더 많이 남기려 한다. 그러나 팔리지도 않고 전시되지도 못하는 2세들을 약물주사로 죽이는 것도 다반사다. 결론적으로, 크리스티안산 동물원과 같은 최신식 동물원들이 아무리 모범적인 시설이라 해도, 그 역시 기존 동물원들의 부정적인 관습들의 상당부분이 그대로 지속되는, ‘고급 감옥’일 뿐이다. 그리고 설령 약물주사나 임의적 죽임 등을 비롯한 부정적인 관습들이 없어진다 해도, 인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동물들의 자유에 대한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박탈 그 자체는 어떻게 합리화될 수 있는가? 인간이라는 동물이 더 강하고 똑똑하다 해서 더 약한 동물에게 죄를 저지를 권리는 없다. 봉건시대의 군주·귀족들의 과시적 사치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제국주의적 ‘과학성’의 상징, 동물원의 지속적 존재는 인간의 야만성의 불멸을 증명해줄 뿐이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